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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83화 (83/250)

83화

잠시 후.

천평산이 입을 열었다.

“접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작은 인연이 있었다고 해두지. 지나간 일일세.”

“그 인연이 천 낭자와 상관있습니까?”

천평산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다시 말하지만 내 개인사네. 천하상단은 마천과 아무런 상관이 없네. 내가 자네에게 빚을 지기는 했지만 개인사까지 알려줄 생각은 없네. 차라리 다른 걸 원하게.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가능하네.”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무한이 백의영과 천소향의 혼인에 대해 재차 거론했다.

천평산이 한숨을 쉬었다.

“한때 혼담이 오가고 나중에는 암묵적으로 정혼을 하기는 했지.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인연 아닌가. 백가상단은 천하상단에 도전했다가 패했네. 그 과정에서 서로 간에 쌓인 앙금이 적지 않지. 자네도 내 나이만큼 살아보면 깨진 인연을 이어 붙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걸세.”

무한이 화제를 돌렸다.

“혹시 우곤충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그게 뭔가?”

천평산이 화과자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천 낭자 말이, 단주가 갑자기 식탐이 늘어 비대해지셨다더군요.”

“말하지 않았던가? 나이가 드니 먹는 게 낙이더라고. 이제 내 식탐까지 따지려는 건가?”

천평산이 어이없다는 듯 불쾌한 기색을 흘렸다.

“그게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면요?”

“그게 무슨 소린가? 내 의지가 아니라니.”

무한이 우곤충에 대해 설명했다.

천평산이 실소를 흘렸다.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겠군.

무한이 품에서 목갑을 꺼내 열었다.

목갑 안에는 수향초가 뿌리째 담겨 있었다.

“이걸 드시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천평산이 인상을 썼다.

그는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 그의 식탁에 오르는 모든 음식은 의원이 독의 유무를 가린다.

천평산이 무한을 가만 보다 손을 내밀었다.

“좋네. 이게 독초라고 해도 먹어보지.”

천평산이 큼지막한 손으로 수향초를 집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이 수향초를 구하기 위해 백 소단주가 백방으로 애를 썼습니다.”

무한이 일어났다.

“혹, 우곤충이 일시에 빠져나가면 기력이 허한 느낌이 들지 모릅니다. 양기를 보충하는 탕을 준비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걸세. 내 몸은 내가 잘 아네.”

천평산이 자신했다.

무한은 돌아오는 길에 천평산과의 대화를 되짚었다.

‘개인사라고 했지. 천 낭자를 거론할 때 불쾌해하고…….’

무한이 귀영에게 물었다.

“천 단주의 가정사도 조사했나요?”

“그럼요.”

귀영이 신나서 말했다.

“천평산은 세 번 혼인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인이 천이금과 천역금, 천가금을 낳았고 둘째 부인으로부터 천종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릴 때 두 부인이 역병으로 한꺼번에 죽고 말았지요. 그 후로 홀로 지내다 갑자기 혼인을 하여 천 낭자를 얻었다고 하죠.”

“그래서 생김새가 달랐군요.”

“부자들이 삼처사첩을 지니는 건 당연하죠. 제가 천 단주라면 백 명쯤 거느렸을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세 번째 부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세요.”

“예.”

귀영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부주께서도 혼인을 해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요?”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귀영은 나날이 수다가 늘어 이제는 말릴 수가 없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오늘 중으로 알아 오세요.”

“하루 만에 천 단주 가정사를 알아 오라고요? 아, 증말…….”

귀영이 투덜거리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한이 백가상단으로 가서 천소향을 찾았다.

“상세가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이에요.”

천소향은 면사를 쓰고 있었다.

“천 단주께 수향초를 전해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아버지께서 식탐이 생긴 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라고 하셨지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홀로 계신 외로움 때문에 식탐이 생겼다고 생각했지요.”

“어머님과 정이 깊으셨나 보군요.”

“어머니가 몸이 약해 아버지는 늘 걱정하셨지요.”

“지병이 있으셨나 봅니다?”

“…….”

천소향은 대답을 하지 않고 무한을 보았다.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심계가 깊다는 걸 진작 알고 있다.

괜히 묻는 게 아닐 것이다.

“무슨 뜻으로 어머니에 대해 묻는 건지요?”

묻는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의혹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한은 천소향의 생각을 눈치채고 사과했다.

“실은 알아볼 일이 있어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물어보셔도 대답해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돌려 물어보니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좋습니다. 실은 천 낭자를 치료해주신 노인 분과 천 낭자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예? 그분은 처음 보는 분입니다.”

“그분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천 낭자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멀리서 왔습니다. 아마도 천 낭자를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 노인은 천 낭자이기에 자신의 내상이 악화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치료한 겁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확실합니다.”

천소향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부주께서는 어머니와 그분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자신은 처음 봤으니 어머니와 관련이 있다는 정도는 천소향도 추측할 수 있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천소향이 망설이다 말했다.

“저도 가끔 궁금하기는 했죠. 어머니는 외가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큰 오라버니 외가는 상계에서 이름난 집안이고 둘째 오라버니의 모친은 큰오라버니 생모의 몸종이었어요. 모두 출신이 뚜렷했죠. 그런데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알고도 말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죠.”

“예?”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은 아시겠지요.”

천소향을 만나고 나니 막연했던 추측이 명확해진 느낌이었다.

귀영이 밤늦게 돌아와 고했다.

“세 번째 부인에 대해서 아는 이가 없습니다. 이십여 년 전에 천 단주가 어디선가 데려왔다더군요. 몸이 약해 천하상단 별채를 벗어나지 않았답니다.”

“어디서 데려왔다던가요?”

“글쎄요.”

“제대로 하는 게 없군요.”

“하아, 천 단주 개인사를…… 하루 만에 이 정도 알아낸 것만 해도 용한 겁니다. 저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좀 더 실력을 발휘해보라는 겁니다. 세 번째 부인의 출신성분을 알아 오세요.”

“지금 한밤중입니다.”

귀영이 한숨을 쉬었다.

“내일까지 알아보세요.”

다음 날 귀영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이 다 돼서야 돌아왔다.

입에서 술 냄새가 살짝 풍겼다.

“정보를 알아 오랬더니 이제까지 술 마신 겁니까?”

“정보를 수집하려면 술을 먹여야죠. 덕분에 알아냈습니다.”

귀영이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천 단주가 직접 간 마지막 상행에서 셋째 부인을 데려왔더군요. 그 상행은…….”

귀영이 뜸을 들였다.

잠시 말을 끊고 돈을 걷는 이야기꾼들이 흔히 하는 수법이다.

무한이 어이없어 하였다.

“아예 이야기꾼으로 나가지 그래요?”

“그것도 괜찮겠군요.”

귀영이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새외였답니다. 그때는 천하방과 마천이 한창 싸울 때였는데 천 단주가 간도 컸죠. 위험을 무릅쓴 상행을 성공시킨 덕분에 천하상단은 한층 더 세가 커졌다는군요.”

“……!”

무한이 머릿속 생각의 조각을 맞췄다.

며칠 후 천승무가 찾아왔다.

무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천승무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주께서 급히 뵙자고 하시네.”

“갑시다.”

무한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갔다.

천평산은 자신의 거실에서 무한을 맞았다.

“자네 말이 맞았네.”

천평산의 얼굴은 한껏 굳어 있었다.

“어떤 놈이 내게 수작을 부렸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적이 많지. 내가 죽기를 바라는 놈이 한둘이 아니야.”

“단주가 죽고 난 다음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굽니까?”

천평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한은 그가 이미 범인을 짐작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나머지는 천평산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자네에게 또 빚을 졌네.”

“백 소단주의 공이 컸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위험하셨을 겁니다.”

“의영이를 만나 보겠네.”

천평산의 말은 백의영과 천소향의 혼인을 재고해보겠다는 뜻이다.

“두 집안이 상권을 놓고 갈라섰다가 다시 화합하면 휘주 상계로서도 복일 겁니다.”

무한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서현에서의 일도 끝났으니 본방으로 돌아갈 겁니다. 나중에 또 뵐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

무한이 가려 하자 천평산이 말했다.

“왜 묻지 않는가?”

“뭘 말입니까?”

“자네의 호위가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더군.”

무한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귀영이 꼬리 잡힌 것이다.

한편으로 천평산의 정보력에 놀랐다. 귀영이 어제 정보를 캐고 다녔는데 오늘 아침 천평산이 그 말을 하다니.

“서현에는 나를 친구로 여기는 이가 많다네.”

“죄송합니다. 제게는 중요한 일이라 그랬습니다.”

천평산이 자리에 앉았다.

며칠 사이에 기력이 쇠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곤충이 빠져나간 후유증이다.

“당분간 보식을 하셔야 할 겁니다.”

무한의 말에 천평산이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자네가 내 아들의 목숨을 붙여준 것은 사실 무게를 달 수 없는 일이지…….”

천평산이 무한을 주시했다.

기력은 쇠했지만 두터운 눈꺼풀 아래 감춘 눈빛은 깊었다.

“무슨 일로 소향의 어미에 대해 조사하는지 모르지만 사실대로 말해주지. 그걸로 우리 빚은 청산하는 게 어떻겠는가?”

“좋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조하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게 들은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무한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어쩌면 복잡한 일이 얽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주나 천하상단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천평산이 무한을 노려보다 탄식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한 것보다 신뢰가 가는군.”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난 이야기를 하려니 눈에 아득한 빛이 어렸다.

“중원과 마천이 한창 싸울 때 큰 거래가 있어 직접 새외를 다녀왔네. 오다가 소향의 어미를 만났지.”

천평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소향의 어미를 구해서 데려왔네. 목숨은 구했으나 무공을 잃었지. 하지만 출신에 대해서는 내게도 말하지 않았네. 다만…….”

천평산이 말하다 말고 주저했다.

“마천도가 아닐까 추정하시는군요.”

천평산이 한숨을 쉬었다.

“재주가 너무 앞서면 좋지 않네. 자네는 지나치게 영민해. 앞으로 많은 적을 상대할 텐데, 하고 싶은 말의 삼 할은 자제하는 게 좋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서현을 떠날 생각인가?”

“일을 마쳤으니 며칠 안으로 정리하고 귀방 해야지요.”

“떠나기 전에 들러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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