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운남 밀림에 수향초라는 풀이 있다더군요. 짐승들은 우곤충이 몸에 들어오면 수향초를 뜯어먹는답니다. 그러면 우곤충이 절로 몸에서 빠져나간다더군요.”
“천 단주도 이 사실을 압니까?”
백의영이 묻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치 않으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 낭자께 물어본 겁니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폭식을 하였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군요.”
“우곤충이 몸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장기에 붙어 일체화되어 있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 수향초를 복용해야만 알 수 있다는 거로군요.”
무한의 시선이 백의영에게 향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위라면 어여삐 여기지 않을까 싶은데요.”
백의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챈 것이다.
“당장 운남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서둘러야 할 겁니다. 제가 보니 천 단주는 이제 막바지에 이른 것 같더군요.”
천소향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다. 게다가 아버지가 없다면…… 이복 오라비들이 어떻게 나올까?
“식탐을 억제할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그건 모르겠군요.”
“당장 아버지께 알려야겠어요.”
“아마 본인도 믿지 않을 겁니다. 운남에 간 적도 없으니 말이죠.”
“그렇군요. 우곤충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마도 맞을 겁니다. 우곤충의 알을 음식에 뿌려 먹게 만든다면 가능한 일이죠.”
“그럼 누가 일부러!”
백의영과 천소향이 서로를 보았다.
무한의 말에 담긴 함의를 깨달은 것이다.
“돈이란 게 그리 무서운 거죠.”
무한이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천소향을 유심히 보았다.
‘어째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닌 것 같네.’
무한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천하상단으로부터 사업을 받아 백가상단에 넘기는 과정에서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천종해는 용서할 수 없지만, 그 하나로 끝낼 생각이다. 그 외에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
천소향의 미간에 검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암경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검상이 워낙 커서 운기도 조심해야 한답니다. 일단 약으로 암경이 퍼지는 걸 막고 상처가 어느 정도 붙으면 내공으로 몰아내야 한다더군요.”
백의영이 대신 대답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약으로 누른다 해도 암경이 꽤 퍼질 겁니다. 그러면 천 낭자의 내공으로 몰아내는 데만 몇 년은 걸릴 겁니다. 후유증도 크고요.”
백의영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어렸다. 그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런 내상에 대해 잘 알 만한 사람이 있는 것 같군요.”
무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의 뇌리에 누군가 밥값을 치러야 할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무슨 일이냐?”
침소에서 나온 백발노인, 검마는 귀찮은 표정이었다.
무한이 빙긋, 웃었다.
“내기를 했으니 설득하는 시늉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용없는 짓이다.”
“실은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사람 하나 살리시죠?”
“나는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이다.”
“잘 압니다. 그러니 보자마자 저를 죽이려 했겠지요. 이번 기회에 사람 살려보는 경험을 해보시라는 겁니다.”
뻔뻔한 무한의 말에 검마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살릴 사람이 천하상단주의 딸입니다.”
“……!”
무한의 천목투심술은 검마의 눈에 스치는 놀람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천하상단과 관련이 있었어!’
무한은 검마가 서현까지 달려온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휘주에서 무림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남궁세가와 황산파 등이 있다.
이들이 마천과 원수지간이기는 하지만, 검마가 달려와 복수를 할 정도일까?
정말 원한이 있다면 진작 왔었을 것이고, 내상까지 입은 지금 구태여 원수를 찾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상계가 아닐까 추측했다.
‘굳이 서현까지 왔단 말이지.’
그리고 서현에서 가장 큰 상단이 천하상단이다.
‘마천과 천하상단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대개의 상단은 거래를 함에 있어 정사마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천하상단 만큼은 정도 문파들과만 거래를 해왔다. 그 대가로 천하라는 이름을 쓸 수 있었다.
그러니 검마와 접점이 있을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그런데 방금 검마는 확실히 관심을 보였다.
“천하상단주의 딸이라고?”
“가슴에 칼을 맞았습니다. 문제는 암경입니다.”
“암경…….”
“자상이 워낙 심해 내상은 손도 보지 못하고 있지요.”
“가보자.”
검마가 바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무한이 검마를 데리고 돌아오자 백의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이분이라면 어찌해야 할지 알려주실 겁니다.”
검마는 백의영은 쳐다보지도 않고 천소향을 주시했다.
천소향은 그새 잠이 들어 있었다.
검마가 조용히 천소향에게 다가갔다.
백의영이 제지하려 했는데 무한이 소매를 잡아끌었다.
“잠시 지켜보시죠.”
검마는 천소향 앞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는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한줄기 의식을 남겨 무한을 경계했다.
“호위를 설 테니 환자에게나 집중하시죠.”
“천장에 있는 놈이나 물려라.”
검마는 무흔의 은신까지 눈치채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호위죠. 가장 안전하신 겁니다.”
“흥!”
검마가 코웃음을 치고는 양팔을 내밀었다. 천소향의 전신에 흐르는 기를 감지하려는 듯했다.
잠시 후.
검마가 눈을 뜨고 일어났다.
“이대로 방치하면 암경이 심포를 점하고, 그러면 후유증이 커서 사십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깜짝 놀란 백의영이 어쩔 줄 몰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칼을 맞은 부위가 가슴이라 더욱 빨리 도질 것이다.”
“아…….”
백의영이 안절부절못하자 무한이 나섰다.
“증세를 파악했으니 해결 방안도 있으시겠군요.”
검마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이 집에서 편히 머무시고 계시잖습니까? 밥값은 해야죠.”
“여기로 데려온 건 너다.”
검마는 퉁명스레 대답하고서 천소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한숨을 쉬고는 말없이 방을 나섰다.
백의영이 따라가려 하자 무한이 말렸다.
“소단주는 여기 계시죠. 제가 가서 알아 올게요.”
검마는 말없이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무한이 옆에 붙어 걸으며 물었다.
“치료할 방법은 있는데 하실 수가 없는 거죠?”
무공 고수가 내상을 치료하는 방법은 내공을 써서 상대의 경맥을 뚫어가며 기운을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검마는 내상을 입은 처지다.
검마가 멈춰 서더니 무한을 노려보았다.
“너는 어째 하는 말마다 주둥이를 때리고 싶게 만드는 거냐? 그것도 재주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검마는…… 놀려 먹는 재미가 있다.
“또!”
검마가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치료하기가 그리 까다롭습니까?”
“암경이 심포에 침입했으니 쉽지는 않지.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치료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치료할 사람이 없다고요?”
“암경을 내공으로 몰아내야 하는데, 적어도 내공이 일갑자는 넘는 고수가 있어야 한다. 지금 그런 고수를 어디서 데려온다는 말이냐?”
“일갑자의 내공이 있는 고수가 있다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뜻이군요.”
무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있습니다.”
“있다 해도 선뜻 나설까? 내력을 다 소진하면 적어도 사나흘은 내리 운기조식 해야 하는데 어떤 놈이 그 짓을 하겠냐?”
“저요.”
“뭐?”
“제가 좀 운이 좋아 기연을 얻었죠. 내공이 얼추 일갑자는 될 겁니다.”
검마가 무한을 노려봤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흥! 네 나이에 일갑자 내공이라고? 천하제일인이라는 심양조도 그렇지는 못했다.”
“제가 그 천하제일인의 손자 아닙니까.”
“정말이냐? 손목을 줘봐라.”
검마가 손을 내밀자 무한이 손을 뒤로 감췄다.
“누가 그러더군요. 손목을 함부로 내주는 게 아니라고요. 게다가 마인에게 손목을 내주라니. 말이 됩니까?”
“뭐?”
“잊으셨나 본데 우리는 한 달 후에 겨룰 사이입니다. 적에게 손목을 내줄 수는 없지요.”
“허허…….”
검마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순간 손이 사라졌고 무한이 허리를 숙이고 옆으로 돌았다.
무한의 머리통을 갈기려던 검마의 주먹이 허공을 쳤다.
“어린 후배를 기습하다니. 체면을 지키시죠.”
검마가 허공을 친 손을 뒤로 하여 뒷짐을 졌다.
무한이 하도 얄밉게 굴어서 자기도 모르게 머리통을 갈기려 했는데 실패하니 민망했던 것이다.
‘가만? 내 주먹을 피했다고?’
검마는 지난날 감숙에서 무한이 자신의 검을 막았던 게 생각났다.
‘정말 일갑자의 내공이 있단 말인가?’
검마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일갑자는커녕 내공을 익힌 듯 보이지 않는다.
검마가 기운을 끌어 감지해봤지만 대략 십 년에서 많아봐야 이십 년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감지 못 할 내공이 있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말이 일갑자이지 무인이 육십 년을 꼬박 하루 두 시진 이상 운기조식을 해야 쌓을 수 있는 내공이다.
영약과 기인의 도움을 얻으면 이를 단축할 수 있긴 하지만 무한의 나이에 일갑자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무시할 수도 없었다. 고작 십 년의 내공으로 자신의 검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무한을 보는 검마의 표정이 오락가락했다.
“제게 방법을 알려주시면 천 낭자를 치료해보겠습니다.”
“안 된다. 실패하면 천 낭자가 죽는다.”
무한이 약간 놀라 검마를 봤다.
검마가 다른 사람의 안위를 생각하다니 의외였다.
“그냥 둬도 죽는다면서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검마는 자신이 한시라도 빨리 내상을 회복하여 치료를 하면 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검마의 내상은 치료 시기를 놓쳐 고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무한과 약속한 한 달 동안 꼬박 운기요상을 한다 해도 완전히 회복할지 의문이다.
검마가 곰곰 생각하다 무한에게 말했다.
“네게 일갑자의 내공이 있다는 걸 증명해봐라.”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내상 입은 분과 겨뤄볼 수도 없고.”
검마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검천부주라면 심양조의 경천십이식을 익혔을 게 아니냐?”
“당연하죠.”
“무형검을 띄워봐라.”
“……?”
“과거 심양조가 천마와 싸울 때 백팔무형검을 띄웠다고 들었다.”
“……!”
“네가 한 자루라도 띄우면 인정해주겠다.”
무한이 속으로 되뇌었다.
‘할아버지가 무형검을 띄웠다고? 그것도 백팔검이나?’
“천마가 물러난 것도 결국은 백팔무형검을 파훼할 수가 없어서였지. 네가 심양조의 손자라면 경천십이식을 익혔을 터. 일갑자의 내공이라면 무형검을 한 자루 이상 띄울 수 있어야 한다.”
무한은 자신이 무형검을 띄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명검을 쥐어줘도 제대로 쓰지를 못하면 백정이나 다를 바 없지.”
“경천십이식은 검식이라고요. 무형검을 띄우는 초식은 없어요.”
검마가 비웃었다.
“검이든 도든, 아니면 권이든, 모든 무공은 한 곳으로 흐른다.”
‘만류귀종.’
“그곳이 어디인지는 생각해봤냐?”
“으음…….”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가다보면 궁극에 닿을 것이라고 여겼다.
만류귀종의 끝은 알지도 못하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게 해서 언제 극의에 이른단 말이냐?”
“궁극은 끝이 없으니 이를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너희 정파는 그게 문제란 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마음으로 끝을 관조하면 다다를 수 있다.”
“마음으로 끝을 관조한다?”
정도와 마도의 차이다.
묵묵히 수련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벽에 닿는 정와 달리 마도는 의식으로 벽을 형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