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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86화 (86/250)

86화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목숨을 원하는 이는 천하방에 있습니다. 제 주적이 마천이겠습니까? 아니면 천하방 깊숙이 숨어 있는 암중의 적이겠습니까?”

무한의 말에 천소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천부주의 적이 천하방에 있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제 선친은 마천과 불가침 맹약을 맺었습니다. 명분을 중시하는 정파의 입장에서 보면 적과 협약을 맺은 셈이지요. 그래서 불만을 가진 세력도 있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이들은 아직까지 그 뜻을 포기하지 않고 있지요.”

천소향은 무산파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무림 사정에 대해서는 어두웠다. 그래서 무한의 말이 놀라웠다.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켜가며 전쟁을 치르고자 하는 이들을 뭐라 불러야 할까요?”

천소향이 흠칫하여 뭔가 말하려 했다.

그녀가 무산파에서 들었던 가르침은 탕마멸사였다.

그런데 무한이 가로막고 말을 이었다.

“마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남의 희생을 발판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 그게 마인이지요.”

“아!”

천소향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향낭을 건네겠습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상의했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 낭자의 신분은 소단주도 모르는 게 좋겠습니다.”

천소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무안을 보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비밀을 만들라는 뜻이니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무한이 정색하곤 말했다.

“천 단주는 재신으로 불리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마음먹었다면 어머니의 신분을 알아내지 못했을까요?”

천소향이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때로는 모르고 사는 게 좋은 일도 있습니다. 나중에 모든 일이 정리되면 그때 밝혀도 됩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몰라야 합니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천소향이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다음 날.

무한이 검천사위를 방으로 불렀다.

“서현에서의 일이 마무리 됐습니다.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죠.”

집까지 구해서 머물렀기에 정리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검천사위가 나가자.

스르륵.

무흔이 나타났다.

“천종해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천하상단에서 축출된 천종해는 동이현으로 가서 새로이 상단을 꾸리는 중이다.

“부주를 죽이려 한 자입니다. 반드시 응징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지금은 그냥 두세요.”

무흔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천평산이 단지 부자지간의 정 때문에 천종해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게 아닙니다.”

천평산은 냉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천하상단의 신망을 추락시킬 뻔한 천종해를 내쫓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사실 천종해는 도천부 사업을 챙겨 갔으니 크게 손해 본 셈도 아니다.

“천하상단에 들어간 도천부의 입김이 꽤 센 듯합니다.”

“도천부가 압력을 행사했다는 뜻입니까?”

“도천부로서는 아직 천종해가 쓸모 있겠지요.”

“그러니 더더욱 천종해를 죽여야 합니다. 도천부에 경고를 해야지요. 그게 무림의 방식입니다.”

무한이 물끄러미 무흔을 보았다.

“왠지 흑도의 방식 같군요.”

무흔이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흑백을 떠나 은원을 분명히 가리는 게 무인의 도리라는 뜻입니다.”

무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종해는 이제까지 승승장구해왔습니다. 그러다 처음으로 기세가 꺾였지요. 아마 그걸 수모로 여기고 무리하다 분명 또 사달을 낼 것입니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겠지요. 때가 올 겁니다.”

“오히려 후환을 키우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방비하면 됩니다. 천종해 정도의 수작에 당할 거면 일찌감치 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아야지요.”

무한이 농담조로 말하니 무흔은 답답했다.

하지만 무한은 모든 걸 말해줄 수 없었다.

‘암중의 적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천하상단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지.’

지금은 자중하고 인내해야 할 시기다.

귀영이 들어왔다.

“도천부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귀영은 여전히 이중첩자 노릇을 하는 중이다.

“뭐라던가요?”

“부주께서 곧 방으로 돌아갈 거라 했더니 귀환 경로를 파악해서 보고하라더군요.”

귀영이 무흔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도중에 뭔 일을 벌일 모양입니다.”

“장강수로를 이용할 거라고 전하세요.”

“예. 그리고 우리는 육로로 가는 거겠죠?”

“글쎄요. 그러면 이중첩자가 잘못된 보고를 했다고 고초를 겪지 않을까요?”

“헉!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귀영이 인상을 썼다.

고강후가 자신을 추궁할 게 분명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가둬 놓은 자들은 어찌하고 있나요?”

“광에 잘 두었습니다.”

현청 뇌옥에서 빼낸 오산사걸과 현청 외원 숙수를 말하는 것이다.

곽삼양은 천하상단으로 넘겼고, 나머지는 광에 가둬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숙수는 보지도 못했군요. 나를 독살하려던 자인데 얼굴이나 봐야겠네요.”

무한이 귀영과 함께 광으로 갔다.

숙수와 오산사걸은 따로 따로 갇혀 있었다.

“이 자가 숙수로군요. 독을 탄 일을 자백하던가요?”

무한이 살이 통통한 중년인을 보고 말했다.

그간 마음고생을 한 듯 통통한 볼살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숙수가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처자식을 빌미로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퍼억!

귀영이 시원하게 숙수의 뒤통수를 갈겼다.

“이 새끼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내가 다 조사해봤거든? 너 홀아비잖아.”

귀영이 윽박질렀다.

무한이 벌벌 떠는 숙수를 보고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자의 자백서를 받아 현청으로 넘기세요.”

무한은 다시 오산사걸이 갇힌 광으로 갔다.

“이들도 다시 현청으로 보내고요.”

그러자 오산사걸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개과천선하여 바른 사람이 되겠습니다.”

“뭘 믿고 너희를 놓아주란 말이냐? 조용히 가자.”

귀영이 허튼소리 말라고 윽박질렀다.

오산사걸 중 첫째 조대오가 말했다.

“잠시 유혹에 빠져 실수를 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주면 결초보은하겠습니다.”

“푼돈에 넘어가서 사람을 죽이려던 게 실수라고? 주둥아리가 찢기는 고통을 맛보고 싶은 게냐?”

“정말입니다. 저희는 그저 말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오산사걸은 초지일관 자신들은 그저 말을 전하러 왔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그냥 놔줄 수는 없지. 또다시 서현 바닥에서 양민을 괴롭힐 게 아니냐?”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서현을 떠나겠습니다.”

“그럼 다른 데 가서 또 사람을 죽이고 다니겠네?”

“그럴 일 없습니다. 저희는 그런 흑도가 아닙니다.”

오산사걸이 애원하자 귀영이 짐짓 탄식을 했다. 그러고는 무한에게 말했다.

“이렇게 애원하니 제가 사람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음?”

“조수가 좀 필요해서요.”

“흐음. 이제 사람까지 부리시겠다는 거군요.”

“이놈들을 현청으로 보내면 죽을 겁니다. 풀어주면 또 양민을 괴롭힐 거고요.”

“그럼 그냥 죽여 버리세요.”

“그게…… 때린 정도 있더라고요.”

귀영은 심심하면 광으로 와서 오산사걸을 쥐어 패고 못살게 굴었다.

“저들은 맞은 원한만 있을 텐데 부릴 수 있겠어요?”

오산사걸이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맞아도 쌉니다.”

“귀 대협께서 심하게 때리지 않았습니다.”

“거두어만 주시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일제히 이마를 땅에 쿵, 쿵 찧었다.

“흐음. 좋아. 내가 살려주지.”

귀영이 품에서 연고 같은 걸 꺼내더니 오산사걸의 목덜미에 발랐다.

“이게 말야. 천리추종향이라는 거다. 엄청 비싸게 주고 샀지. 너희가 도망치더라도 바로 찾을 수 있거든?”

“그럴 일 없습니다.”

“내 별호가 귀영이다. 귀신의 그림자라는 뜻이지. 죽은 귀신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지.”

“명심하겠습니다.”

오산사걸이 다시 충성을 맹세했다.

무한은 그 광경을 보고 내심 웃었다.

잠시 후 광에서 나오며 귀영에게 말했다.

“저들을 쓸 만한 곳이 있습니다.”

“예?”

“천종해가 동이현으로 가서 천해상단을 세운다고 하더군요. 저들을 보내 감시하게 하세요.”

“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이제 우리는 일심동체가 된 걸까요?”

무한이 다가오는 귀영의 이마를 밀어냈다.

“천해상단의 상황은 귀 호위가 알아서 보고 받으세요.”

수족이 생긴 귀영이 흐뭇해하였다.

***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공기가 싸늘해졌다.

서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무한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귀신처럼 서 있는 검마가 보였다.

스르륵!

천장에서 검을 든 무흔이 내려섰다.

“죄송합니다. 피하십시오.”

무흔은 검마가 나타나고서야 알아챘다. 이는 검마가 무흔보다 윗줄이라는 뜻이다.

“제법이군. 이제라도 알아채다니.”

검마가 무흔을 흘깃 보았다.

무흔이 검마에게 검을 겨눴다.

“괜찮을 겁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죠.”

검마가 가만 서 있자 무흔이 주저하다 방을 나갔다.

무한은 화로에 물주전자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 서로 볼일은 끝난 듯한데요.”

“나는 은원은 분명히 한다.”

“저와 원한이 있나요?”

“왜 켕기나?”

“없는 것 같은데 은원이라는 말을 들으니 이상하잖아요.”

“저놈의 주둥아리를…….”

검마가 인상을 쓰더니 품에서 목패를 꺼내 건넸다.

“나중에 마천검가와 문제가 생겼을 때 이걸 보여주면 어지간한 건 한 번은 양보할 것이다.”

목패는 검마의 신분패였다.

혁련검.

‘검마라더니 이름도 검이네.’

무한이 속으로 웃었다.

“이걸 왜 주시는 겁니까?”

“네가 소향을 설득했다고 들었다.”

“알아주니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두겠습니다. 차나 한잔하고 가시죠. 어느새 밤이 되니 은근히 춥습니다.”

검마가 다탁에 마주 앉았다.

무한은 주전자 물이 끓자 차를 냈다.

“부자들이 많이 살아 그런지 서현은 차 맛도 좋더군요.”

검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떠나실 모양이군요.”

검마는 먼 길을 떠날 차림이었다.

“다음에 뵈면 적인가요?”

무한이 차를 건넸다.

검마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물끄러미 보았다.

무한은 그가 신분패를 건네는 것 외에도 할 말이 있어서 왔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묻지 않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이윽고 검마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거래를 하자.”

무한이 검마를 주시했다.

“전대 마천검가의 가주가 죽을 당시 천하방의 전력 배치를 알고 싶다.”

“그건 이미 알려진 것 아닙니까?”

“무력대 말고 고수들, 특히 천하사패 수장들의 행적 말이다.”

“놀랍군요. 마천검가의 높으신 분이 제게 천하방의 기밀을 건네 달라니요. 제가 검천부주라는 사실을 잊은 겁니까?”

“천하방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글쎄요? 당시 전세가 역전된 계기가 마천검가 가주의 죽음 때문 아니었습니까?”

무한이 검마를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눈빛에 검마가 흠칫했다.

‘이놈이…… 어디까지 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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