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고벽후의 추적에 시달린 검마는 아예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 수도 있으나 계속 쫓기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다 무한이 고벽후와 함께 있는 걸 보고는 마지막으로 협상을 해보자는 생각에 무한을 부른 것이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협박이 통할 사람이 아닙니다.”
“협박이 아니라 협상이다.”
“협상이라면 이쪽에서 주는 것도 있어야죠.”
“목숨을 살려준다니까.”
무한이 피식, 웃었다.
검마는 적을 살려주는 게 최대한의 호의인 모양이다.
“그가 누군지 아십니까?”
“대체 누구냐?”
“멸마대주입니다. 철혈의 매라고 불렸죠. 마천 소천주와도 맞장 뜨는 사람입니다.”
“으음.”
검마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도 감숙을 지키는 철혈의 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 사람이 고작 살려준다는 말에 포기할 것 같습니까? 마천 높은 자리에 앉아 계시다보니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는 거 아닙니까?”
검마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앞의 어린놈 입이 제법 매우니 만만히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그놈이 쫓는 이유가 뭐냐? 내게 뭘 원하는 거냐?”
당신을 잡아서 천하방이나 마천과 협상한 후 넘기려고 하는 거라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건 어떨까요? 영감님이 필요한 게 잠적 아닙니까? 제가 잠적시켜드리지요.”
“뭐라고?”
“대신 왜 이러고 있는지 이유를 말해주세요.”
“뭔 말이냐? 내가 뭘 어쨌다고?”
검마가 딴청을 피웠다.
“영감님 때문에 천하방과 마천 간에 맺어진 고원의 맹약이 깨졌죠. 감숙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건 아시죠? 의도한 바 아닙니까?”
검마가 냉랭한 얼굴로 코웃음 쳤다.
“나는 천하를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내 길을 갈 뿐!”
“그 길이 감숙 변방을 혼돈에 빠뜨리고 여러 목숨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죽을 놈이 죽었겠지.”
“세상에 죽어야 할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요?”
“무인이 약하면 죽어 마땅하지. 주제를 모르고 칼을 들고 나섰다가 죽었는데 누굴 탓할 수 있단 말이냐?”
“약자는 죽어도 된다. 그게 정도와 마도를 가르는 거로군요.”
무한은 마인들은 참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더 묻지 않겠습니다. 고 대형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추적하려 할 겁니다. 여기서 영감님을 숨겨줄 사람은 저뿐입니다.”
“내 말이 단순한 협박을 들리나? 지금 너를 죽이고 그놈도 죽이면 된다.”
검마의 얼굴을 보니 정말 진지하게 고려하는 눈치였다.
‘이자가 정말 독한 마음을 먹는다면 고 대형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
무한은 검마가 마침 자신을 본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영감님이 손을 쓰면 고 대형이 낭패를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고 대형 옆에는 그림자처럼 따르는 분들이 있죠. 그들까지 합공하면 싸움이 커질 겁니다. 추격대는 물론이고 남궁세가에서도 나서겠죠.”
“죽고 싶으면 오라지.”
“영감님이 고수라는 건 압니다만 천하방이나 남궁세가도 만만치 않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죽겠지만 반드시 영감님을 잡을 겁니다.”
“감히!”
검마가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손을 쓸 기세였다.
“영감님 정도 되는 분이 이리 먼 길을 오신 데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겁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전에 죽을 수도 있겠죠. 그러면 정말 아까운 일 아닙니까?”
검마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어린 것이 세 치 혀를 정말 잘 놀리는구나.”
“말씀 드렸듯, 제가 영감님을 숨겨드리죠.”
“……어떻게?”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곳을 알고 있습니다.”
검마가 무한을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너를 어떻게 믿지? 숨겨준다고 했다가 함정으로 몰아넣을 생각 아니냐?”
“검천부주를 너무 무시하는 언사로군요. 제가 영감님을 잡아 뭘 하겠습니까? 원하는 것도 없는데 영감님을 속이면 검천부의 명성만 떨어질 겁니다.”
검마가 잠시 생각했다가 다시 말했다.
“네가 나를 숨겨 줬다가 사실이 발각나면 네가 위험해질 텐데? 아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숨겨준다는 거지? 중원의 고수를 하나하나 찾아가 죽이려고 왔다면?”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이렇듯 조용히 잠행하지도 않으셨겠죠.”
“흥!”
검마가 코웃음 쳤고 무한은 말을 이어갔다.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인데 욕 좀 얻어먹으면 어떻습니까? 제 평판에 대해선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부모 잘 만나 지위를 얻은 주제에 진짜 대인배라도 된 듯 구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복도 타고나는 모양입니다.”
무한의 뻔뻔한 말에 검마가 짜증냈다.
“지금 나하고 농을 하자는 거냐?”
“부모 덕 이야기는 영감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허.”
검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근데 정말 누구십니까?”
“알면서 왜 묻는 거냐?”
“강호의 일은 직접 보고 들은 것 외에는 믿지 말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사실 영감님께서 마천의 검마다, 라고 해도 다시 확인해볼 겁니다. 정말인지.”
“…….”
검마의 주위로 싸늘한 한기가 휘몰아쳤다.
국수를 먹던 이들이 난데없는 한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치 빠른 이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따라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 나갔다.
잠시 후 국수집은 텅 비었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곳곳에서 이쪽을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무한이 돌아보니 고벽후를 비롯해 연추산, 오상, 장초와 홍염이 포위하듯 은신하고 있었다.
검마도 고벽후 등이 은신한 걸 눈치챘나 보다.
무한이 시간을 끌어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는지 싸늘한 한기가 더욱 짙어졌다.
“어린놈이 음흉하군. 하지만 이런 함정으로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가소롭구나.”
검마는 당장이라도 손을 쓸 기세였다.
무한도 경천승운공을 끌어올렸다.
그때.
“하하. 막내가 여기 있었구나.”
고벽후가 길 한쪽에서 나타났다.
고벽후가 다가오더니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고는 몸을 쑥, 기울여 머리를 낮추더니 죽립을 쓴 검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생긴 분이셨구나? 수천 리를 따라오면서 내내 궁금했지 뭐야. 그 나이에 몸이 참 빠르시더라고.”
“뭐하는 거냐?”
검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벽후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저잣거리에서 피 보지 맙시다. 시간이 썩는 것도 아니잖소? 어서 국수나 마저 드시고.”
고벽후가 손뼉을 짝짝 쳤다.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챈 주인은 주방에서 쳐다만 볼 뿐이다.
“여기 국수 좀 주게. 나는 돼지고기가 좋더라. 야채도 듬뿍 넣어주고 술도 한 병 주고.”
고벽후가 음식과 술을 주문하자 검마가 인상을 썼다.
“뭐 하자는 거냐니까?”
검마의 목소리에 싸늘한 예기가 실렸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앉아 있으니 궁금해서 왔소.”
“흥!”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소. 하지만 막내를 해치는 건 곤란하지.”
고벽후가 홀로 객잔에 머물렀던 것이 숨어 있는 검마를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검마 정도라면 추적자를 해치울 생각을 할 것이라 추측하고 연추산 등을 주위에 매복시켜놓고 스스로 미끼가 된 것이다.
예상대로 정말 검마가 나타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침 무한이 찾아왔고 검마가 접근하는 걸 연추산이 보았다.
보고를 받은 고벽후가 부랴부랴 따라온 것이다.
고벽후가 무한을 향해 말했다.
“막내는 어떻게 이 노인을 아는 거냐?”
“길에서 잠깐 뵌 인연이 있지요.”
“이분이 누군지는 알고?”
“아마도 마…….”
“주둥이 닥쳐라!”
검마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고벽후가 검마를 주시했다.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너스레를 떨었다.
“마천에는 팔대마가가 있고 마가마다 늙어죽지 못한 노괴들이 수두룩하지.”
검마가 뿜어내는 한기는 이제 뼛골이 시릴 정도였다.
“그들이 누가 누군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아.”
고벽후가 검마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내 앞에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죽고 싶은 게로군.”
검마가 코웃음 쳤으나 고벽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지긋지긋한 도주행도 끝내야 할 때 아니겠소?”
고벽후가 경계를 하며 말을 이었다.
“소마가 기다리고 있소. 갑시다.”
“흥!”
검마가 코웃음을 치며 주위를 돌아봤다.
저잣거리니만큼 사람들이 꽤 오갔다. 여차하면 이 자리에서 손을 쓸 눈치였다.
“내상도 다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마침 주인이 국수를 가져와 놓고 재빨리 사라졌다.
“먹고 합시다. 싸우기 좋은 으슥한 곳을 알고 있으니까.”
고벽후가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휘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 결판을 봐야 할 것 아니오?”
검마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주위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고벽후 말대로 결전을 준비하는 듯했다.
고벽후 역시 국수를 먹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운의 골이 생겨났다.
그때 무한이 끼어들었다.
“고 대형, 제가 이 노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뭔 소리냐? 이자를 숨겨주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한 달만 시간을 주시죠.”
무한의 말에 고벽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형제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 노인은 내상을 입었습니다. 지금 고 대형이 겨뤄서 제압한다 해도 승복하지 않을 겁니다.”
“흥!”
검마가 눈감은 채 연달아 콧방귀를 꼈다. 무한이 말이 가소롭다는 뜻이다.
검마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가를 떠나 세상에 나오니 이런 수모를 겪는다. 내상만 아니라면 이 두 놈을 당장 쳐죽였을 텐데.
“이 노인도 원치 않는 것 같은데?”
고벽후가 무한의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묵살하지 않았다.
그러자 검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니, 받아들일 생각이다.”
고벽후는 흠칫, 놀랐다.
검마가 무한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이라 여겼는데 받아들일 듯하니 의외였다.
무한이 검마에게 말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드리지요.”
한 달 간 숨겨주겠다는 뜻이다.
검마가 눈을 떴다.
정말 한 달을 벌 수 있다면 그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한 달이면 내상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게 뭐냐?”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건 말할 수 없다.”
검마가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 당장 격전을 치르더라도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무한은 검마가 거절하자 오히려 믿음이 갔다. 적당히 둘러댈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내기를 하죠.”
“……?”
“한 달 후에도 말씀하실 생각이 없다면 그냥 떠나셔도 됩니다.”
무한의 말에 고벽후가 인상을 썼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무한이 일어나 고벽후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고 대형께서 아우를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고벽후가 입맛을 다셨다.
의중은 모르겠지만 경솔하게 판단할 무한이 아니다.
“두 분이 싸울 기회는 한 달 후에 있을 겁니다. 그때도 싸우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내기에 이길 자신은 있냐?”
고벽후가 검마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한 달 후 어찌될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좋다. 네가 정 원한다면 한 달은 쫓지 않겠다.”
“너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분도 백가상단에 의탁하게 될 테니까요.”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