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고벽후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까? 천평산을 잡아 족치면 바로 해결될 건데.”
“상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더군요. 무력으로 해결하면 외려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지요.”
무한이 말하고는 전낭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필요하실 겁니다.”
고벽후가 전낭을 열어보았다.
전표와 은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역시 검천부주로군.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더니. 사양하지 않으마.”
“검천부도 허덕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천하상단과의 일을 순리대로 풀어야 하고요.”
고벽후가 무한을 빤히 보다 말했다.
“일파를 끌어갈 자격이 있군. 그렇지. 힘으로만 하는 건 무부나 하는 짓이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비무를 못 하는 게 아쉽군요.”
“군사부에서 보낸 추격대가 골치야.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서현 쪽으로 몰려오는 모양이야. 몸을 사려야지.”
고벽후도 아쉬워하였다.
“그러지 말고 잠시 백가상단에 의탁하는 건 어떻습니까?”
“백가상단?”
“상단 호위무사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해드리죠. 제게도 도움이 됩니다.”
무한이 백가상단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음, 그러니까 상단 호위무사로 있으면서 백의영을 지켜 달라 이 말인가?”
“수고비를 먼저 받은 셈 치세요.”
무한의 시선이 전낭으로 향했다.
“이거, 음흉한 놈일세. 공짜는 없다는 거지?”
고벽후가 웃고 무한도 웃었다.
“우리도 나쁠 건 없지.”
“그럼 백가상단과 협의하여 연락드리겠습니다.”
무한이 일어섰다.
고벽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날 옆에 있던 호위 이름이 뭐지?”
“무흔이라고 합니다. 그건 왜 묻습니까?”
“어떻게 고용하게 됐지?”
“기천부 강 숙부가 붙여준 호위입니다. 신분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래? 믿을 만한 자라는 거지?”
“믿고 있지요.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겁니까?”
“남의 호위나 하고 살 자는 아닌데 네 곁에 있으니 당연히 궁금하지.”
무한 역시 궁금한 부분이다.
솔직히 무흔의 실력을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초절정 이상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무공이…… 백도는 아닌 것 같더구나.”
“정파가 아니라고요? 마천이라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믿을 만한 자라면 됐다.”
고벽후가 말을 끊었다.
무한은 작별인사를 하고 객잔을 나왔다.
객잔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무한이 대로를 따라 가는데 전음이 들려왔다.
- 애송아.
무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골목 끝에 죽립을 푹 눌러 쓴 자가 서 있었다.
무한이 흠칫, 놀랐다.
‘검마?’
죽립으로 얼굴을 가려 알아볼 수는 없지만 풍기는 기운은 감숙에서 만난 백발노인 검마였다.
- 따라와라.
검마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자기 갈 길로 갔다.
그러자 재차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 뭐하냐? 따라오지 않고.
무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사람인가?”
- 전음도 못 하냐?
물론 할 줄 안다. 대꾸할 생각이 없을 뿐이다.
무한은 모른 척하고 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상대가 검마라는 걸 아는데 따라갈 이유가 없다.
천기조양환으로 몸을 다스렸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다. 검마가 자신을 해치려 든다면 위험할 수 있다.
아무리 경험도 좋지만 뻔히 보이는 위험에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한 이유가 없다.
검마와 그는 접점이 없다.
그저 고원에서 한 번 마주친 것뿐이다.
오히려 이 길로 되돌아가 고벽후에게 검마가 확실히 서현에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게 낫다.
그래서 검마가 불러도 무시했다.
검마가 협박했다.
- 강제로 끌고 오기 전에 순순히 와라.
무한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백주대낮에 사람을 잡아가겠다고? 나는 허수아비인가? 좋은 구경거리 나겠군.”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검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무한이다.
그러자 전음성이 누그러진다.
-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다. 할 말이 있다.
“마인의 말을 어떻게 믿을까? 죽고 나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지.”
검마는 무한이 이렇게 나오리라 예상 못 했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음성이 더 부드러워졌다.
- 정 그렇다면 한적한 찻집이나 주루로 가라.
무한이 걷다가 길가 노천 국수집으로 들어갔다.
길 옆 공지에 천막을 치고 탁자를 놓은 국수집은 저잣거리 사람들로 붐볐다.
무한이 앉자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마가 맞은편에 앉았다.
“뭘 드시겠습니까?”
“아무거나 가져와라.”
검마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주인이 되레 소리쳤다.
“아무거나라니! 이래봬도 우리집 국수는 스무 종이 넘는다고! 길거리 국수집이라고 우습게 보는 거야 뭐야?”
검마가 죽립을 들어 주인을 쳐다봤다.
눈빛이 매섭다.
주인이 움찔하더니 기가 죽었다.
“연세가 있으신 분이었군요. 허리가 정정해서 그렇게 안 보였는데 말이죠. 참 건강하십니다.”
“…….”
주인이 안절부절못하는데 무한이 말했다.
“저는 닭고기가 들어간 국수 하나 주세요. 이분은 아무거나 드신다니 그냥 아무거나 가져오시고요.”
“나도 닭고기국수로!”
검마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주인이 재빨리 돌아갔다.
“뭔 늙은이가 눈빛이 저리 사납담. 곱게 늙어야지.”
주인이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탁자에 놓인 검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소란을 피우면 좋지 않으실 텐데요. 저야 상관없지만요.”
검마가 어금니를 불끈 물고는 눈을 감았다. 호흡을 조절하는 듯 보였다.
검마의 행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계속 쫓겨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상도 아직 완치되지 않았는지 미간의 묵빛 기운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천의 고수도 제집 떠나 남의 동네 오면 별 수 없구나.’
서현을 비롯한 휘주 일대는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상단을 끼고 많은 무가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검마의 신분이 알려지면 서현은 물론 휘주 일대가 뒤집힐 것이다.
지난날 마천과의 싸움에서 친지를 잃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복수하려 들 게 분명했다.
검마가 경천동지할 무공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 많은 무인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지금 천하방 군사부 직속 비찰대가 추격하고 있다고 했다.
잠시 후 검마가 눈을 뜨더니 무한을 노려보았다.
“뭐냐? 그 눈빛은?”
“연세도 있는 분이 왜 풍찬노숙을 하고 다니시는지 궁금해 하는 중입니다.”
검마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희 중원 놈들은 정신이 썩어 빠졌지. 초원의 사내들은 길에서 사는 게 일상사다.”
“풍찬노숙과 정신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검마가 주위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봐라. 여기만 해도 겉보기만 화려하지 사는 꼬라지들은 썩을 대로 썩지 않았나.”
“…….”
“상인은 저울을 속이고, 관리는 뒷돈을 받고, 무인은 암습을 하더군. 돈과 권력, 명예를 얻기 위해 친구의 등을 찌르고 가족을 버리는 놈들의 세상이다. 정화가 필요한 곳이지.”
“그 정화가 죽음이군요?”
무한은 과거 마천이 중원을 정화시킨다는 이유로 들어왔던 걸 떠올리며 말했다.
“제대로 모르면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 과거 전쟁은 중원에서 일으킨 것이다.”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기도 안 찬다는 듯 무한이 콧방귀를 꼈다.
“옳은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 중원을 틀어쥐고 있는 놈들이 본 천을 배척한 거지. 그런 놈들이 죽어야 세상이 정화되는 거다.”
“배척했다고 죽이는 건 천리가 아니죠.”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놈들은 죽어 마땅해. 너희 중원 놈들은 법을 어겼다고 사람을 죽이지 않냐? 법이 우선이냐 하늘의 도리가 우선이냐?”
무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데 마천의 무공이 천리를 거스르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요?”
검마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나하고 무학 논쟁을 하자는 거냐?”
“이치를 따져보자니 하는 말입니다.”
“모든 무공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 그 자체가 천리에 따른 거지.”
“인신공양이나 강시술, 생명을 취해 공력을 높이는 등 갖가지 마공도 천리라는 겁니까?”
“어린놈이 아무것도 모르고 떠드는군.”
“모르니까 묻는 겁니다.”
대화가 길어지며 마천의 무공에 호기심이 생긴 무한은 정말 진지한 마음으로 물었다.
“인신공양이니 뭐니 하는 건 중원 놈들이 씌운 누명이다.”
“온 세상이 거짓을 믿었다는 겁니까? 그게 외려 거짓으로 들리는 군요.”
“뭐. 본교의 이단자들 중에 그런 사이한 짓에 빠진 놈들이 있긴 하지.”
검마가 그런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마침 주인이 국수를 가져왔다.
따듯한 국물에서 김이 올라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국수를 먹었다.
검마는 국물까지 다 마셨다. 쫓기는 와중이니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을 것이다.
“한 그릇 더 하시겠습니까?”
“됐다.”
무한은 주인을 불러 한 그릇 더 시키고 말했다.
“마천의 팔대마가…….”
“주둥이 닥쳐라.”
검마가 주위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 쫓기는 중이셨지.”
무한이 돌려 말했다.
“암튼 지위도 꽤 높으신 분이 왜 집 떠나 이 고생을 하는 겁니까?”
“네가 알 바 아니다.”
“그럼 왜 저를 부른 겁니까?”
검마가 무한을 노려보다 말했다.
“나를 속였더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네가 검천부주라지?”
“그런데요?”
“지난번에는 숨기지 않았더냐.”
“서로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뿐이었죠. 그때는 검천부주가 아니라 천무관 문하생 신분이었을 뿐이고요.”
- 심양조의 손자, 심군하의 아들!
검마가 전음으로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검마는 주위를 의식하여 계속 전음을 보냈다.
- 마천에서 검천부가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보자마자 죽여야 할 대상이다.”
“유감이군요. 저는 그쪽 사람들을 무작정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지금 죽이시게요?”
검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천을 떠났는데 이제 와서 너 같은 애송이를 죽여 뭐하겠느냐?”
“살인멸구도 서슴지 않던 분이 그리 말씀하니 믿기지 않는군요.”
“괜한 시비 걸지 마라.”
“그럼 저를 부른 진짜 이유를 말해보시죠.”
“너를 죽이지 않을 테니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겠다.”
검마가 선심 쓰듯 말했다.
무한은 속으로 기가 찼으나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천하의 검마가 부탁이라니. 그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뭘 들어달라는 겁니까?”
“나를 쫓는 놈하고 무슨 관계냐?”
무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도운종 말입니까?”
“말고. 감숙에 있던 놈들 말이다.”
역시 검마다. 쫓기면서도 되레 고벽후를 감시했던 모양이다.
“의형이시죠.”
“의형이라고? 그럼 말이 통하겠군.”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겁니까?”
“가서 전해라. 추격을 포기하라고.”
검마를 뒤쫓는 세력은 크게 세 곳이었다.
마천의 추적자들은 그리 염려할 바가 아니었다.
마천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 훤히 알고 있었고, 마천도들 또한 중원에서 공공연하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운종과 비찰대의 추적이 끈질겼지만 천리추종향을 지웠으니 해결된 바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고벽후 일행의 추격은 따돌리기가 어려웠다.
“싫다면요.”
“아니면, 네 의형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