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61화 (61/250)

61화

그 시각.

천하전 방주 집무실.

무한은 기억의 한 조각과 마주하고 있었다.

팔 년 전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섰던 자리…….

그 자리에 다시 섰다.

굳게 닫힌 문을 보는 무한의 표정은 싸늘했다.

한겨울 쨍한 추위와도 같이 굳은 얼굴로 문을 노려보던 무한이 양손을 내밀어 미닫이문을 밀쳤다.

그새 무심해진 그의 눈에 낯익은, 그러나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 들어왔다.

기다란 구조는 익숙했으나 맞은편 단상에 놓인 책상과 양쪽 채광창의 장식, 줄줄이 걸린 등롱은 낯설었다.

무한의 시선이 그 낯선 분위기를 뚫고 맞은편 책상 너머로 향했다.

뭔가를 읽고 있는 모습은 같았으나 흘러나오는 기세는 역시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의 존재가 앉아 있었다.

도왕 고진.

전 중원에서 우러러보는 천하방의 일인자.

도왕은 구름 속의 용처럼 천하전에 칩거하고 있었다.

무한이 문을 열자 용이 꿈틀했다. 형형한 안광이 공간을 가르고 무한을 덮쳤다.

“……!”

화경의 고수가 뿜어내는 기운을 고스란히 받은 무한이 잠시 휘청였다.

순간, 기운이 싹 사라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들어오거라.”

천천히 걸어가 단상에서 일 장 거리에 선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도천부주를 찾아왔습니다.”

오른손을 들어 수염을 쓰다듬는 도왕의 눈빛에서 다시 한 번 형형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암중에 사람의 기세를 누르는 눈빛이었으나 방금 전처럼 강렬하지는 않았다.

무한은 천목투심술을 극성으로 발휘하여 도왕의 눈빛을 받아냈다.

“공식적으로 양위를 하지 않으셨더군요.”

“…….”

다시 침묵이 흐르고.

도왕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식을 뱉었다.

“그렇군. 양위를 하지 않았지…….”

그렇다. 그는 아직 도천부주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문파의 주인이 바뀌는 건 먼저 주인이 죽거나, 공식적으로 자리를 물려줄 때다.

도왕은 천하방주이자 도천부주다. 다만, 장남 고강후가 전면에 나서서 도천부를 관장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고강후를 도천부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복잡한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당사자에게 돌려드려야 할 물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한이 작은 목합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건넸다.

도왕이 말없이 목합을 열었다.

목합 안에는 고진의 신분패가 들어 있었다.

고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건 무슨 뜻이냐?”

도왕은 자신의 혈인(血印)이 찍힌 신분패를 보며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의 주인께 돌려드리는 겁니다.”

“이 신분패가 검천부에 있는 이유를 아느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천하사패가 의기투합하여 천하방을 세우고 마천과 대적했다고 알고 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그 안에는 속사정이 숨어 있다.

심양조는 도왕, 권왕과 겨뤄서 제압하고 천기자까지 포함하여 사천방을 세웠다.

혈인이 찍힌 신분패는 도왕과 권왕이 심양조를 따르겠다는 증표였다.

이후 사천방이 마천과의 전쟁에 선두에 서자 수많은 문파가 따르며 자연스레 천하방이 결성되었다.

자신의 피로 혈인을 찍은 신분패는 도왕이나 권왕에게는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간직하고 있는 게 좋을 텐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연이 다하였는데 한낱 신물로 어찌 다한 인연을 붙잡겠습니까?”

“연이 다하였다……?”

“그 또한 별 뜻 아닙니다. 선대의 연을 정리하고 새로운 연을 짓고자 함입니다.”

혈인이 찍힌 자신의 신분패를 바라보는 도왕의 눈빛이 사뭇 복잡했다.

“알겠다.”

묵직한 한마디를 흘리며 직접 목합을 닫고는 옆으로 밀쳤다.

그러고는 무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천하방 문파를 예방했다고 들었다. 무엇을 봤느냐?”

뜻밖의 물음에 무한이 흠칫했다.

잠시 눈빛을 내렸던 무한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인가를 보고자 함이 아니라, 찾고자 예방을 한 것입니다.”

“……!”

도왕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작은 의문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무한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만났던 문파의 수장들의 면면이 스쳐갔다.

천목투심술로 속내를 읽어낼 수 있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전혀 알 수가 없었던 이도 있었다.

확실한 건 적어도 절반에 이르는 문파가 도천부와 밀접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무한은 도왕의 눈빛에 담긴 의문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그리고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무한은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천하방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

도왕은 당대 최고의 고수.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공간이 도왕의 심기에 따라 서서히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마천이…… 흑천이…… 과연 천하방이 존재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순간, 의문의 소용돌이가 사라지고 공간은 텅 비었다.

“…….”

누구나 그렇다고 대답할 아주 당연한 물음이었으나 도왕은 대답할 수 없었다.

천하방주 앞에서 천하방의 당위성을 묻다니…….

이 자리에 누가 있었다면 무한이 미쳤다고 여겼을 것이다.

도왕은 따지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답은 찾았느냐?”

“찾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담담한 무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도왕은 자기도 모르게 무한이 집무실로 들어오던 순간이 떠올랐다.

미닫이문이 열렸을 때 도왕은 심양조를 보았다.

그 순간, 심기가 요동쳤고 무형의 기를 발산했다.

무한이 받았던 강렬한 기세가 그것이었고, 무한의 몸이 흔들리는 걸 본 순간 황급히 기세를 거뒀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 내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오래된 숙원.

‘아직도…… 그를 떨치지 못한 것인가…….’

천하제일인.

그의 뒤를 이어 천하방주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도왕을 천하제일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천하제일인의 자리는 심양조와 함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를 넘기 위해 평생을 살았는데…….’

살아 있을 때는 결코 넘을 수 없었던 거인.

심양조 사후 부단히 무공 수련에 매달린 이유는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성을 이어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지 그를 뛰어넘고자 한 것뿐.

그리고 어느 순간 적어도 동수를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죽어 멈춰선 그조차 넘지 못하다니…….’

무한에게서 심양조를 봤다는 건…… 그가 아직 심양조를 뛰어넘지 못했음이리라.

이인자로 살아온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는 떨치지 못하는 악몽처럼 달라붙어 있다.

이를 의식한 도왕은 가슴 한구석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어 무한을 향해 시선을 돌리다 흠칫했다.

무한의 눈에 번뜩이는 짙은 묵기.

“……!”

안력을 추슬러 다시 한 번 보는 순간 묵기는 사라졌다.

도왕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패배를 상징하는 혈인패를 보는 순간 심기가 흐트러진 것이리라.

도왕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답을…… 기다리마.”

그러면서 나가라고 손짓했다.

무한이 예를 올리고 돌아서 나가는데, 나지막한 도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 적이 아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흘리듯 덧붙인 한마디.

순간, 무한이 멈춰 섰다가 이내 걸어 나갔다.

***

강유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

늘 무심했던 그답지 않게 무척 심각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도천부와 패천부에 혈인패를 돌려주었다고 들었다.”

무한은 강유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았다.

“역시 기천부의 이목은 놀랍군요.”

도왕이나 권왕은 혈인패를 돌려받은 걸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유는 그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자상하지는 못했지만 한때 후견인이었다. 그런데 나와 상의 한마디 없이 그럴 수 있느냐?”

“잘못된 게 있습니까?”

“혈인패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느냐?”

“오십 년 전 도왕과 천기자 어르신 그리고 권왕께서 자신의 신분패에 혈인을 찍어 할아버지께 드렸지요. 그 결과가 사천방이었고 후일 천하방이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 것 같으냐?”

“혈인패는 나머지 삼패가 검천부를 따르겠다는 맹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돌려주다니!”

강유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지금까지 네가 무사했던 것도 혈인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혈인패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뭐라?”

“이미 수십 년 전 일입니다. 당시 대파와 세가의 장문이나 수령들이 증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혈인패의 맹세는 이미 잊힌 옛이야기입니다.”

“허어.”

강유가 기막히다는 듯 큰소리로 탄식했다.

“네가 이렇게 경솔할 줄은 몰랐다. 도왕과 권왕을 어찌 생각하고 그랬단 말이냐. 그분들이 옛 맹세를 잊었을 것이라 여겼더냐?”

무한은 담담히 말했다.

“그분들이야 잊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후대는 다릅니다. 혈인패는 도왕이나 권왕의 이름으로 낙인된 것이니까요.”

강유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맞는 말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그가 보기에 무한은 혈인패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여겼다.

혈인패를 내세워 뭔가를 요구한다면 도왕이나 권왕도 따를 수밖에 없다.

도왕과 권왕을 움직인다면 도천부와 패천부 사람들도 따를 수밖에 없다.

강유가 보기에 무한은 자신이 쥔 가장 좋은 패를 버린 셈이다.

무한이 강유와 시선을 담담하게 말했다.

“혈인패로 요구를 한다면 뭔가 얻어낼 수야 있겠지요. 그런데 그 요구를 하면 저 역시 혈인패의 의미를 새기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혈인패는 동맹의 의미잖습니까?”

강유가 흠칫했다.

무한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면 기천부의 혈인패는 왜 돌려주지 않는 거지?”

“기천부로도 보냈습니다.”

“……?”

“이러실까봐 소소에게 보냈습니다. 오늘쯤 숙부께 전해달라고 했으니 돌아가시면 드릴 겁니다.”

강유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탄식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무한이 기천부를 도천부나 패천부와는 달리 생각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동안 내가 소홀했다고 여기는 것인가?’

드러난 바로는 무한이 그렇게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다.

무한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요즘, 강유가 읽힌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한두 달 바깥세상을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강유는 어이없어 했다.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무한에게는 분명 그리 읽혔다.

“검천부주에 공식 취임했다. 천하방 대소사에 참여하여 검천부의 위상을 세워야 하는 게 우선인데 대체 어디를 간다는 게냐?”

“천하상단을 둘러보려 합니다.”

“…….”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강유가 잠시 생각하곤 말했다.

“상인들은 어떤 의미에선 무림인들보다 더 지독하다. 이익 앞에서는 부모형제도 모르는 인간도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강유가 일어섰다.

“한때 천하사패를 다시 정해야 한다는 말이 은근히 돌았다. 검천부를 제명하고 다른 문파를 올리자는 것이지. 네가 각 파를 예방한 후 잠시 누그러들었을 뿐, 검천부가 천하방 대소사를 외면한다면 다시 나올 것이다.”

“…….”

“외성 문파 가운데 천하사패의 자리를 노리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늘 조심해야 한다.”

강유가 돌아간 뒤 무한은 생각에 잠겼다.

강유는…… 너무 세심하다.

그래서 세세한 면까지 조율하려 든다.

얽힌 실타래는.

‘끊어내야 할 때도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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