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내가 숙수야? 이 새끼들이 나를 하인 취급해?’
서현의 화제를 몰고 왔던 거부에서 졸지에 하인으로 전락한 귀영은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왔다.
무한은 천하상단에 다녀온 후 침실과 뒤뜰 연무장만 오갈 뿐이다.
‘그놈의 지겨운 무공 수련. 질리지도 않나?’
수년간 무한의 수련만 지켜본 귀영이다. 뒤뜰 근처는 아예 가지도 않았다.
대신 삼시세끼 꼬박꼬박 밥을 하는데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죽을 지경이다.
‘저놈들은 왜 밥을 안 하는 건데?’
검천사위는 온종일 어슬렁거리고 다닐 뿐이다.
심지어.
“귀 씨. 뒷마당에 낙엽이 수북하던데…… 비질 좀 해야겠어.”
“장에 나가거든 술 좀 사오게.”
자신을 하인 부리듯 시켜 먹는다.
귀영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한은 귀영이 차린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귀영이 그릇을 치우는데 무한이 물었다.
“도천부에 꼬박꼬박 보고하고 있죠?”
“하죠. 그건 왜 묻는 건데요?”
퉁명스러운 대답.
도천부 고강후에게는 귀영은 여전히 무한을 감시하는 이목이다.
귀영은 열흘마다 무한의 동정을 고강후에게 보고하고 있다.
“요즘은 뭐라고 보고하죠?”
“사실대로 하죠.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서현에 온 목적이 천하상단과 거래를 끊기 위해서라고 보고하세요.”
“예?”
“그렇게 적어 보내세요.”
“그거 비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비밀을 알려주고 고 숙부에게 점수를 따라는 거죠.”
“그래도 돼요?”
“혹 포상금이라도 줄지 알아요?”
“아!”
귀영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
백의영이 무한을 찾아왔다.
“위탁운영과 관련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요.”
“백가상단의 규모는 예전 같지는 않지만 지닌 능력은 여전합니다.”
백의영의 얼굴은 무척 밝았고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사람을 잃지 않았거든요.”
백가상단이 빠르게 몰락하는 건 상권을 잃었음에도 사람을 내보내지 않고 원래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입은 없는데 규모를 유지하다보니 손실이 커가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검천부의 위탁운영을 맡을 잠재력으로 돌아왔다.
“천하상단에서 사업권을 보내오면 바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천하상단이 순순히 내놓을지 염려됩니다.”
“받아들이도록 할 겁니다.”
담담한 무한의 말에 백의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호위 분을 돌려드리려 합니다. 새로이 개인 호위를 들였습니다.”
“당분간은 백 형 곁에 있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저보다 부주가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해서 무한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저는 무림인입니다.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백의영은 상대가 도천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는 천하방 내부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검천부와 도천부가 같은 방파인데 설마 무력을 쓸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백의영은 다시 화제를 돌려 위탁운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다 돌아갔다.
백의영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백의영이 다녀간 날 밤.
침실에서 경천승운공을 운기하고 있던 무한이 어수선한 기운에 눈을 떴다.
잡스런 기운이 집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잠입을 시도할 모양이다.
- 자객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염량의 전음이 들려왔다.
검천사위는 밤이면 집 주위에 은신하여 경계를 하고 있다.
- 일단 놔둬 보세요.
옆방에서 귀영이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요란했다.
‘천하태평이군.’
자정이 되자 주위를 포위한 기운이 움직였다.
사방에서 담을 넘었다.
그런데.
“윽!”
짧은 신음성이 곳곳에서 터졌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막았는지 답답한 신음성이었다.
“아흠.”
귀영이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더니 혀를 찼다.
“한심한 놈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귀영의 목소리가 왠지 신이 난듯했다.
무한도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지요?”
“혹시 몰라서 덫을 놨더니 승냥이 몇 마리가 걸려들었네요.”
“덫?”
“자객이 올지도 모른다면서요?”
귀영의 주특기가 잠입인 만큼 자객이나 이목들이 들어올 만한 길에 대해서는 훤했다.
길목마다 쇠질려를 깔아두었는데 잠입하던 자들이 걸려들었다.
“실패했으면 달아나야지 왜 저러고 있는 거죠?”
무한은 담벼락 밑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복면인들을 보며 물었다.
“약을 좀 발라놨죠.”
약이 아니라 독일 것이다.
“간단한 마비산이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데려오세요.”
귀영이 하나씩 끌고 와 무한 앞에 꿇어 앉혔다.
모두 네 명이었다.
복면을 벗기자 울긋불긋 반점이 핀 얼굴이 드러났다. 귀영이 쇠질려에 바른 독 때문이다.
장한들은 마비된 사지를 억지로 움직이려 안간힘을 썼다.
귀영이 비웃었다.
“소용없어. 그럴수록 독이 빨리 퍼질걸?”
“비겁한 놈! 독을 쓰다니.”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한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제법 강단이 있게 생겼다.
짜악!
귀영이 대뜸 따귀를 날렸다.
“새꺄! 한밤중에 남의 집 담을 넘은 놈이 할 말이냐? 주둥이에 독을 부어넣지 않은 걸 고마워해야지!”
짜악! 짜악! 짜악!
네 명의 뺨을 골고루 후려친 귀영이 손바닥을 털며 말했다.
“말하다 보니 성질나네. 이 어르신이 네놈 때문에 자다 깼잖아.”
그러고는 다시 골고루 뺨따귀를 날렸다.
보다 못한 무한이 타일렀다.
“무인은 욕보이는 게 아니죠. 그냥 깔끔하게 보내세요.”
“그럴까요?”
귀영이 칼을 뽑았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피가 튀는 걸 보고 싶지 않군요.”
“그렇지요. 핏자국 지우는 것도 귀찮은 일이죠.”
귀영이 험상궂게 생긴 자를 끌고 뒤로 돌아갔다.
잠시 후.
서걱!
“켁!”
칼이 뼈를 자르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들렸다.
귀영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다른 한 놈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갔다.
끌려가는 이가 발버둥 쳤다.
“자, 잠깐! 모두 털어놓겠소. 사, 살려만 주시오.”
“뭘 털어놓겠다는 거야? 알고 싶은 것도 없는데.”
“누, 누가 보냈는지 알고 싶지 않소?”
“알고 있어. 귀찮게 굴지 말고 조용히 가자고.”
귀영이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질질 끌고 갔다.
서걱!
“끅!”
남은 두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상이었다.
그중 덩치가 큰 자가 몸부림치며 무한의 발치까지 기어와 매달렸다.
“우린 사람을 해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저 경고만 하러 온 겁니다.”
무한이 짐짓, 코웃음을 쳤다.
“경고를 듣지 않으면 칼도 쓸 생각 아니었나?”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함부로 사람 죽이고 그러는 악도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넌 딱 봐도 악당 얼굴이잖아.”
이미 두 명을 썬 귀영이 칼을 빙빙 돌리며 다가오면서 말했다.
“정말입니다. 대협, 살려주십시오.”
덩치가 매달리자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너희는 죽을 운명이었다.”
“네?”
“내가 누군지는 듣고 왔나?”
“……호북에서 온 상인 아니신가요?”
귀영이 칼등으로 덩치의 뒤통수를 갈겼다.
“그럼 나를 죽이러 온 거냐?”
영문을 모르는 덩치가 커다란 두 눈만 끔벅거렸다.
“이 새끼, 정말 나를 죽이러 온 거 맞네!”
귀영이 덩치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가려 하자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무한은 덩치의 표정을 보고 정말 모르고 온 걸 알았다.
‘내가 누군지도 알려주지 않고 보냈다면 무공 수위를 알아보려는 뜻이겠군.’
장한들도 깨닫는 바가 있는지 낯빛이 까맣게 죽었다.
자신들을 사지로 보내다니.
그리고 그들의 의도대로 두 명이나 죽었다.
빠드득.
덩치가 이를 갈더니 다시 무한에게 매달렸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우리를 사지로 몬 놈을 죽이게 해주십시오.”
귀영이 물었다.
“그자가 누군데?”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자를 죽이겠다는 거냐?”
“일이 끝나면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귀영이 코웃음 쳤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해?”
“중간에 다리를 놓은 놈이 있습니다. 그놈을 잡아 족치면 누가 사주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없어도 그놈은 내가 찾을 수 있거든?”
“하지만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덩치가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으며 말했다.
“아냐. 난 심심해. 할 일이 없어. 숨은 놈 찾아내는 것도 재밌을 거야.”
귀영이 다시 한 놈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가려 했다.
끌려가던 덩치가 발악을 하며 외쳤다.
“우리는 오산사걸이고, 저는 셋째 주풍호라고 합니다. 어제 조춘삼이라는 자가 일거리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어떤 사람이 당신들에게 보내는 경고가 있다고 했습니다. 절대 죽이라는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말만 전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오산사걸? 오산사흉이나 오산사견 아냐?”
주풍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그리 부르는 자도 있긴 합니다만…… 사걸입니다. 서현 흑도에서 오산사걸 하면 알아줍니다.”
귀영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주한 자가 어찌 생겼는지 알아볼 수 있나?”
“그럼요!”
주풍호가 머리를 연신 끄덕였다.
무한이 허공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염 호위, 그를 데려오세요.”
그러자 대문이 열리고 염량이 기절하여 축 늘어진 사람을 질질 끌고 들어왔다.
“이자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두고 가시죠.”
염량이 대문을 닫고 나갔다.
끌려온 자를 본 주풍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 보니 바깥에 은신하여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용담호혈이었구나.’
귀영이 끌려온 자의 뺨을 후려쳤다.
“새꺄, 눈 떠!”
얻어맞은 자는 상인 차림을 한 서른 가량의 사내였다.
뺨을 얻어맞자 정신을 차렸다.
“응? 내가 왜?”
사내가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돌아봤다.
“이 새끼가, 눈깔을 굴려?”
귀영이 다시 뺨을 갈겼다.
“아이고.”
사내가 뺨을 감싸며 나뒹굴었다.
무한이 주풍호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맞나?”
“그런 것 같습니다.”
퍽!
귀영이 덩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아무 생각 없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같다는 건 또 뭐야?”
귀영이 주풍호 눈앞에서 칼을 흔들자 황급히 외쳤다.
“맞습니다. 제가 분명 봤습니다. 저 신발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얼굴은 기억 못 하는데 신발은 기억해? 뭔 소리야!”
주풍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객잔 방에서 의뢰를 받았는데 중간에 발을 쳐놔서 얼굴은 잘 못 봤습니다. 하지만 저 옷차림과 신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귀영이 상인 차림의 사내를 꿇어 앉혔다.
“이제 네가 말해봐. 너 때문에 둘이나 죽었어. 순순히 털어놓지 않으면 저 두 놈도 죽을 거야. 물론 너도 죽겠지.”
“무, 무슨 말씀인지…….”
쉬익!
사내의 머리카락이 잘려 흩어졌다.
“정신 못 차리지? 다음엔 목이야.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거야.”
무한은 궁지에 몰린 사내를 윽박지르는 귀영을 보며 내심 웃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이런 일에는 쓸 만하네.’
귀영의 재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