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무한은 남궁우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하고 연회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남은 물자가 풍부하다. 큰 상단과 정파가 많아 흑도나 사파의 세도 약했다. 태평성대 가운데서도 가장 안온한 곳이 휘주였다.
풍족한 지방에서 이름난 문파들의 자제들이니 부족함이 없이 자란 이들이다.
남자들은 날아오르려는 용처럼 활기찼고, 여자들은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했다.
무엇보다 구김살이 없어 보였다.
휘주용봉회라는 이름에 딱 어울렸다.
무한은 문득 검마의 말이 떠올랐다.
- 지금 네가 쥔 걸 생각하면 그리 말 못할 것이다. 밑바닥에 있는 놈들은 갖은 짓을 다하고도 여전히 밑바닥에서 죽지.
선대의 음덕을 보고 있는 자신처럼 이들 또한 유복한 가문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무한의 머릿속으로 감숙 변방의 멸마대가 떠올랐다.
그들이 야생 늑대라면 눈앞의 젊은이들은 잘 가꿔진 정원의 화초와 같았다.
그들의 비무가 화려한 검무처럼 느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천의 무력대라도 만나면 바로 목숨을 잃겠구나.’
승룡대를 몰아붙이던 마천도들의 악귀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누군가 다가와 묻는 바람에 상념이 깨졌다.
무한이 돌아봤다.
남궁우가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검천부주와 술 한 잔 섞고 싶어 왔습니다.”
남궁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준수하기 짝이 없었다.
고른 치열에 도톰한 입술, 살짝 꼬리가 올라간 눈, 오똑한 코까지.
‘여자라고 해도 믿을 것 같구나. 아니 여자 아닐까?’
무한의 시선이 자연스레 가슴으로 내려갔다. 남장여인이 아닌가 무심코 확인을 하려든 것이다.
그런데 남궁우는 젊은이답지 않게 묵직한 장포를 입고 있어 알 수가 없었다.
무한이 자신의 가슴을 보자 남궁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가슴이라도 열어보고 싶은 모양이오?”
남궁우의 말에 무한은 자신의 무례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겁니까?”
“워낙 용모가 뛰어나서 남장여인이 아닌가 착각했습니다.”
무한이 솔직하게 말하자 남궁우가 피식, 웃었다.
“가끔 당하는 일이긴 한데 검천부주께서 그러니 기분이 더 나쁘군요.”
대놓고 기분 나쁘다니 무한은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사과는 드렸는데 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 미안하다면 벌주 석 잔을 마시는 걸로 퉁 칩시다.”
남궁우는 생김새나 목소리와 달리 시원시원했다.
“좋습니다.”
무한이 술잔을 내밀었다.
남궁우가 술을 따르자 마시고 또 따르자 또 마셨다.
석 잔을 연달아 마시자 남궁우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보기와 달리 아주 술이 세군요. 혹시 주기를 빼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그러잖아도 은연중 술기운을 빼려던 무한이 뜨끔하여 멈췄다.
남궁우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훅, 하고 마셨다.
“역시 술은 좋은 벗과 마셔야 좋지요.”
그러더니 술병과 잔을 포개는 식으로 손을 모아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요. 남궁우라고 합니다. 남궁가의 방계이죠. 말하자면 떨거지라고나 할까.”
스스로를 떨거지라 하다니.
무어라 대꾸하기 어려운 소개다.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언제 왔는지 남궁명이 다가오며 남궁우를 타박하고는 무한에게 소개하였다.
“내 사촌이라네. 그런데 아버님은 우리 삼형제보다 이 녀석을 더 아낀다네.”
남궁우가 술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야 형님들이 쌈박질만 할 줄 아니 그런 거죠.”
“허 참.”
천무관 문향전 상방 출신 남궁명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긴 아버지와 제대로 논쟁을 벌일 자는 이 녀석밖에 없다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얼굴은 말 많은 노인네 떠맡긴 표정이다.
“좀 있다 봅시다.”
남궁우가 무한의 어깨를 툭, 치고는 사라졌다.
‘있다가 보자고?’
그때까지만 해도 밤이 그렇게 길지 몰랐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밤이 깊었으니 연회를 파하겠소! 묵을 방은 충분하니 푹 쉬시기를 바라오.”
남궁악이 연회를 끝냈다.
악일비가 무한에게 다가와 말했다.
“천하방 형제들은 본문으로 가서 묵을 겁니다. 부주와는 여기서 작별해야 할 것 같군요.”
남궁세가에서 남악문은 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밤중에 길을 나선다는 게 의외이긴 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무한이 마주 예를 취했다.
“본방에서 뵐 날이 있겠지요.”
“검천부주께서 휘주의 형제들을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하방은 한 형제입니다. 남악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옆에 검천부가 있을 겁니다.”
무한의 말에 악일비가 흠칫, 하더니 무한을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악일비와 헤어져 거처로 돌아왔는데 방문 앞에 남궁우가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남궁우가 손에 든 술병을 흔들었다.
“밤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술을 더 하자는 뜻이다.
“술보다는 차를 마시는 게 어떻겠소.”
거실로 들어서자 남궁세가의 시비들이 화로와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앉으시죠.”
무한이 차를 내려는데 남궁우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정말 차를 낼 생각인가? 쪼잔하게 차나 훌쩍거리는 건 백면서생이나 하는 짓이지.”
그러고는 술병을 턱,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꼰대같이 말하지 말자고.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야. 아니, 내가 조금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무한이 물끄러미 남궁우를 바라보았다.
왠지 대책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몸이 앞뒤로 흔들거리는 게 약간 취한 듯 보이는 남궁우는 찻잔을 집어다 술을 따랐다.
“앞으로 한배를 타려면 주량부터 합을 맞춰야 하지.”
“한배를 타다니?”
“검천부주에게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나 같은 사람.”
남궁우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대의를 도모하기 앞서 술 한 잔 나눠야 하잖아?”
이제는 말까지 놓았다.
술을 다 따른 남궁우가 건배를 하자며 자기 잔을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 어서 술잔을 들라고 재촉했다.
“에잉!”
무한이 술잔을 집을 기색이 없자 혼자 훌쩍, 마시고는 커, 하고는 인상을 썼다.
“좋구나.”
“대체 이 밤중에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온 거요?”
“아, 보기보다 좀 답답한 인간이네?”
무한이 여전히 말을 놓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펴더니 시를 읊듯 중얼거렸다.
“가슴에 품은 뜻은 크고 할 일은 많은데 외로운 산에 오르니 갈 길이 멀구나.”
“…….”
무한은 할 말이 없었다.
‘연극을 많이 본 모양이네.’
이를 테면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같은…….
내심 웃음이 나왔으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남궁우가 술이 묻은 입가를 쓱, 닦고는 무한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천하방에서 검천부의 입지가 어떻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거든? 내가 도와주지.”
“…….”
“아. 남궁세가의 지낭이 도와준다잖아. 감격해야 하는 거 아냐?”
무한이 피식, 웃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엉? 왜에?”
남궁우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남궁지낭이 도와준다는데 필요 없다고? 그거 진심이야?”
“응.”
남궁우는 거절당하리라 생각지 못한 듯 입만 딱 벌리고 말을 못했다.
그러다 아, 하더니 말했다.
“내가 너무 콕 찍어 말했나? 하지만 익숙해져야 해. 나는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거든.”
남궁우가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말했다.
“솔직히 도천부를 찾아갈까 생각도 했지. 남아가 뜻을 품었으면 큰물에서 놀아야 하니까.”
“…….”
“하지만…… 쉬운 건 의미가 없어. 공명이 왜 조조가 아닌 유비를 택했겠어.”
“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아니 안 취했다니까.”
혀까지 꼬인 것 같은데.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 아닌가? 이제 천하방은 도천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라고.”
“대체 뭘 원하는 건데?”
듣다못해 대꾸하자 남궁우가 정색을 하고 눈빛을 반짝이더니 말했다.
“천하경영!”
“헛.”
무한이 실소를 흘리자 남궁우가 발끈했다.
“어? 지금 무시하는 거야?”
“무시는 아니고. 한밤중에 뜬금없이 찾아와서 천하경영을 함께 하자면 누구나 황당해하지 않을까?”
남궁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생각보다 의뭉스러운 인간이군. 심계가 깊어. 좋지 않아…….”
무한은 머리가 아팠다.
남궁지낭이든 뭐든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만 가지?”
“어? 지금 나를 쫓는 거야?”
“나는 천하를 경영할 생각도 없고,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아.”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다니. 정말 한심하군.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남궁우가 탄식하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인재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무슨 일을 도모하겠다는 거야.”
“알았으니까 어서 가라고.”
무한이 남궁우를 부축하여 밀어내고는 방문을 닫았다.
“후회할 거야!”
남궁우가 방밖에서 소리쳤다.
무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등불을 껐다.
“흥! 나중에 삼고초려를 한다 해도 소용없을 걸!”
***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고강후가 음침한 얼굴로 귀영을 보았다.
귀영은 동이현에 오산사걸을 심어놓고 사방을 쏘다니다 한 달이 훌쩍 넘어서야 천하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도 고강후의 부름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미뤘으나 끝까지 대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제멋대로 굴고도 뻔뻔하게 면상을 내미는 귀영을 보자 고강후는 분이 치밀었다.
고강후의 시선이 귀영의 얼굴을 뚫을 듯 날카로웠다.
귀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세상 구경을 하러 다니는 모양입니다. 저까지 떼놓고 가는 바람에…… 찾는다고 사방을 뒤지다 이제야 온 겁니다.”
“얼굴을 들어라.”
귀영이 고개를 쳐들자 고강후가 뚫어져라 노려봤다. 거짓을 고하는 게 아닌가 살피는 눈초리였다.
귀영은 화경의 고수가 뿜는 살벌한 눈빛을 받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흥! 아직도 네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신세인 줄 아나? 내가 이래봬도 검천부주의 심복이다.’
귀영은 내심 코웃음을 쳤으나 겉으로는 두려운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귀영이 자신을 두려워하자 고강후는 일단 의심을 풀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바로 보고하러 오지 않았지?”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바로 왔어야지. 네놈의 보고 때문에…….”
고강후가 말을 하다 말고 끊었다.
장강수로십팔채를 이용하여 무한을 제거하려 했던 걸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에잉. 장강교룡 그놈 입에 처넣은 돈이 얼만데.’
장강수로십팔채 총채주 장강교룡은 무한을 제거하는 대가로 황금 일만 냥을 요구했다.
그런데 무한이 수로를 따라 올라오지 않았으니 계약금으로 건넨 황금 일천 냥만 날린 셈이다.
귀영은 납작 엎드려 변명했다.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검천부 사람들도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무한이 무공을 수련하고자 황산에 오른 것이 공교롭게도 고강후를 따돌린 셈이 되었다.
“네가 이중첩자라는 걸 눈치챈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