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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78화 (78/250)

78화

무한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천소향 낭자가 생사지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을 오락가락하는데 백 공자의 정신이 남아나겠습니까?”

천평산이 벌떡 일어났다.

하인 둘이 양옆에서 달라붙어 부축하려 했다. 천평산이 팔을 저어 하인들을 물렸다.

“향아가 생사지경을 헤매다니? 그게 뭔 소리냐!”

천평산은 백가상단과의 혼담이 깨지자 딸을 무산파로 보냈다. 무공을 익히며 마음을 추스르라는 뜻이었다.

“무산에 있어야 할 아이가 왜?”

“단주의 거처는 언덕 위에 있어 천하상단 곳곳을 내려다볼 수 있더군요. 하지만 아랫사람이 보고하지 않으면 소식을 들을 수는 없을 겁니다.”

“……!”

천평산이 비틀거렸다.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자세하게 말해주게.”

“집안일이야 제가 말씀드릴 사안은 아닌 듯합니다. 저는 다만 두 사람이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정이 깊으니 깨진 혼담을 이어보고자 하는 뜻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천평산은 무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업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도리도 중요하지요.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천하상단에서 말아먹은 검천부 사업에 대한 대가로 신중히 고려 해보셨으면 합니다.”

천평산의 두터운 낯가죽이 실로 오묘하게 움직였다. 눈꺼풀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볼은 실룩거렸다.

천하의 재신을 앞에 두고…… 사업을 말아먹었다고 하다니.

기가 막혔다.

더구나 무한은 무슨 상황인지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았다.

무한의 말은, 알고 싶으면 네가 알아봐라, 이익 따지다 딸 인생 망치지 마라, 천하상단에서 검천부 사업을 말아먹은 대가를 치러라, 대충 그런 뜻이었다.

나이 어린 무한에게 힐난조의 말을 들으니 천평산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천소향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대총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천승무가 들어왔다.

“지금 당장 소향이 어딨는지 알아봐라.”

“굳이 알아볼 것 없습니다. 백가상단에 있으니까요. 다만 상세가 위중해서 움직이기 어려울 겁니다. 가슴에 칼을 맞았거든요.”

무한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마지막 말은 천평산의 가슴을 후벼팠다.

나이 들어 얻은 늦둥이 딸이다. 백가와 혼담이 깨져 실의에 차 있는 딸을 위해 막대한 은자와 함께 무산파에 보냈다.

그런데 왜 칼을 맞고 백가상단에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데려와라. 어떤 놈이 그랬는지 조사해라!”

재신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무한은 바로 일처리를 하는 재신을 유심히 보았다.

“또 뭐냐?”

천평산이 눈을 부릅떴다.

두터운 눈꺼풀 사이로 강렬한 빛이 흘러나왔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건만 사람을 위압하는 기운이 실려 있었다.

‘역시 재신이라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구나.’

무한이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직이 말했다.

“천 낭자에게 천하상단은 안전한 곳이 아닐 것 같습니다만.”

“……?”

“진실을 알면 괴로울 테니 그냥 덮어두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

무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천평산이 아니다.

심지어 천승무도 알아들었다.

“심 부주!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천하상단에 내분을 일으킬 셈이오?”

“천하상단과 결별하면 서로 무관한 사이인데 굳이 내분을 일으킬 이유가 없지요.”

무한이 일어나 문 쪽으로 가더니 손짓했다.

“돌려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천하상단 사람이라는데 알아보실지 모르겠군요.”

귀영이 마차에서 곽삼양을 끌고 왔다.

곽삼양은 그간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피골이 상접하고 차림이 남루했다.

천평산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천승무는 곽삼양을 알고 있었다.

“곽 집사, 자네…… 왜 이 모양이 됐나?”

“서현 현승이 이자를 처형하려고 하기에 몰래 빼내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현승이? 곽 집사,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말해보게.”

곽삼양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천평산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람을 죽이려 했더군요.”

무한이 남의 일처럼 의뭉스럽게 말하자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귀영이 속으로 웃었다.

‘조곤조곤한 말로 사람 말려 죽이는 신공은 정말 기가 막힌단 말이야.’

무한의 말에 천승무가 놀라 되물었다.

“이 사람이 누굴 죽인단 말인가?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사람이네.”

“사람 죽이는 데 꼭 힘을 쓸 필요는 없지요. 돈이 있으면 대신할 사람이 천지에 널려 있지 않습니까.”

“지금…….”

“그만!”

천승무가 언성을 높이자 천평산이 가로막았다.

“그만하게!”

천평산은 무한이 모든 걸 준비해왔음을 알았다.

상대가 뭘 더 준비했는지 모르는데 말려들 수는 없었다.

“천하상단 사람이라니 우리가 알아서 하겠네. 피곤하군.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겠나?”

“그러죠.”

무한이 일어나 나가려다 말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멈춰 서서 말했다.

“저 사람이 누굴 죽이려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천평산이 눈을 부릅뜨고 곽삼양을 보며 말했다.

“자네겠지.”

“재신의 면을 보아 힘으로 보복하지 않는 걸 누군가는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

무한이 획, 돌아서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만 리를 내다보면 뭣하나, 발이 물에 젖는 걸 모르는데…….”

천승무는 기가 막힌 얼굴로 곽삼양과 무한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천평산이 두 눈을 감았다.

무한이 자신을 조롱한 걸 모르지 않는다.

다만 왜 이러는지가 궁금했다.

천하상단에 맡긴 사업을 되찾으려면 공손하게 나왔어야 한다.

천하에서 재신을 적으로 돌리고자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데 무한은 한껏 조롱하고 면박을 주고 가버렸다.

분명 자신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천평산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승무야.”

천평산이 자신을 대총관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자 천승무의 가슴이 내심 떨렸다.

“너는 알고 있었느냐?”

재신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

천하상단을 나온 무한은 백가상단으로 갔다.

“소단주께서는 안채에 계십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아니, 제가 안채로 가지요.”

무한의 말에 집사가 안채로 안내했다.

안채 시녀가 무한을 맞아 거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지금 아가씨께서 약을 드시는 시간입니다.”

백의영이 직접 약을 먹이는 모양이다.

잠시 후 백의영이 방에서 나왔다. 여전히 침울한 얼굴이다.

“가신 일은 잘 됐습니까?”

“곧 마무리될 겁니다. 그보다…….”

무한이 천소향이 묵고 있는 방을 보았다.

“잠시 천 낭자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

백의영이 의아해하였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소향에게 말입니까?”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 무한을 바라보던 백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말해보지요.”

백의영이 천소향의 침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안을 가리켰다.

“들어오시지요.”

천소향은 침상에 비스듬히 앉아 물끄러미 앞만 보고 있었다. 앉아 있는 것도 힘든 듯 보였다.

무한이 천소향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이렇게 또 뵙는군요.”

천소향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휘주로 오는 배에서부터 마주친 사람이 무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한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아버님이 원래 비대하셨습니까?”

천소향은 갑자기 아버지에 대해 묻는 무한의 의중을 몰라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부쩍 살이 붙으셨지요.”

“음식을 탐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런 편이세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먹는 게 낙이셨지요.”

“술은 드시지 않는 듯하더군요.”

“술에 취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묻는 건가요?”

천소향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되물었다.

“방금 아버님을 뵙고 왔습니다.”

“예?”

천소향이 당황했다.

무산파를 빠져나와 서현으로 온 걸 아버지는 모른다. 천소향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말했나요?”

“딸이 생사지경을 헤매는데 아버지가 모르면 되나요?”

천소향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백의영이 황급히 다가와 말렸다.

“향아, 누워 있어.”

“왜 쓸데없는 말을…….”

천소향은 말하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 부주가 아니더라도 내가 말했을 것이야. 진정하고 누워 있어.”

백의영이 천소향을 달랬다.

“혹 식탐을 자제하지 못하던가요?”

천소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 단주의 목숨과 관련한 일입니다.”

천소향과 백의영이 놀라 눈을 치떴다. 말문이 막힌 천소향을 대신하여 백의영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천 단주께서 병이라도 걸렸단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 천 단주는 의지가 무척 굳은 분입니다. 그러니까 당대에 천하상단을 키워 재신의 반열에 올랐겠지요.”

“그래요. 아버지 같은 분은 없지요.”

천소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녀만큼 아버지를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딸을 애지중지하면서도 사업 때문에 백가상단과의 혼담을 파기한 냉혈한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지만.

“그런 분이 식탐을 자제하지 못한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백의영과 천소향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무한을 보았다.

“제가 어떤 책에서 보기를, 우곤충이라는 게 있다더군요.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뱃속에 자리 잡고 영양분을 섭취하며 산답니다.”

“……!”

“……!”

“우곤충은 살아가기 위해서 숙주에게 끊임없이 먹기를 충동질하지요.”

“그런 벌레가 정말 있다는 말이오?”

무한은 검천전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었다. 별의별 잡서도 많았는데, 벌레나 독에 대한 내용을 적어놓은 책도 있었다.

할아버지 심양조가 천일고에 걸린 후 제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모아놓은 희귀한 책들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천일고를 퇴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무한은 그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유의하여 읽었기에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무한은 천평산이 끊임없이 땅콩과 과일, 육포를 먹는 걸 보고 문득 우곤충이 떠올랐다.

그러지 않고서야 재신 같은 인물이 저렇듯 자기관리를 하지 못할 리가 없다.

“많이 먹으니 살은 찌는데 영양분을 우곤충에게 빨리니 외려 기가 허해지지요. 그러다 종국에는 몸의 균형이 깨져 죽음에 이릅니다.”

“그럼 아버지가? 그럴 리가요. 아버지 옆에는 명의가 있다고요.”

“우곤충의 무서운 점이 그겁니다. 본인이 식탐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

“그런 해괴한 벌레가 있다니.”

백의영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중원에는 없습니다.”

“예?”

“원래 우곤충은 저 멀리 월국 밀림에서 짐승의 몸에 기생한다더군요. 그 짐승을 날것으로 먹으면 사람도 걸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천 단주가 월국에 가셨을 때 걸리신 모양이군요.”

백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아버지는 근 십년 간 서현을 떠난 적이 없으세요.”

천소향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우곤충이라면, 치료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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