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뭐?”
“그게 무슨 말이냐?”
고벽후와 검마가 동시에 물었다.
“고 대형과 나머지 형님들은 백가상단의 호원무사가 될 거고, 이분은 손님이 되어 묵을 겁니다.”
무한의 말에 고벽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나도 좋다. 내상 입은 노인네와 손을 섞는 것보다 제대로 싸우는 게 낫지.”
“…….”
검마는 침묵을 지켰다.
무한의 제안에 숨은 함정이 있는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눈알을 굴리던 검마가 입을 열었다.
“좋다. 받아들이지.”
“좋습니다. 바로 가죠.”
무한이 일어서자 검마와 고벽후가 동시에 일어났다.
“나도 가겠다.”
검마를 믿지 못하는 고벽후가 동행했다. 연추산 등은 수 장 거리에서 뒤를 따랐다.
무한은 곧장 백가상단으로 갔다.
백가상단은 서현 동문 근처에 있었다.
장원은 컸으나 대문 앞은 오가는 이가 없어 한가했다.
그래도 대문 양 옆에 위사들이 흐트러짐 없는 기세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 무리 사람이 다가오자 잔뜩 경계하던 위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검마나 고벽후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신분을 밝히자 위사가 황급히 뛰어 들어가더니, 잠시 후 백의영이 직접 나왔다.
백의영은 왼팔을 흰 천으로 감아 목에 걸치고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백의영이 객청으로 가며 말했다.
“부주께서 기습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저 역시 몸이 불편하여 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소단주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나는 괜찮습니다만…….”
침울한 백의영의 시선이 천소향이 머물고 있는 안채 쪽으로 향했다.
천소향은 상세가 위중하여 천하상단으로 옮기지 못하고 백가상단 후원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무한은 백의영이 지난번 천소향을 박대했지만 속으로는 애정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다.
“천 낭자가 중상을 입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상처는 봉합했습니다. 그런데 자객의 무공이 기이하여 내상을 잡기가 어렵군요.”
“천하상단에서 조치를 취하겠지요.”
“흥! 제 누이조차 해치려 한 놈입니다. 뭘 기대하겠습니까?”
객청에 이르자 백의영이 검마와 고벽후 등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분들은 뉘신지요?”
“실은 소단주께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무한이 고벽후 등을 가리켰다.
“여기 다섯 분은 제 의형들이십니다. 잠시 은신할 곳이 필요한데 백가상단의 호원무사로 머물 수 있는지요?”
백의영이 놀라 말했다.
“부주의 의형제들이신데 호원무사라니요. 귀빈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벽후가 나섰다.
“아니오. 우리는 거칠게 살아서 안락한 곳은 오히려 불편하오. 의탁하는 김에 장원을 지키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소.”
그러더니 검마를 보며 말했다.
“이 노인이나 아주 깊숙한 곳에 잘 모셨으면 좋겠소. 기왕이면 우리가 지켜드리는 것도 좋겠고.”
백의영이 검마를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위험한 인물 같아 보였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분은 조용한 곳에 모셨으면 합니다. 한 달 정도면 됩니다.”
“후원 죽림에 별원이 있습니다. 그리로 모시지요.”
백의영은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는 하인을 불러 고벽후 일행과 검마를 안내하라 일렀다.
잠시 후 무한과 백의영 둘만 남았다.
“천종해가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백의영의 눈에 독기가 흘렀다.
무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천 낭자가 중상을 입었는데 천하상단이 조용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실은, 향아가 집에는 알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천하상단에서는 모르고 있을 겁니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고는 일어섰다.
“자식이 생사지경을 헤매는데 부모가 모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예?”
“이제 만날 때가 된 것 같군요.”
“누구를 말입니까?”
***
천하상단 내원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전각.
천평산은 누군가의 기운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어도 상대가 일부러 흘린 기운에 깬 것이다.
천평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새된 목소리는 익숙한 하인을 대하듯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천평산은 두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쪽이오.”
머리맡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무슨 일인가?”
온갖 매복과 함정을 뚫고 들어온 불청객을 보고도 여전히 아랫사람 대하듯 묻는다.
“보고자 하는 분이 계시오.”
천평산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천하상단 단주 천평산.
당금 황제도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자신을 오라 가라 하다니.
“무례하군. 볼일이 있으면 직접 오라 해라.”
“…….”
무흔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천평산은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그를 만나려면 외원과 내원, 그리고 천평산이 머무는 동원까지 삼문을 거쳐야 한다. 그걸 통과할 수 있는 패를 달라는 것이다.
힘으로 통과하려면 아홉 관문을 뚫어야 하고, 그사이 천평산의 전각은 기관진식이 발동하여 봉쇄된다.
“오겠다는 이가 누구냐?”
“검천!”
무흔의 말에 천평산의 눈꺼풀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천평산이 일어나 장식장 문갑으로 가더니 작은 옥패를 꺼내 건넸다.
“검천이라면 이 옥패가 없어도 나를 만날 수 있을 텐데.”
“당신이 천하상단의 진정한 단주라면 그럴 테지.”
무흔이 냉랭하게 답했다.
의미심장한 무흔의 말에 천평산의 두터운 볼살이 실룩거렸다.
무흔이 옥패를 챙겨 사라졌다.
천평산은 침상에 앉았다.
머리맡에는 땅콩과 해바라기씨 등 견과와 온갖 과일이 놓여 있었다.
천평산은 땅콩을 까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천평산이 천장을 향해 말했다.
“저자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나?”
천장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보기 드문 은신술의 고수입니다.”
무흔이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알아차렸다는 뜻이다.
“자네보다 뛰어난 자라는 거로군.”
천평산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태산이 무너져도 침식을 거르지 않는 천평산이다.
곧 잠이 들었다.
***
커다란 마차가 천하상단 정문에서 멈췄다.
수문위사 중 하나가 천하방 검천부 깃발이 꽂혀 있는 걸 보고 나는 듯이 안으로 달려갔다.
수문장이 와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검천부가 요즘 드나드는 건 알지만 오늘은 따로 연락이 없었으니 용건을 물은 것이다.
“천하방 검천부주께서 천하상단주를 만나러 왔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귀영이 대신 대답했다.
“단주를 뵙겠다고요? 약속은 되신 겁니까?”
수문장이 난처해하는데 안에서 육총관 조영산이 황급히 나왔다.
“검천부주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 이소단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이소단주가 아니라 상단주를 만나러 왔다니까.”
귀영이 다시 말했다.
늘 무표정했던 조영산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천하상단 상단주 천평산.
당금 황제도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재신으로 군림하는 천평산이다. 아무나 와서 만나자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천하방 검천부주가 아무나는 아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이소단주께서 사업 이전에 관한 정리를 마치셨다고 합니다.”
마차 안에서 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됐군요. 백가상단으로 보내면 됩니다.”
“그, 그게…….”
조영산이 머뭇거리는데 내원 대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이 나왔다.
“대총관!”
조영산이 앞장 선 사람을 보고 옆으로 물러나 예를 갖췄다.
반백의 머리를 한 오십대 장년인은 천하상단 대총관 천승무였다.
“천하상단 대총관 천승무가 천하방 검천부주를 뵙소. 단주의 명으로 마중 나왔소.”
천승무가 마차를 향해 가볍게 읍을 하였다.
천승무는 천평산의 사촌동생으로 소단주들도 함부로 못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천하상단 실세 중의 실세였다.
무한은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천승무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천승무가 앞장 서 걷자 귀영이 천천히 마차를 몰아 따라갔다.
천평산의 전각은 작은 언덕에 있어 천하상단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
천평산은 객청 주인석에 앉아 있었다.
무한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하인들이 양옆에서 부축했다.
천평산이 단상에서 서서 말했다.
“몸이 불편하여 마중 나가지 못한 걸 양해하게.”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천평산을 본 무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습니다.”
무한이 예를 취하고 손님자리에 앉았다.
천평산이 무한을 찬찬히 보았다.
“조부보다는 아버지를 많이 닮으셨네.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르는군.”
시녀가 와서 차를 따랐다. 그러곤 과일과 견과, 육포 등을 내왔다.
“좀 들게. 나이가 드니 먹는 게 낙이더군.”
천평산이 땅콩을 까먹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 했는가?”
천평산은 내심 검천부 사업이 몰락한 것에 대해 항의하러 왔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데 집안일로 갈라서야 하는 게 안타까워 왔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천평산의 두터운 눈꺼풀이 흔들렸다.
근 십 년 내 자신의 짐작이 틀린 적이 없었다.
무한이 사람을 보내 통행패를 달라고 했을 때 나름 조사를 한 바 있다.
그리고 둘째아들 천종해가 검천부 사업을 넘겨주는 걸 미적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천종해를 불러 야단치고 바로 넘겨줄 것을 지시해놓은 터였다.
그런데 무한이 엉뚱하게도 정혼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검천부주께서 중매를 하러 왔을 줄은 미처 몰랐군.”
“중매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미 정혼을 한 사이잖습니까.”
천평산이 클클 웃었다.
‘맹랑한 놈일세.’
천평산은 기가 차면서도 한편으로 무한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는 이제 검신이 살아 돌아와 독대한다 해도 태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린놈이 마차에 검천부 깃발까지 꽂고 위세를 떨며 들어와서는 막내딸을 내달라니 어이가 없었다.
“혼담이 오갔을 뿐 정혼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 의영이와는 어떤 사이신가?”
“그렇습니까? 제가 앞서나갔군요. 백 공자와 관계를 묻는다면, 거래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하의 검천부주가 거래처 혼사에까지 나서다니. 너무 가벼이 처신하는 게 아닌가?”
무한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거래처가 평안해야 제 사업도 잘 될 게 아니겠습니까?”
“백가상단에 무슨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백가상단이 예전만 못해도 잠재력은 충분합니다. 다만 소단주 백 공자의 심기가 어지러우니 걱정이죠.”
“음……. 여인 때문에 심기가 흔들린다면 좋은 거래 상대라고 할 수 없다네. 나 같으면 거래를 재고하겠네.”
“그리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랑하는 여인이 생사지경을 헤맨다면 저도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면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런 상황이라면야…….”
말을 하다 말고 멈춘 천평산의 볼이 실룩거렸다. 두터운 눈꺼풀이 올라가는 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뭐라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