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고수치고는 정말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군.’
무한은 검마가 당황해하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건 그뿐입니다.”
천하방과 마천 간의 전투가 정점에 달할 때쯤 마천검가의 가주가 죽었다.
이후 마천은 사기가 꺾여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흥!”
검마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사람들은 검신을 천하제일인이라고 하지. 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적어도 마천 팔대마가 가주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할아버지 심양조를 무시하는데도 무한의 표정은 담담했다.
“전 가주를 죽이려면 적어도 천하사패 중 둘이 합공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 말에도 무한이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차만 마시자 검마가 말을 바꿨다.
“일대일이었다면 전 가주가 최소한 몸을 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가주의 딸 혁련향도 함께 있었다. 그녀 역시 절정의 극에 달한 고수였다.”
그제야 무한이 입을 열었다.
“천하사패 고수들의 행적을 알고 싶다는 건 그들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려는 거로군요. 마천검가의 가주는 마천 내부에 의해 희생된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뜻밖의 말에 검마가 흠칫 놀라 무한을 노려보았다.
어린놈이 상황을 파악하는 안목이 뛰어나다 못해 이제는 무섭게까지 느껴진다.
검마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을 한 셈이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 여유를 부렸지만 무한의 머릿속이 바삐 돌아갔다.
‘검마가 과거 마천검가 가주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다?’
검마는 배반자라는 오명까지 쓰며 마천을 떠나왔다.
그 이유가 마천검가 가주의 죽음 때문이라면?
‘단순히 지난 일을 밝히기 위해서만은 아닐 거야.’
무한은 마천에 내분이 일어나고 있다고 짐작했다.
검마가 한숨을 쉬었다.
“어린놈이 너무 영악하군. 지금 너를 죽이는 게 마천을 위해서 좋을 것 같기도 하구나.”
“밖에 제 호위가 들으면 서운해 할 겁니다.”
검마가 클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은원은 분명히 한다고 했다. 오늘은 좋은 뜻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네놈의 운명도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구나.”
“조실부모한 운명이 좋기야 하겠습니까.”
검마가 코웃음 쳤다.
“지금 네가 쥔 걸 생각하면 그리 말 못할 것이다. 밑바닥에 있는 놈들은 갖은 짓을 다하고도 여전히 밑바닥에서 죽지.”
무한이 의외라는 눈으로 검마를 보았다.
마천에서 지고한 신분을 지닌 원로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네놈이 뭘 알겠느냐? 네가 부모는 일찍 여의었다지만 천하방 놈들이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라며 얼마나 너를 떠받들며 살았을지 눈에 훤하다.”
무한이 마천 내부의 사정을 모르듯, 검마 역시 천하방 사정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검마가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형님과 나는 마천검가에서 방계 중 방계였다. 갖은 고생을 다해서 검가의 수뇌부에 들었고, 결국 형님이 가주의 위에 올랐지. 그런데 결국 얼마 가지 못해 형님이 죽었다.”
검마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형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그게 천하사패든…….”
검마가 말을 하다 말고 끊었다.
‘마천의 인물이든.’
무한은 그가 하지 않은 말의 뒷부분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거래를 하자고 하셨는데 제가 받을 수 있는 건 뭡니까?”
“네 아비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다.”
뜻밖의 말에 무한이 가만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멸마대주를 그만두고 서안으로 가다 마천의 고수 불망객을 만나 동귀어진했다.
검마는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이야기해주겠다는 뜻이다.
무한이 잠시 후 눈을 뜨고는 말했다.
“다른 걸 원합니다.”
검마가 흠칫, 놀랐다.
무한이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사실을 거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네 아비의 죽음에 얽힌 일이다. 그걸 마다한다고? 자식 된 도리를 마다하겠다는 것이냐?”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검마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아비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냐?”
“어떻게 하면 감숙을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
“노인장 때문에 고원의 맹약이 깨지고 멸마대는 감숙을 잃고 낭인처럼 떠도는 신세입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상관이 있으니 묻는 겁니다.”
검마가 눈을 감았다.
무한이 새삼 만만치 않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중이다.
잠시 후.
검마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소마와 타협을 하라는 것뿐이다. 네 아비가 했던 것처럼.”
“그가 타협을 하겠습니까?”
“할 것이다.”
검마가 단언하더니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타협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의외의 말에 무한이 검마를 보았다.
“역시 마천을 떠난 게 아니었군요.”
“마천검가는 마천을 수호하는 팔대가문이다. 어찌 가문을 버릴 수 있단 말이냐?”
“그럼 왜 소마에게 쫓기는 겁니까? 대체 마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네가 알 바 아니다. 다만 소마를 배척한다면 네게 오히려 손해가 될 것이다.”
“……?”
검마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한참 생각하더니 일어섰다.
“좋다. 서로 털어놓기 어려우니 거래는 취소하겠다. 네 말대로 시간이 가면 진실이 드러나겠지.”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다시 만나면 적이라고 물었나? 당연히 적이겠지. 내가 직접 신분패를 주었으니 한 번은 살려줄 것이다. 그러나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무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이번 인연을 생각하여 한 번은 양보하겠습니다.”
“흥!”
검마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진정 내 상대가 되려면 저놈들부터 치워야 할 것이다.”
검마가 바깥을 보며 말했다.
무흔과 검천사위, 귀영이 대기하고 있었다.
검마는 기막을 펼쳐 말이 퍼져나가는 걸 막았으나 무한 역시 내공이 순후하여 바깥의 동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저 호위들이 지금 당장 네 안위를 지켜주겠지. 하지만 네가 죽는 순간에는 네 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저들이 모두 죽은 뒤거나 저들이 없는 자리이거나…… 어찌됐든 네가 죽는 순간은 홀로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검마의 말에는 현기가 담겨 있었다.
마인도 지고한 경지에 이르면 깨치는 바가 있나보다.
‘아니면 탈마지경일까?’
마천은 정파와 무공 체계가 다르다. 탈마지경은 정파에서 말하는 현경에 해당된다.
“호위에 둘러싸여 지내면 지낼수록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네가 진정 강해지려면 죽음의 문턱을 세 번은 넘어야 할 것이다.”
검마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무한은 검마와의 대화를 곰곰 되짚었다.
마천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건 분명했다.
‘천하방이나 마천이나 힘이 너무 집중됐어. 그 힘이 충돌하는 거야.’
무한이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차를 마셨다.
검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홀로 적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이라…….’
***
귀영은 오산사걸을 종처럼 부렸다.
자신은 호위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무한의 옆에 착 달라붙어 다니며 궂은일은 다 오산사걸에게 시켰다.
오산사걸의 서열은 조대오, 석보, 주풍호, 주재호 순이었는데 주풍호와 주재호는 형제였다.
떠나는 날 아침 주씨 형제가 말 두 마리를 끌고 왔다.
“말을 구했습니다.”
“수고했다.”
귀영이 거만하게 고개만 까닥이고는 무한을 향해 말했다.
“타고 가실 말입니다.”
“내가 언제 말이 필요하다고 했나요?”
“하하. 제가 안전하게 방으로 돌아갈 묘수를 생각해두었습니다.”
귀영이 의기양양하여 말하려다 말고 오산사걸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는 저리 가 있어.”
오산사걸을 떨어뜨려놓고는 무한에게 다가와 나직이 말했다.
“제가 도천부에 수로로 간다고 말해두었잖습니까?”
“그랬죠. 이중첩자로 본분을 한 셈이죠.”
“그러니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로로 가는 겁니다.”
“설마 그걸 감안하지 않았을까요?”
“올 때 쌍두마차를 육로로 보내셨다고 했잖습니까? 출발할 때도 쌍두마차를 타고 가다 중간에 저 말로 바꿔 타는 겁니다.”
“적이 한 번 속지 같은 수에 두 번이나 속을까요?”
무한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귀영이 자기 허벅지를 탁, 쳤다.
“바로 그겁니다. 같은 수를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이용하는 거죠.”
“일리가 있긴 하네요.”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모두 모이라고 하세요.”
잠시 후 염량 등 검천사위가 들어오자 무흔까지 은신한 곳에서 내려왔다.
무한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혼자 갑니다.”
“예?”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지금은 올 때와 다릅니다. 앙심을 품은 천종해가 어찌 나올지 모릅니다.”
예상대로 모두가 반대했다.
무한이 정색을 하였다.
“저를 염려를 하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건 명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명을 내리는 거냐고요.”
귀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번에도 홀로 귀가하다가 화수전 자객들에게 죽다 살아났잖아요. 잊으셨습니까?”
“그래서입니다.”
무한이 말을 끊었다.
“여기 무흔 대협이나 염 대협 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싸웠을 것입니다. 그 많은 싸움을 모두 이기지는 못했겠지요.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강호 경험이 많은 무흔이나 검천사위는 무한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무한은 아직 경험이 미숙하다. 물가에서 노는 어린애를 보는 마음이다.
어려서부터 지켜본 무흔이나 검천부에 대한 충심이 깊은 검천사위로서는 무한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무인인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귀영만 몰랐다. 모두가 수긍하자 뭔가 있나 생각하다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아! 우리가 미끼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귀영의 말은 자신들이 도천부에 보고한 복귀 행로로 가고 무한은 돌아가겠다는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괜히 화를 자초할 이유는 없지요. 흩어져서 최대한 안전하게 가면 됩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예?”
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염량이 포권을 하였다.
“알겠습니다. 주군!”
염량은 뼛속까지 무인이었기에 무한의 뜻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염량이 그동안 부주라고 부르다 주군이라고 하자, 나머지 삼호위와 무흔이 흠칫 놀라 염량을 보았다.
부주와 주군은 의미에 있어 차이가 크다.
염량이 무한의 뜻을 받아들이자 나머지 삼위도 포권으로 받아들였다.
“주군, 뜻에 따르겠습니다.”
무흔이 말했다.
“그래도 귀영은 데려가십시오.”
“짐이 됩니다.”
무한의 말에 귀영이 펄쩍 뛰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간 충심으로 모셨는데 짐이라니요? 아, 이렇게 뒤통수 맞을 줄은 몰랐습니다.”
“말조심해라!”
무흔이 노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까지 벌게진 귀영이 침을 튀겨가며 항변했다.
“이건 아니죠. 주군이 아니라 황제라도 그렇지. 사람을 개무시하는 건데. 어떻게 참습니까.”
무한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말이 많으니 짐이 된다는 겁니다.”
귀영이 입을 딱 벌렸다.
“제가 말이 많다고요? 제가……?”
“따로 할 일도 있습니다.”
“예?”
“천종해가 있는 동이현으로 가서 오산사걸을 잘 심어 놓고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