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손님을 두고 멀리 갈 수 없는 백의영이 담벼락 아래 멈춰 서더니 여인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손님을 모시고 있으니 더는 배웅하기 어렵다.”
무척 건조한 말투였다.
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 손님이 요즘 화제가 된 조 대인이라는 자죠?”
여인의 목소리가 고왔다.
그럼에도 백의영은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여인이 잠시 침묵하다 작심한 듯 고개를 들어 백의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왜 자꾸 거리를 두는 거죠?”
“상단 간의 경쟁은 늘 있어 왔던 거잖아요. 천하상단이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잖아요.”
백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내게 왜 이러는 거죠? 오늘은 반드시 답을 들어야겠어요.”
백의영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할 말이 없다.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냉정한 말에 여인은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백의영을 노려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백의영이 냉정하게 몸을 돌리는데 여인이 말했다.
“저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오라버니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괜히 엮이면 손해만 볼 거라고요. 그 말 해주러 온 거예요.”
백의영은 말없이 서 있자 여인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잘못될까 염려해서 온 것뿐이에요.”
백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이 백의영의 싸늘한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힘없이 돌아서 갔다.
백의영이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가 있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벌주로 석 잔을 마시겠습니다.”
백의영이 웃는 낯으로 말하고는 연달아 석 잔을 마셨다.
입은 웃는데 눈빛은 처연했다.
무한은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들었다.
지금 무한의 공력으로는 굳이 들으려 청력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저 여자가 천하상단의 막내 천소향이란 건가? 뜻밖이네. 집안끼리 원수가 됐는데도 백의영을 못 잊다니.’
오기 전 귀영을 시켜 백가상단에 대해 알아봤다.
서현을 기반으로 휘주 일대에서 손꼽히는 상단이었으나 천하상단과의 경쟁에서 패하여 몰락한 상단.
단주가 병석에 눕고 외아들인 백의영이 재기를 꿈꾸고 있으나 여의치 않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다.
그중에는 백가상단의 외아들 백의영과 천하상단의 막내이자 금지옥엽인 천소향 간에 혼담이 오갔다는 것도 있었다.
백의영이 침울해하니 정자에는 침묵만 흘렀다.
백의영은 연회를 즐길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다 귀영이 사기꾼이라는 확신이 굳어졌으니 무한이 전주라는 말도 믿기 어려웠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전주라니.’
그렇다고 자신이 주선한 자리를 바로 파할 수는 없었다.
악단이 연주를 하고 기녀들이 연신 술을 권하며 아양을 떨었으나 분위기는 썰렁했다.
어느 순간 무한이 귀영에게 말했다.
“조 대인, 이만 자리를 파하고 안에 들어가 차나 한 잔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 술과 음식이…….”
귀영이 말하다 무한의 싸늘한 눈과 마주쳤다.
귀영이 재빨리 몸을 돌려 백의영에게 말했다.
“백 공자께서 차를 주신다면 당연히 마셔야죠.”
백의영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일어섰다. 내키지 않았으나 초대한 사람의 본분은 다해야 했다.
세 사람은 별원 오붓한 다실에 앉았다.
기녀가 들어오려 하자 무한이 손을 저어 물렸다. 그리고 귀영에게 말했다.
“조 대인은 잠시 나가서 정원을 구경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하. 그러지요. 술과 안주가 많이 남았던데 저는 조금 더 마셔야겠습니다.”
귀영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백의영이 무한을 보았다.
이제 확실해진 것이다.
귀영은 거상(巨商)이 아니었고 무한은 전주가 아니라 수상한 자였다.
“내게 할 말이 있으시오?”
말하다 말고 백의영은 무한의 출신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술을 따르며 자연스럽게 출신내력에 대해 물어보려 했는데 공교롭게 그 순간 천소향이 왔던 것이다.
“조 대인의 전주시라던데 어느 상단에서 오셨는지요.”
“상단이 아닙니다.”
“……?”
무한이 일어나 예를 취했다.
“다시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천하방 검천부 심무한이라고 합니다.”
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의영이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천하방?’
백의영이 얼마나 급히 일어났는지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천하방이라니!’
놀라서 일어났다가 천하방이라는 의미를 되새기자 절로 무릎에 힘이 빠졌다.
백의영은 자기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괜찮으십니까?”
무한이 의아해하였다.
자신의 신분을 듣고 이리 놀라는 게 의외였다.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불쑥 왔으니 결례를 저지른 셈이군요.”
백의영은 말없이 무한을 노려보았다. 부릅뜬 두 눈에서 원독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도천부라고 했던가?’
천하상단과 경합을 벌이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백의영이 천하상단과 한판 경합을 벌이려 하는데 한 사람이 찾아왔다.
천하방 도천부에서 왔다는 그는 한마디만 하였다.
- 병석에 누운 아비의 전철을 밟을 생각인가? 아비의 목숨이 중하지 않은가?
백의영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고, 부친의 안위를 위해 천하상단과의 경쟁을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실수였다.
백의영은 은인자중하며 내실을 꾀했으나 천하상단은 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마지막 숨통까지 조여 오는 중이다.
죽더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붙었어야 했는데…… 서서히 고사하는 지경에 처한 지금 후회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도천부에 이어 검천부 사람이 오다니.
‘천하방이 끝을 보겠다는 거로구나.’
백의영이 처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될 대로 되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독하구나! 천하방!”
무한은 갑자기 백의영이 적대를 하자 당황했다.
“원하는 게 뭐냐? 백가상단이 정녕 문 닫기 바라는 거냐?”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오해?”
백의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하방이 천하상단을 내세워 백가상단을 쳐냈다는 걸 온 세상이 다 안다.”
백의영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숨통까지 끊겠다니. 정말 지독하구나.”
무한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자 백의영이 더욱 흥분했다.
“권불십년이라 했다. 천하방이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굴 것인지 두고 보겠다!”
무한이 백의영을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백 공자는 천하방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모양이군요.”
너무나 담담한 말투였다.
“천하방에는 백여 개 문파가 있지요. 마천으로부터 중원을 지키고자 동맹을 맺은 방파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냐?”
“마천이나 중원 무림의 분쟁에 함께 대응하는 것 외에는 각 문파는 독자적으로 행동하지요.”
“……?”
“천하방이 천하상단을 앞세워 뭔가를 한다는 건 천하방의 규율에 맞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나직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에 진정이 실려 있었다.
“문파의 독자성을 보장할 때 걸림돌이 된 것이 상계와의 관계입니다. 문파마다 어떤 식으로든 상계와 연관을 맺고 있지요. 상단 간의 경쟁에 개입하면 천하방 문파 간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기에 상계의 다툼에는 모든 문파가 개입하지 않기로 하였지요.”
“천하방 도…….”
백의영이 도천부를 거론하려다 입을 닫았다.
도천부에서 온 자의 경고가 다시 떠오른 것이다.
“돈 앞에서 그런 규칙이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오?”
무한이 차분히 설명하니 백의영도 흥분이 가라앉았다. 말투부터 달라졌다.
“믿든 말든 사실입니다.”
백의영이 무한을 주시했다.
말은 믿기지 않았으나 태도를 보면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백의영이 돌이켜 보니 이제까지 도천부 외에 천하방에서 상계에 개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랬었구나. 그런데 왜 도천부가 나섰단 말인가?’
답은 백의영도 잘 알고 있다. 그 역시 상인이다.
제아무리 천하방 방침이 그렇다고 한들 이익 앞에서 지킬 자가 몇이나 될까?
백의영이 여전히 경계의 빛을 띠며 무한에게 물었다.
“그럼 왜 신분을 속이고 접근한 겁니까?”
“백 형을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상대는 따로 있지요.”
무한이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것 같군요.”
백의영은 어리둥절했다.
‘공동의 적? 백가상단의 적은 천하상단이다. 천하방 검천부의 적이 천하상단일 리가 없잖나?’
무한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오래전 들은 소문이 떠올랐다.
‘검천부는 천하제일인의 어린 손자가 이어받았다고 했지. 눈앞의 이 사람이구나.’
천하제일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백의영도 소년 시절이었기에 어른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은 바에 불과한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백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동의 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백가상단과 천하상단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 일입니다. 지금은 처분만 바라는 패장 신세입니다.”
백의영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대로 백가의 문을 닫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무한의 시선과 어조는 담담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힘이 실려 있었다.
“오늘 조 대인을 보자고 한 게 활로를 찾기 위함이 아닙니까?”
백의영은 완전히 냉정을 되찾았다.
무한은 천하사패의 정점 검천부주다. 해코지하려면 수하를 보내면 된다.
그런 이가 신분을 감추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무한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래를 할 수 있겠습니까?”
“거래라니요?”
“천하상단이 검천부 사업을 위탁운영하고 있지요. 광산 몇 곳과 염전, 각지에 흩어진 점포들이죠. 이를 백가상단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뜻밖의 말에 백의영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검천부 사업을 백가상단에 맡기겠다는 말입니까?”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상단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검천부의 의사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백의영은 가슴이 뛰었다.
‘정말일까?’
너무 놀라운 제안이라 믿기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사업을 맡긴다?
당연히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잡고 싶었다.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건 백가상단이다.
백의영은 너무 앞서 나가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당황스럽군요.”
무한이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이 집은 차가 맛있군요. 천천히 생각을 해보시죠. 백가상단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실 텐데요. 천하상단이 어찌 나올지.”
백의영은 천하상단 둘째 천종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가상단을 짓밟는 데 앞장선 이가 천종해다.
사업을 하다 거래선을 바꾸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순순히 양도양수가 이뤄지는 경우가 드물다.
일반 상거래에서도 그런데 기세등등한 천하상단의 사업을 가져온다는 건 자칫 파산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천하상단은 중원 오대상단으로, 휘주 상계는 물론 중원을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세력이다.
천하방에서 뒷배를 봐주는 천하상단에 도전할 상단은 없었다.
검천부의 뜻이라 하나 천하상단에서 맡고 있던 위탁운영권을 받는 순간, 엄청난 보복을 받을 게 분명했다.
백의영이 이를 악물었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겨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