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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80화 (80/250)

80화

“마도는 그 끝을 베어낸다. 그리고 다음 끝을 만나고, 그러면 다시 주저하지 않고 베어낸다.”

깨달음으로 벽을 넘는 정도와 말리 마도는 힘으로 부순다.

“그 역시 끝없는 길 아닙니까?”

“허나 매듭을 지을 수는 있지.”

무한과 검마의 대화는 무척이나 심오했다.

“네 마음이 검을 이루면 기가 따라가게 마련이다.”

“심기쌍수!”

“그럴듯한 말은 필요 없다. 오로지 네 마음이 원하면 기는 따라온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불현듯 소마의 마왕검벽이 떠올랐다. 그 역시 일종의 무형검이 아닐까?

“진정한 무인은 검으로 베지 않는다. 마음으로 상대를 베고 검은 그를 따를 뿐이다.”

검마의 말이 이어지자 무한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마천도들은 싸우기 전에 마음으로 상대를 죽이겠군요.”

검마가 무한을 봤다.

마천의 무공이 의념을 중시한다는 걸 바로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무공에 살기가 넘치는 게 아닙니까?”

“죽이지 않을 것이라면 애초에 검을 들 필요도 없지.”

“하지만 그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살기에 취할 수도 있겠군요.”

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검마가 머무는 죽림 별원에 당도했다.

“무형검을 띄운다면 일갑자 내공을 인정하마.”

“좋습니다.”

무한이 돌아섰다.

검마와의 대화에서 뭔가 얻은 바가 있었다.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수련에 들어가고 싶었다.

무한이 다시 백의영을 찾았다.

“조용한 곳이 있습니까?”

백의영은 검마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했으나 무한의 표정을 보고는 더 묻지 않고 후원의 외딴 거처를 내주었다.

무한이 침상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묵상에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밤이 되고 새벽이 밝아올 무렵, 지나는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무한의 평정심이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깨졌다.

순간, 느끼는 바가 있었다.

‘마음이라고?’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거기에 갔다.

고벽후의 완월도법이 떠올랐다.

비무를 할 때 그는 완벽한 달을 그려냈다.

‘소마는 검벽을, 고 대형은 달을 그려냈다. 검벽이나 달이나 무형검이나 마찬가지다. 무인의 의념이 기로 표현된 것이다!’

순간 무한의 머리 위로 무형검이 쑥 솟아올랐다.

‘아!’

무한이 내심 기뻐하는 순간 무형검이 깨졌다.

그러나 이미 무한은 무형검의 길에 들어섰다.

아니, 모든 검이 무형검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쉽게 되다니?’

사실 쉬운 게 아니다.

무한이 천기조양환을 통해 일갑자가 넘는 내공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한은 이미 경지에 이르렀으나 홀로 무공을 익혀왔기에 다양하게 변용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기에 명사의 가르침이 절실한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검마에게 적절한 조언을 받으니 바로 이룰 수가 있었다.

‘심의삼재검이나 경천십이식이나 결국은 하나의 끝을 위한 거야. 끝을 베어내야 다음 끝이 보이는 거라고.’

끝을 베어낸다는 검마의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졌으나 잡히지 않는 연기처럼 아른거릴 뿐이다.

무한은 다시 하루 온종일 묵상에 들어갔다.

경천승운공을 운기하며 묵상을 하였기에 머무는 거처 주위로 두터운 기운이 흘렀다.

백의영은 무한이 뭘 하는지 궁금했지만, 무인으로서 중요한 고비라는 걸 눈치채고 사람을 시켜 외인의 접근을 막았다.

무한은 사흘이 지나서야 거처에서 나왔다.

눈빛이 한층 깊어지고 얼굴이 맑았다.

무슨 기연을 얻었는지 며칠을 씻지 않았는데도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향기까지 흘러나왔다.

무한이 거처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백의영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 노인 분이 심 부주께 해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런 듯합니다.”

“아…….”

백의영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십니까?”

“향아는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녀의 목숨이 심 부주께 달려 있는데 제가 뭔들 못하겠습니까? 향아를 살려주십시오.”

“이러지 마세요.”

무한이 백의영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소단주의 일은 제 일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백의영이 감격했다.

“오후에 치료를 하기로 하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한이 백의영에게 이르고는 검마에게 갔다.

검마는 여전히 운기요상 중이었다.

“무형검을 띄웠습니다.”

검마가 흠칫, 놀랐다.

무한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무형검이 쑥, 솟았다.

작고 흐릿하기는 하지만 분명 무형검의 기운이었다.

검마의 표정이 무척 복잡해졌다.

깨달음의 단초를 알려주었으나 이렇게 빨리 달성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학의 천재라는 소마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형검을 띄웠으니 무한에게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음이 증명됐다.

검마는 괴물이라도 보듯 한참 쳐다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인정하마.”

“그럼 천 낭자의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 운기법을 알려주시죠.”

“끄응…….”

마천 최대의 적인 검천부주에게 자신의 비공(秘功)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 마뜩잖았다.

하지만 천소향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검마가 운기법을 알려주고 세 번 네 번 반복하도록 시켰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무한을 따라나서려 했다.

무한이 검마를 빤히 바라보다 제지했다.

“그냥 여기 계시죠? 치료하는데 옆에 있으면 제가 불편할 것 같은데요?”

“무슨 변수가 있을지 어찌 알고. 내가 곁에 있어야 바로 대처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죠. 저는 아직 노인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운기요상 중에 기습이라도 하면 꼼짝없이 당하는 거 아닙니까.”

검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그런 치졸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단 말이냐?”

“우리가 몇 번이나 봤다고 서로 안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끄응.”

무한과는 말로 해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검마다. 눈알을 굴리다 말했다.

“좋다. 그놈을 데려와라.”

“그놈이라뇨?”

“네 의형이라는 놈 있지 않느냐?”

“고 대형은 왜요?”

“그놈을 내 뒤에 세우면 될 게 아니냐? 내가 널 공격하면 그놈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하면 너도 믿을 게 아니냐?”

“그렇게 하죠.”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곰곰 생각했다.

‘천 낭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검마는 천소향을 각별하게 챙기고 있었다.

무한은 그의 목적이 천하상단이 아니라 천소향이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를 배척하는 시늉을 했다.

평소라면 검마도 무한의 의중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검마는 천소향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였다.

‘검마도 사람이구나. 조바심에 속내를 보이다니.’

무한이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보기 좋군요.”

“또 뭔 소리를 하려는 거냐?”

검마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마음이 보기 좋지 않습니까?”

“이 자식이…….”

검마는 그제야 무한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애송이에게 번번이 당하니 기가 찼다.

“주둥이 닥쳐라.”

검마가 화를 냈다.

무한이 씨익, 웃으며 검마의 거처를 나와서 곧장 고벽후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

고벽후와 멸마대 형제들이 모여 있었다.

무한이 사정을 설명하니 고벽후가 의아해하였다.

“검마가 정말 천 낭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섰단 말이냐?”

“제게 운기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르겠군. 혹시 딴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고 대형께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허튼 수작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날려버리마.”

***

오후가 되자 검마가 천소향의 거처로 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한과 백의영이 맞았다.

검마가 묵묵히 방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흘깃 살폈다.

연추산 등이 천소향 거처의 밖을 지키고 고벽후가 따라 들어왔다.

“흥!”

검마가 고벽후를 보고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검마가 천소향의 상세를 다시 한 번 살피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지독한 암경이구나. 심포가 예상보다 빠르게 굳어가고 있다. 어서 대법을 준비해라.”

백의영이 천소향을 부축하여 앉혔다.

무한이 천소향의 등 뒤에서 양손을 뻗어 명문혈과 영대혈에 대었다.

무한의 오른손에서 기운이 쏟아져 나와 천소향의 명문혈을 통해 단전으로 들어갔다.

검마는 무한의 일 장 뒤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며 운기요상을 지도했고, 고벽후는 바로 뒤에 섰다.

“천 낭자, 단전으로 기운을 받아 갈무리하게.”

검마가 말했다.

“애송이는 왼손으로 영대혈을 통해 중단전을 깨워라.”

무한의 왼손에서 기운이 뻗어 나와 영대혈을 통해 옥당까지 쭉 들어갔다.

“큭!”

천소향의 신음성을 터뜨렸다.

검마가 황급히 주의를 주었다.

“천 낭자, 입을 벌리면 안 되네.”

천소향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검마가 전음으로 중얼거렸다.

- 음양의 기운이 번복하여 태극을 이루니…….

무한은 이미 들은 구결이었으나 검마의 목소리를 따라 운기를 하였다.

음양의 기운이 암경을 이끌어 천소향의 양발 용천으로 끌어내렸다.

“으으…….”

천소향이 꾹 다문 입술을 비집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암경이 경맥을 흐르니 차디찬 얼음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암경을 깨우자 천소향의 몸은 얼음장처럼 굳었다.

천소향의 앞에서 양팔을 붙잡고서 부축하고 있는 백의영도 음유한 한기에 몸서리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한과 천소향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었다.

‘아!’

무한은 자신의 내력이 한계에 달했음을 깨달았다.

일갑자가 넘는 내공을 쏟아부었는데도 천소향의 심포에 퍼진 암경은 아직 남아 있었다.

돌연 검마가 손을 뻗었다.

고벽후가 화들짝 놀라 도를 검마의 목에 대었다.

“수작 부리지 마시오.”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냐?”

검마가 아랑곳하지 않고 기운을 쏟았다.

두 줄기 음양의 기운이 무한의 명문혈을 통해 들어갔다가 천소향의 몸으로 쏟아졌다.

검마까지 나선 뒤에도 한 시진이 지나서야 천소향의 몸에서 암경이 모두 빠져나갔다.

“어서 손을 거두시오.”

고벽후는 천소향이 치유됐는데도 검마가 무한에게 계속해서 기운을 흘리는 걸 보고 도를 목에 대었다.

검마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의심도 많군.”

그는 기운을 회수하면서 무한의 단전을 한번 염탐했다.

이미 들어와 있는 기운이라 무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왠지 안방이 털린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건 중간에 내력이 모자라 자칫 위험했는데 검마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다.

검마는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자신의 내공을 소진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무한과 천소향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무한이 진심을 담아 깍듯하게 포권을 하였다.

검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쿨럭, 기침을 하였다.

재빨리 소매로 가렸으나 무한은 그의 입가에 비친 선혈을 보았다.

“다 끝났으니 나는 가보겠다.”

검마가 헛기침을 하고 방을 나갔다.

끝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게 눈에 선했다.

‘천소향과 무슨 관계일까?’

무한이 시선이 잠든 천소향에게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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