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무림인의 분쟁에 관아가 개입하는 걸 이제껏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크음. 아무리 무림방파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감금하는 건 불법이오.”
남궁명과 현승의 대화에 무한이 끼어들었다.
“그렇잖아도 관아에 넘길 참이었습니다. 마침 오셨으니 잘 됐군요.”
무한이 귀영을 시켜 오산사걸과 곽삼양, 그리고 살수를 데려왔다.
“이자들은 오산사걸이라 하더군요. 여기 곽삼양의 살인청부를 받고 들어오다 잡혔지요.”
곽삼양 등이 몸부림쳤으나 귀영이 아혈을 짚어 놓았기에 항변할 수 없었다.
“이자는 화수전이라는 유명한 살수집단에서 보내온 자입니다. 나머지 자들도 제압했는데 자결하고 말았지요.”
현승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도 화수전이라는 살수단체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큰일이었구나.’
모든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천종해가 원망스러웠다.
더구나 죽었다던 곽삼양과 오산사걸이 살아 있으니 당황했다.
“이자들은 왜 말을 못하오?”
“자결할까봐 아혈을 짚어 두었습니다.”
귀영이 오산사걸 중 주풍호의 아혈을 풀었다.
살길이 생긴 주풍호가 곽삼양을 가리키며 황급히 외쳤다.
“이자가 검천부주를 죽여 달라 했습니다.”
귀영이 다시 곽삼양의 아혈을 풀었다.
곽삼양도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는 동정을 파악해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절대 죽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현승이 곽삼양에게 물었다.
“넌 누군데 이 집 동정을 살피려 한 거지?”
“그, 그게…….”
곽삼양이 머뭇거리는데 누군가 대문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자는 곽삼양이라고 천하상단 이소단주의 심복이오. 주로 더러운 일을 대신하는 자요.”
새로이 들어온 이는 백의영이었다.
무한의 집에 변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길이다.
백의영이 곽삼양에게 말을 건넸다.
“곽 집사, 오랜만이오. 이소단주는 잘 계시나 모르겠군.”
곽삼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현승도 난처해졌다.
쇠락했다지만 백가상단도 무시 못 할 상단이었다. 그런 곳의 백의영이 명백하게 곽삼양의 신분을 밝혔으니 난처할 밖에.
남궁명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죄가 있다면 이들에게 있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쪽의 말만 듣고 사람이 죽은 중대 사안을 처리할 수 없소. 당사자들은 모두 관아로 가야겠소. 현령께서 판단하실 것이오.”
현승이 엄정한 얼굴로 말했다.
“검천부주도 증인이니 관아로 가야겠소.”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무한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명이 싸늘한 눈빛으로 현승을 보았다.
“천하방 검천부와 본가는 지난날 마천과 싸운 형제였습니다. 이 일이 어찌 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현승은 내심 이 일에 개입한 걸 후회했다. 역시 무림의 일은 무림에 맡겨야 했다.
귀영이 화수전 살수를 일으키며 말했다.
“화수전 살수가 뇌옥에 갇히면 어떤 일이 일어날라나? 하루도 못 가서 죽겠지? 아직 배후도 밝히지 못했는데 죽으면 그 책임은 누가 지려나?”
“현청 관할에서 죽는다면 그 책임이 분명하겠지요.”
남궁명이 냉랭한 어투로 답했다.
현승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남궁세가라지만…… 관아를 우습게 봐?’
현승이 포두에게 단단히 일렀다.
“저자는 심문할 때까지 특별히 감시하게.”
남궁명이 무한에게 말했다.
“별일 없을 거네. 나는 본가로 가서 서현부의 동정을 지켜보겠네.”
남궁세가에서 암중에 힘을 쓰겠다는 뜻이다.
“굳이 그럴 것 없습니다.”
“아니, 지기가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외면할 수는 없지.”
현승이 앞장서고 그 뒤를 무한이 뒤따르고, 그 다음에 포두와 포괘들이 곽삼양 등을 포박하여 갔다.
그 뒤로 염량 등 네 호위가 따랐다.
모두 떠나자 남궁명도 집을 나와 본가로 향했다.
관아에 도착한 현승이 염량 등에게 말했다.
“호위는 들어갈 수 없네. 서현부에는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다네.”
“그게 무슨 소리요?”
염량이 항의했으나 관졸들이 창을 세워 막았다.
“기다릴 필요 없으니 돌아가 계세요.”
무한이 말했으나 염량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부르십시오.”
현승은 서현부로 들어오자 기세가 살아났다.
“현령께 보고하고 조사도 해야 하니 며칠 걸릴 걸세. 그동안 객사에서 머무르게.”
무한은 현승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시일을 끌려는 것이다.
천종해에게 계약 해지 이행을 마무리해 달라고 한 날이 이틀 뒤다. 그때까지 무한을 잡아두려는 것이다.
‘하루 이틀 더 시간을 번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단지 시간만 끌려는 게 아닐 것이다.
‘화수전이 두 번째 살수행을 계획한 걸까?’
무한이 곰곰 생각하다 벌떡 일어났다.
“무흔, 거기 있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무한이 서현부로 올 때 이런 일을 예상한 백의영이 무흔을 보냈다.
서현부로 은밀히 잠입할 수 있는 이는 무흔과 귀영이었고, 무공이 더 강한 무흔이 적임자였다.
“이번 목표는 제가 아닙니다. 백 공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어서 염 호위 등과 함께 백 공자 주위를 감시하세요.”
“백 공자보다는 부주의 안위가 더 중합니다.”
“제게는 귀영을 보내세요. 별일은 없을 겁니다. 천종해가 연루된 이상 화수전도 서현부에서 일을 벌이지는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무흔이 사라졌다.
말을 하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백의영부터 제거하고 시일을 확보한 후 자신을 처리하고자 들 것이다.
이튿날까지 무한을 찾는 이가 없었다.
“그냥 나가시면 안 됩니까? 이까짓 지현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냐고요.”
은신을 싫어하는 은신술의 고수 귀영이 천장에 숨어서 투덜거렸다.
“천종해 같은 놈은 잡아다 족치면 죄다 불 텐데 굳이 증거를 잡아야 할 이유가 있냐고요.”
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곽삼양만으로는 천종해를 몰아붙일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무한은 천종해가 아니라 천평산을 만나고자 했다.
머리를 만나 담판을 짓는 게 가장 확실하니까.
“화수전 살수들도 머리가 있는데 설마 서현부에서 일을 벌이겠어요? 그냥 가자고요.”
귀영은 화수전 살수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귀영이 입을 닫았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관아의 하인이 소면과 닭고기, 술을 가져왔다.
하인이 탁자에 음식을 놓고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툭.
귀영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흐음. 이거 수상한데? 술을 가져왔다는 말이지?”
이제까지 소면만 나왔다. 그때마다 귀영이 일일이 독이 있나 시험을 했다.
귀영이 음식과 술에 은침을 대어 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귀영이 은침을 거두려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것들이 나를 물로 보네?”
귀영이 중얼거리며 술과 소면을 섞더니 은침을 대었다.
그러자 은침이 까맣게 변했다.
“역시! 나는 천재란 말이야. 이거 보세요. 이리 교묘한 하독을 잡아내는 호위 보셨습니까?”
귀영이 의기양양해 하였다.
“역시 상대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되겠군요. 서현부에서 독살을 저지르려 하다니.”
귀영이 옆에 찬 주머니에서 건량을 꺼내 건넸다.
“이거라도 씹으시죠.”
귀영이 다시 대들보로 올라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배짱 하나는 정말 두둑하단 말이야. 눈앞에서 독을 보여줘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다니.’
무한을 객사에 가둬두다시피 한 현승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무한은 서현부 객사에서 머물며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경천승운공을 운기하자 천지의 기운이 강하게 결집했다. 한 호흡에 단전이 가득 찼다.
무한의 성취는 무림의 상식을 벗어나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 나이의 심양조도 이루지 못한 경지였다.
‘경천심결과 심의삼재검, 그리고 지화령석!’
천하제일인 심양조가 고심한 최적의 수련법에 지화령석으로 환골탈태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한은 경천승운공으로 쌓은 기운을 전신으로 흩어버린 후 눈을 떴다.
천정에서 뭔가 뚝, 떨어졌는데 침이었다.
귀영이 무료함에 지쳐 대들보에서 잠이 든 것이다. 가늘게 코까지 골고 있다.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저러고도 은신술로 먹고 살겠다고 험한 강호에 나서다니.
무한이 내기를 모아 지풍을 튕겼다.
“헉! 누구냐!”
귀영이 펄쩍, 뛰어내리며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칼자루를 쥐었다.
무한의 손이 귀영의 목에 닿아 있었다. 그대로 움켜쥐면 목울대가 부러질 수 있는 위치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묻고 싶네요. 침상에서 자지 그래요?”
귀영이 무한의 손을 슬며시 밀어내며 겸연쩍어 하였다.
“하도 졸려서. 아시다시피 부주께서 잘 때 저는 깨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낮잠 정도는 봐주셔야죠.”
“그게 문제가 아니죠.”
“문제가 또 있나요?”
“이렇게 허송세월하며 보낼 겁니까?”
“허송세월이라뇨? 부주를 호위하는 일인데.”
“그러지 말고 무공을 제대로 익혀보는 게 어때요?”
“무공이요? 이 나이에 무슨 무공을 또 익힌답니까.”
“그 나이가 어때서요? 서른도 안 된 것 같은데?”
“동안이라 그렇지 거진 서른이라고요.”
“서른에 무공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보다는 낫지 않아요?”
“무공은 먹고 살 만큼만 익히면 됩니다. 괜히 욕심 부리면 명을 재촉할 수도 있죠.”
귀영이 딴전을 부렸다.
무한이 침소로 들어가 책을 한 권 가지고 나와 건넸다.
“이게 뭡니까?”
“귀 호위가 배운 게 은신술과 무영도, 그리고 암왕…… 무슨 도법이라 했던 가요?”
“암왕귀령도법입니다. 사부가 살수행을 하다 얻은 도법으로 절세무공은 아니어도 꽤 쓸 만하지요.”
“그렇죠. 도법은 꽤 쓸 만하죠. 근데 사람이 문제네요.”
무영도는 도법이라기보다는 살수에 적합한 칼 쓰는 법이다.
귀영의 실제 무공은 암왕귀령도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취가 부족하여 도법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
무한의 말에 귀영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 거 참. 무안하게…… 실은 사부가 죽기 직전에 가르쳐 주는 바람에 좀 부실하기는 하지만……그래도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하다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귀영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내공이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도법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는 거죠.”
“그거야…….”
귀영의 내공심법은 은신술에 최적화된 화수전의 무공이다. 암왕귀령도법과는 맞지 않았다.
무한이 지난 이틀간 쓴 책을 내밀었다.
“이걸 익히세요. 암왕귀령도법은 강력한 내기를 바탕으로 하니 도움이 될 겁니다.”
귀영이 책을 펼쳐보니 내공심법서다.
“이게 무슨 내공입니까?”
“제목은 모릅니다. 다만 귀 호위의 도법과는 맞을 겁니다.”
무한이 말했다.
실은 심양조의 서고에 있던 소금강연환대라심법이다.
소림에서 갈래 쳐 나온 내공이었는데 귀영이 알면 쓸데없는 사달이 일어날까 아예 제목은 적지 않은 것이다.
“내공은 함부로 익히는 게 아니라고 사부가 그랬는데요.”
귀영이 미심쩍은 눈으로 내공서를 살폈다.
그러나 그저 그런 내공심법이 아니라는 걸 알고 놀랐다.
“정말 이걸 익혀도 됩니까?”
“그래야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 수준으로는 적이 나타나면 오히려 내가 귀 호위를 호위해야 할 판이잖아요.”
“에이. 그렇게 대놓고 무시하면 곤란하죠. 강호는 경험이 칠, 실력이 삼입니다.”
“운칠기삼이 아니고요?”
“운은 경험에서 나오는 거라니까요?”
귀영은 말로는 지지 않았다.
“그럼 필요 없다는 건가요?”
무한이 돌려달라는 듯 손을 내밀자 귀영이 책을 뒤로 감췄다.
“줬다 뺏는 건 치사한 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