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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88화 (88/250)

88화

다음 날.

무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부주, 부디 몸조심 하십시오.”

검천사위도 올 때 몰고 왔던 쌍두마차를 끌고 떠났다.

“뭐야, 이렇게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관계였어? 그동안 내가 해먹인 밥이 몇 솥인데.”

귀영이 투덜거리다 마당가에 앉아 있는 오산사걸을 보고는 화를 냈다.

“뭐야?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퍼질러 앉아 있어? 일어나지 못해!”

오산사걸이 재빨리 일어나 대기했다.

“에잉! 위나 아래나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무한이 말에 오르자 귀영이 물었다.

“가는 길은 알려주셔야죠!”

“도천부 고문에 못 이겨 털어놓을 수도 있으니 모르는 게 낫죠.”

무한의 말에 귀영은 입을 딱 벌렸다.

“저를…… 저를…… 그런 놈으로 보셨습니까? 제가 부주의 행적을 불 것 같습니까?”

“설마…… 귀 호위를 믿습니다.”

무한은 그길로 천하상단으로 갔다.

천평산이 떠나기 전 찾아오라고 한 말을 잊지 않았다.

몇 번 드나든 천평산의 거실이 눈에 익었다.

우곤충이 빠진 천평산은 그새 체중이 많이 빠졌다.

무한이 들어오자 책상서랍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뭡니까?”

천평산이 회한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천하상단은 검천부와 함께 성장했네. 그래서 가장 믿는 자식에게 검천부와 도천부 사업을 맡겼지.”

“…….”

“내가 천하방의 사정을 몰랐네. 아니, 신경 쓸 새가 없었다고 변명해야 하나…….”

우곤충은 숙주로 하여금 끊임없이 먹을 걸 찾게 만든다. 보통사람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먹기만 했을 것이다.

의지가 강한 천평산이었기에 그나마 뒷전으로 물러났음에도 실권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자네가 찾아오고서야 검천부 사업이 그 지경인 걸 알았지. 그래서 바로 내주라고 하고…… 그걸 따로 준비했네.”

천평산의 시선이 봉투로 향했다.

무한이 열어보자 두툼한 전표 뭉치가 나왔다.

“천만 냥일세.”

엄청난 금액이었다.

아무리 재신이라지만 이를 준비하는 데 시일이 꽤 걸렸을 것이다.

“그간의 손실이 얼만지는 모르지만…… 부족하다면 남은 건 이금이 넘긴 사업으로 대신함세.”

“알겠습니다.”

무한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자금이었다. 그랬기에 문파 예방을 끝내자마자 천하상단을 찾은 것이다.

백가상단에 사업을 넘겼다고 하나 수익이 나려면 시일이 꽤 걸릴 것이다.

언제까지 비밀연무장의 야명주를 빼내서 쓸 수도 없는 노릇.

천만 냥은 앞으로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천평산이 말했다.

“상인은 이익을 주는 사람을 동지로 여기지. 하지만…… 때로는 그걸 벗어난 관계도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자신과 검신의 관계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무한이 말없이 예를 취했다.

천하상단을 나온 무한은 저자거리로 나가 옷가게를 찾았다.

잠시 후 옷가게에서 나온 무한은 백면서생 딱 그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서점에 들러 책까지 사서 한보따리 말등에 실었다.

서현을 벗어난 무한은 천하방이 있는 호북이 아닌 반대편 황산으로 향했다.

백의영의 표행과 함께 출발하는 고벽후가 천하방 성 밖 마을에 도착하는 시기는 앞으로 두 달 후.

무한은 그동안 자신의 무공을 다듬을 생각이다.

‘고작 살수들에게 죽을 뻔 했다.’

고벽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한은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화수전 일급살수 여덟과 사대살수 중 한 명이 동시에 살수행을 펼쳤다면 진경의 고수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무한에게는 그런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에 귀방하면 본격적으로 암중의 적과 부딪혀야 한다. 이 기회에 완전히 이뤄야 해.’

황산은 중원 명산답게 선경을 방불케 하였고, 곳곳에 도관과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무한은 그중 정법사(正法寺)란 절을 찾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정법사는 무승이 없는 평범한 사찰이었다.

무한은 과시를 준비하는 서생이라고 하고 외딴 암자를 빌렸다.

계곡 절벽에 숨은 암자는 삼 장 넓이의 마당까지 있어 수련하기에 적당했다.

그렇게 절간 생활이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무한은 천기조양환의 약효를 완전히 녹여냈다.

‘이 정도면 일갑자 반에 이를 것 같구나.’

약효를 녹이며 내공이 깊어졌다.

이제 깨달음만 얻으면 진경에 들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수련해도 진경에 이르기 쉽지 않으니 무한의 성취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부족했다.

‘고강후는 진경 이상이라고 했지.’

무한은 귀영으로부터 고강후가 진경 이상일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귀영의 눈이 맞다면 지금 성취로는 부족할 것이다.

진경은 평범한 무인 천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성취로, 일파의 종사 급이다.

초절정까지 수련을 통해 무공을 성취한다면 진경부터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나는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을까?’

백 명?

무한은 곰곰 생각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전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광포와의 싸움, 화수전 살수들과의 격전이 전부였다.

어찌됐든 지금처럼 기운이 충만하다면 백 명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천기조양환의 약효를 완전히 흡수한 뒤부터는 경천십이식과 무형검을 익혔다.

한 달여 매진한 끝에 열 번째 초식 무극격까지 연달아 펼칠 수 있었다.

열한 번째 공공격은 단독으로 펼칠 수 있었고, 열두 번째 경천격은 아직 흉내만 내는 수준이었다.

무형검은 여의치 않았다.

손바닥에 띄운 무형검은 실제로는 강기였다.

대개 검이나 칼에 강기를 실어 사용하는데 내기를 발출하여 강기를 유형화하는 것이 무형검이다.

처음 손바닥에 띄웠을 때 한 뼘 크기였던 무형검이 한 자가량 커지기는 했으나 대신 강도가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마의 마왕검벽은 대체 얼마나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하는 걸까?’

현재 무한의 수준에서 무형검을 형성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이를 모르는 본인은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내공이 깊어지며 천목투심술의 경지 또한 한층 올라섰다.

무한은 자신의 미간에 보이지 않는 눈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

남궁세가 정문이 활짝 열리고 무인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평소에도 수많은 무인이 드나들었으나 오늘은 유난히 지체가 있어 보이는 젊은 무인들이 많았다.

해가 질 무렵.

말을 탄 서생 하나가 남궁세가의 정문에 당도했다.

아직까지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수문위사의 위맹한 눈초리가 서생을 저지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서생은 말에서 내려 다가와 말했다.

“삼공자에게 심무한이 찾아왔다고 전해주시오.”

수문위사는 비록 서생 차림이나 기도가 범상치 않자, 바로 접객당으로 가서 보고했다.

“삼공자를 찾아왔다고?”

마침 남궁세가에서 열리는 행사 때문에 분주했던 접객집사가 창 너머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젊은 서생 하나가 대문 앞에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외당으로 향했다.

삼공자의 지인이라면…… 경시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외당에서 내당으로, 이어 삼공자의 거처로 전해진 전갈을 받고 남궁명이 달려왔다.

대문 앞에 서 있는 무한을 본 남궁명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안 그래도 그냥 갔나 서운해 하던 참이었네.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건가?”

“황산이 절경이라고 해서 이곳저곳 구경하고 왔습니다.”

“말이라도 하지. 그랬다면 내가 따라나섰을 게 아닌가.”

“그런 수고를 끼쳐드릴 수야 없죠.”

삼공자가 서생을 각별히 대하자 수문위사와 접객집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더니…… 중요한 손님이었나 보다.

남궁명이 직접 무한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갔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내일 아버님을 뵙기로 하지.”

“그러죠.”

남궁명은 무한에게 정원이 딸린 별채를 내주었다.

무한이 씻고 잠시 쉬는데 남궁명이 다시 왔다.

“둘이 조촐히 회포를 풀까 했더니 굳이 형님들도 함께 하자고 하지 뭔가.”

남궁명은 남궁세가의 삼남이다. 위로 두 형이 있다.

“좋지요.”

남궁세가의 직계들을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그게…….”

남궁명이 망설이다 말했다.

“본가가 무가인데 유가의 예법을 따르네. 그러다 보니 격식을 좀 과하게 따지는 면이 있지. 너무 탓하지 말게나.”

“예?”

“말하자면 벽창호같이 굴 수도 있다는 거야.”

“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소가주 남궁악의 빈청으로 갔다.

남궁명과 무한이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일어나 맞아주었다.

둘 다 키가 훤칠하고 용모가 준수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말했다.

“남궁악일세. 막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검천부주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네.”

“남궁호라고 하네.”

남궁악은 유해 보였고, 덩치가 좀 있는 남궁호는 말수가 적었다.

“심무한입니다.”

서로간의 예가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남궁세가에 네 마리의 용이 있다고 했지.’

가주 남궁무룡의 별호가 창천검룡이다. 그의 세 아들 역시 별호에 용 자가 들어간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가주와 세 아들을 이르러 남궁사룡이라고 부른다.

남궁명은 좌측 상석에 무한을 앉히고 자신은 그 옆에 앉았다.

하인들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음식과 술을 각자의 상에 놓았다.

술과 음식은 의외로 소박했다. 고기를 꿰어 만든 산적과 채소 몇 접시가 다였다.

무한은 남궁명이 답답해도 참으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여느 무인들의 술자리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방 분위기만 해도 그랬다. 걸려 있는 족자나 병풍, 서가의 책이나 도자기까지 문인의 서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러니 서생 차림의 무한이 앉아 있는 게 어울리긴 했다.

무한이 잔에 술을 따라 들고 일어나 잔을 내밀었다.

“유서 깊은 무가, 남궁세가의 면면을 보니 과연 허명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이리 환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무한이 건배를 청하자 남궁악이 잔을 살짝 내밀었다가 소매로 가리고 마셨다.

‘정말 문가의 기풍이 강하구나.’

무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남궁악이 말했다.

“내일 마침 본가에서 휘주 후기지수 회합이 열린다네. 괜찮다면 참석했으면 하는데. 어떤가?”

“후기지수 회합이요?”

남궁악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말했다.

“요즈음 서현 일대에 아녀자를 욕보이고 다니는 놈이 있네. 그놈 때문에 휘주 무림 체면이 말이 아니지.”

남궁악이 탄식을 하였다.

“놈을 잡기 위해 휘주의 젊은 무인들이 모인 걸세.”

“무공이 뛰어난 자인 모양입니다.”

“게다가 아주 잔인한 놈이네. 힘없는 아녀자를 욕보이고 죽이기까지 했으니.”

“형님, 오늘은 좋은 자리이니 화제를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 술맛 떨어집니다.”

남궁명이 말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남궁악은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호인의 면모가 있었다.

반면 남궁호는 말없이 술과 음식을 먹을 뿐이다.

남궁악은 천하방 사정이 궁금한 듯 이것저것 물었고, 무한은 적당히 알려주었다.

저녁 자리가 길어지자 남궁명이 말했다.

“온종일 왔을 것이니 어서 쉬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내가 눈치가 없었군.”

그제야 남궁악이 자리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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