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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92화 (92/250)

92화

“그건 아닐 겁니다. 검천사위나 암중의 호위도 행적을 놓쳤습니다.”

고강후가 떠보았으나 귀영은 넘어가지 않았다.

“네게 거짓 귀로를 일러준 걸 보면 믿지 않는다는 것 아니냐?”

“저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끄응…….”

고강후는 천하방의 후계자가 될 자신이 고작 어린놈에게 신경을 쓰는 게 마뜩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 귀영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를 믿게끔 최선을 다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받아라.”

고강후가 전낭을 던졌다.

귀영이 받아 열어보았다.

은자 열 냥이 들어 있었다.

귀영이 속으로 욕했다.

‘흥, 겨우 열 냥? 나를 아직도 스무 살 어린애로 보냐?’

속마음과 달리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수고했다. 나가 봐라.”

고강후가 별 게 아니라는 듯 손을 저어 귀영을 내보냈다.

귀영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고강후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다른 놈을 붙여야겠구나.’

쓸 만한 놈은 많다.

하지만 자신만 알아야 하고, 나중에 살인멸구를 해야 할 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귀찮기도 했고.

‘고작해야 이제 열여덟 살짜리 어린애 아닌가. 제 놈이 날고 기어봐야 감히 내 상대가 될 수 없지. 지금은 패천부를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어린놈에게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고강후가 생각을 정리했다.

귀영은 도천부를 나오다 뒤를 돌아봤다.

“흥! 부주는 네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소용없어.”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근데 이 어린 여우는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지?’

***

해가 저물 무렵, 천하방 성 밖 마을.

변복을 한 무한이 들어섰다.

남궁세가에서 이틀 더 머문 뒤 곧장 달려오는 길이다.

‘백상(苩商)이라고 했지?’

백의영이 성 밖 마을에 세운 백가상단 지부의 명칭이었다.

백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쿵! 쿵!

무한이 문을 두드리자 낯익은 얼굴이 나왔다. 백가상단을 드나들며 봤던 자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장오라고 합니다. 기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들어가시죠.”

무한이 장오를 따라 장원 후원으로 갔다.

“이제 왔나?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후원으로 나오던 연추산이 무한을 보고 한마디 던졌다.

말은 투박했으나 표정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다.

“지루하기는. 술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는데 지루할 틈이나 있었겠어?”

맞은편 방에서 홍염이 나오며 연추산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오상과 장초도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고벽후는 보이지 않았다.

“고 형님은 어디 계세요?”

“답답하다고 바람 쐬러 나갔다.”

무한과 멸마대 형제들이 회포를 푸는데, 고벽후가 노루 한 마리를 이고 돌아왔다.

이를 보고 연추산이 투덜거렸다.

“본방에는 사람도 없나? 실종자가 코앞에서 활보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번에 방으로 돌아가면 푸대접 받을 거야. 그전에 몸보신이라도 해야지.”

고벽후가 노루를 장초에게 넘겼다.

“고기는 장초가 잘 굽지.”

“에이, 이제 막내가 구워야죠.”

“막내가 보통 막내냐? 검천부주시다. 네가 굽는 게 맞아.”

오상이 말했다.

“손질은 내가 하지.”

장초가 비수를 꺼내 노루의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겼다.

후원에 모닥불을 피우고 노루를 구웠다.

무한은 감숙지부에 갔던 날 저녁에 고기를 구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두 묵묵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타오르는 불빛에 비친 얼굴들은 어두웠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장초가 중얼거리자 오상이 타박했다.

“실종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 수는 없지.”

“대형, 차라리 소마와 한판 붙는 게 낫지 않겠소? 본방 놈들과 입씨름하는 건 정말 질색입니다. 그놈들 거만한 낯짝을 볼 생각하니 술이 넘어가지 않소.”

연추산이 말했다.

고벽후가 묵묵히 술잔을 들어 마시고는 말했다.

“우리의 적이 소마라고 생각하나?”

“…….”

고벽후가 무한을 보았다.

“오면서 생각을 해봤다. 군사부에서는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들 거야. 너까지 말려들 필요는 없다.”

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고벽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대형 말씀이 맞아.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검천부나 잘 지키라고. 와서 보니 검천부도 위태위태하더만.”

오상이 말했다.

“너를 기다린 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네가 왔으니 우리는 내일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걱정 마. 만일 허튼 수작을 부리면 다 때려 부수면 되는 거야.”

연추산이 주먹을 흔들었다.

“박살내 버리자고.”

장초가 잔을 들었다.

“좋아! 내 신랑답다!”

홍염이 술잔을 부딪치며 맞장구쳤다.

“이잉? 뭔가 이상하잖아? 아직도 신랑이야?”

장초가 인상을 쓰자 모두가 왁,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살아났다.

밤늦게까지 모두 고기와 술을 먹고 마셨다.

***

무한은 새벽 일찍 검천부로 들어갔다.

“드디어 오셨군요! 서현에 딴 살림 차린 줄 알았잖아요.”

유아가 호들갑을 떨며 맞아주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어. 그간 별일 없었어?”

“일이 있을 게 뭐예요. 아무도 찾지 않는데.”

무한은 유아에게 백가상단과 맺은 사업 내용과 성 밖 마을 백가상단 지부를 알려주었다.

“대박! 천하상단에서 사업권을 내준 것도 모자라 새로 사업도 내줬다고요?”

무한이 천이금으로부터 받은 사업 내역을 건네자 유아가 기분이 좋아 어깨춤을 추었다.

담철조와 공곤은 검천부에 없었다. 그들은 무한의 명을 받아 천하각지의 천하방 문파를 순회하는 중이다.

무한이 돌아오자 귀영과 검천사위가 찾아왔다.

무한은 귀영에게 말했다.

“군사부 주요 인물과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세요.”

“군사부요? 거긴 보안이 철저한 곳인데요?”

“그러니까 귀 호위께 맡기는 거죠.”

무한이 띄워주자 귀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기는 저 외에 할 만한 자가 없죠.”

귀영이 뿌듯해하며 방을 나갔다.

“무흔 대협?”

스르륵.

무흔이 나타났다.

“귀 호위가 군사부를 들쑤시고 다닐 겁니다. 그럼 분명 무슨 반응이 있겠지요. 잘 지켜봐주시겠어요?”

“저는 누구를 지키는 사람이지 이목이 아닙니다만.”

“그게 저를 지키는 겁니다.”

무한의 말에 무흔이 토를 달지 못하고 사라졌다.

무한은 검천부 후원으로 갔다.

요산자와 화정노, 풍운벽력수와 목령산인을 차례로 찾아 인사를 했다.

“엉? 어디 갔다 왔다고?”

무한이 떠나기 전 분명 인사를 했건만, 풍운벽력수는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다.

요산자와 화정노, 목령산인도 모두 자신들의 수행에 빠져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눈치였다.

무한이 오랜만에 인사를 왔는데도 받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머리만 끄덕였다.

무한은 그들이 보통 무림인과는 다르게 선도 수련을 하는 이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런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산도를 찾아가니 그는 볕이 든 창가에 앉아 졸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으응?”

선잠에서 깬 산도가 실눈을 뜨고 무한을 보았다.

“얻은 게 좀 있는 모양이구나.”

산도가 무한을 살피며 말했다.

“네 할애비가 이른 나이에 천하제일인으로 불리긴 했지만 제대로 성취를 이룬 건 예순이 넘어서였다고 할 수 있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기는 천하제일인의 경지를 누가 알겠는가.

“경천십이식은 그래서 네 할애비의 깨달음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후학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깨치기 어려운 검법이 되었어. 천하제일인의 오의를 온전히 체득하기란 요원한 일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무한은 한때 경천십이식을 완성하기 위해 매달렸다.

그러나 서현에서 화수전과의 싸움에 이어 검마와 기운을 섞은 경험을 한 뒤 조급한 마음을 버렸다.

“안다고?”

산도가 콧방귀를 뀌었다.

“뭘 안다는 거냐?”

“경천십이식과 경천승운공을 제대로 얻기 위해선 저만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걸 말씀하신 거 아닌가요? 그래서 요산자 사부 등을 보내주신 거고요.”

“으음. 이제야 문턱에 올라섰구나.”

“모두 어르신들 덕분입니다.”

“경천십이식에 심양조의 깨달음이 깃들면서 무공이되 무공의 한계를 벗어난 수행의 방법이 되었다.”

산도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는 경천십이식을 통해 수행을 할 것이냐? 무공을 이룰 것이냐?”

“그 둘이 다릅니까?”

“다르다고 할 수도 있고 같다고 할 수도 있지. 수행으로 무공을 높일 수도 있고, 무공을 통해 수행의 길에 들어설 수가 있으니 같은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끝이 다르니 다르다고 할 수도 있지.”

무한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지금은 그저 보이는 대로 가렵니다. 가다 보면 어느 길인지 알게 될 것 같군요.”

“그것도 방법이다. 다만…….”

산도가 무한을 주시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 그래도 괜찮다면야 좋을 대로 해라.”

무한은 산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무한이 스무 살이 되면 산도와 기인들은 떠날 것이다. 그 전에 성취를 이루라는 뜻이다.

산도는 다시 눈을 감더니 꾸벅꾸벅 졸았다.

무한은 조용히 산도의 거처를 나왔다.

‘어차피 홀로 가는 길 아닌가.’

***

고벽후와 형제들은 정오 무렵 천하방 정문으로 걸어들어왔다.

외성과 내성 문 앞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으나 연추산이 앞장서서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멸마대의 귀환을 지켜보았다.

고벽후는 곧바로 천하대전 앞까지 걸어가 섰다.

“감숙 멸마대주 고벽후가 방주를 뵙기 청하오.”

고벽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멸마대는 마천과 싸우다 실종됐다던데?”

“전멸 당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잠시 후.

천하대전 뒤편에 있는 군사부에서 몇 사람이 나왔다.

“고 대주와 멸마대는 군사부에 와서 그간의 정황부터 보고하시오.”

“천하방 무력대에게 명을 내릴 수 있는 자는 방주뿐이다.”

고벽후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자 군사부에서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고벽후와 멸마대를 에워쌌다.

“멸마대는 싸워보지도 않고 감숙 지부를 적에게 넘겼소. 이에 대한 조사 없이 방주를 뵐 수는 없소.”

“흥!”

군사부 사람이 두루마리로 된 문서를 펼쳤다.

방주의 직인이 찍힌 명이다.

“군사부의 조사부터 받으라는 방주의 명이오.”

무사들이 고벽후 등을 포박하려 했다.

“이것들이?”

콰당!

연추산이 자신의 양팔을 잡으려는 무사들을 잡아당겨 서로 부딪히게 하더니 밀쳐 쓰러뜨렸다.

“정말 해보자는 것이오? 여러 형제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방주의 명을 무시하다니. 이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이오.”

“알았다. 알았어. 너희와 다툴 생각은 없다.”

고벽후가 군사부 사람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군사부가 멀쩡한 멸마대를 실종이라 공표한 이유가 뭔지 나도 궁금했다. 가자!”

고벽후와 멸마대가 군사부로 들어갔다.

***

“곧바로 군사부 안가에 연금되었답니다.”

귀영이 군사부 동정을 살피고 돌아와 보고했다.

“…….”

무한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군사부…….’

강경파의 소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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