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기천부는 한적했다.
소소가 중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셔.”
무한은 소소를 따라 내전으로 들어갔다.
강유가 기다리고 있다가 차를 내주며 말했다.
“검천부주의 작은 성의가 천하방 내에 화제더군. 인심을 얻는 건 좋은 일이나……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
무한은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래, 기천부에는 어떤 성의를 보일 텐가.”
강유답지 않게 약간의 농이 섞인 말에 소소가 끼어들었다.
“아버지, 검천부에 뭐가 남아 있겠어요. 다 퍼줬으니 알거지나 마찬가지라고요. 오히려 우리가 줘야 할 판이에요.”
소소는 형소와 함께 가끔 무한을 찾았기에 검천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무한이 웃으며 소소에게 말했다.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야 없지.”
무한이 품에서 죽간을 꺼내 강유에게 건넸다.
강유가 죽간을 펼쳐 보고는 크게 놀랐다.
“이건 월령환의 제조법 아닌가?”
“어쩐 일인지 검천부 약재창고에 있었습니다.”
강유가 죽간을 펼쳐 읽었다.
“으음. 그랬군. 월정수와 칠음초가 빠졌었군. 그래서 약효가 제대로 나지 못했구나.”
기천부의 무공은 음유한 기운을 바탕으로 한다. 천기자가 월령환을 제조한 것도 기천부의 무공을 증폭시키기 위함이었다.
천기자가 돌연 치매에 걸린 후 강유는 월령환을 제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약효를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했다.
“고맙다. 그런데 이건 원래 기천부의 물건이니 예물이라 하기 그런데?”
강유가 농담조로 말을 이어가니 무한은 어색했다.
“오랫동안 살펴주신 은혜는 차차 갚기로 하겠습니다.”
강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소에게 말했다.
“너는 잠시 나가 있거라.”
소소가 입을 삐죽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강유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네가 큰 강을 건너기로 결심했으니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경천십이식을 대성하기까지는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
“암중의 적은 천하제일인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강유가 물끄러미 무한을 보다 시선을 내리며 찻잔을 쥐었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심 백부의 사인은 자연사다.”
“…….”
무한이 대답을 하지 않자 강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소매에서 작은 옥갑을 꺼냈다.
옥갑에는 기천이라 새겨져 있었다.
무한은 월령환을 담은 옥갑을 봤기에 기천부의 환약이라는 걸 알았다.
강유가 옥갑을 건네자 무한이 옥갑을 뒤집어 바닥을 보았다.
천기조양라는 글자가 따로 새겨져 있었다.
약명을 적어놓은 것이다.
“천기조양환이라 한다. 아버님께서 남기신 것이다. 네가 무탈하게 장성한다면 건네라 하셨다.”
생전에 심양조와 가장 가까웠던 이가 천기자 강조였다.
‘천기환과 또 다른 것인가?’
기천부의 천기환은 내공 증진을 도와주는 영약으로 소문나 있다. 명칭으로 볼 때 천기조양환은 천기환에 양강의 기운을 더한 게 분명했다.
무한은 경천심결로 얻은 기운을 끌어 단전을 키워가는 중이다. 전신에 쌓인 기운을 끌어들이는 것이라 남보다 배는 빨리 공력을 쌓고 있다.
“천기조양환은 경천승운공을 익힌 자를 위해 특별히 제조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허투루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셨으니 새겨들어야 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무한이 목합을 받아 챙기자 강유가 말했다.
“도천부에서 형제간의 권력암투가 노골화하고 있다.”
무한으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가 알기로 도천부 삼형제는 우애가 깊고 똘똘 뭉쳐 지낸다고 들었다.
강유가 조소를 흘렸다.
“그들은 도천부가 천하방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도천부 삼형제는 권왕을 너무 만만히 보고 있다.”
무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권왕은 겉모습과 달리 심계가 깊다.”
“…….”
“권왕이 스스로를 낮추자 도천부 삼형제는 외부에는 적이 없다 생각하고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그게 권왕의 의도라는 거로군요.”
무한은 권왕의 얼굴을 떠올렸다.
패도를 추구하는 무인이라고만 여겼는데…… 아니었나?
“권력의 속성이란 게 원래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지. 나는 심 백부의 생각은 이상향에 불과하다고 본다.”
심양조는 천하방 각 문파가 서로 대등하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다.
“천하방은…… 외양으로는 아직까지 심 백부의 원칙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도천부의 세상이다.”
무한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네게 도천부의 상황을 전하는 이유를 아느냐?”
“서둘지 말라는 뜻 아닙니까?”
강유가 희미하게 웃었다.
“알면 됐다. 상대가 자중지란으로 빠져드는데 괜히 나서서 봉합시킬 이유가 없지.”
다음 날.
무한은 무흔에게 목합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걸 소소에게 전해줘요.”
그리고 패천부를 찾았다.
권왕 대신 패천대주 형일천이 맞아주었다.
‘형소가 나왔을 법한데.’
보이지 않았다.
“검천부주가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오셨군.”
형일천이 예를 차리고 빈청으로 안내했다.
“권왕께서 폐관 중이라 내가 대신 부주를 맞이한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네.”
패천대주 형일천은 권왕과 의형제 사이로, 따지고 보면 천하사패와도 무관하지 않은 사이였다. 그가 이 자리에서 말을 놓아도 허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워낙 늦은 나이에 혼인을 하여 형소를 얻었기에 아버지라기보다는 할아버지뻘 되어 보였다.
시비가 들어와 차를 수발했다.
“부주가 소아 그 녀석하고 친분이 깊다고 들었네.”
“천무관 삼재검수 두 사람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진정한 동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형소와 삼재검수 동문이라는 무한의 말에 형일천의 안색이 굳었다.
그는 무학의 천재로 검과 도, 창 등 십팔반병기에 능하고 권술과 퇴술에도 뛰어나 무왕으로 불린다.
권왕과의 친분이 아니었다면 능히 천하오패를 형성할 수 있는 자로, 천하방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
그는 뒤늦게 얻은 아들 형소가 무공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체구마저 작아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무관에 입관하더니 삼재검수가 되어 천하방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형일천은 앞에서 누가 삼재검수라는 말만 해도 커다란 주먹으로 턱을 부숴버렸다.
‘삼재검수로 불리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형일천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무림에서는 실력이 최우선이네. 강자가 지배하고 약자는 따라야 하지. 부주가 검천부를 이끌어 나가려면 삼재검수라는 별호부터 떼어내야 할 것이네.”
“별호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흥! 그리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검천부의 앞날이 우려되는군.”
무한은 대답하지 않고 가져온 목합을 건넸다.
“권왕께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이게 뭔가?”
“권왕께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부주가 직접 열어봐야 한다는 뜻이로군.”
형일천이 목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주 볼 것이니 오늘은 이만 하기로 하지.”
형일천은 무한을 보자 아들이 삼재검수라는 사실이 자꾸 떠올라 불쾌했다.
‘이 양반, 정말 속을 감추지 못하는군.’
무한은 가볍게 웃으며 예를 취하곤 패천부를 나왔다.
형일천은 목합을 들고 패천부 깊숙한 비원으로 갔다.
권왕은 비원에 있는 개인연무장에 좌정하고 있었다.
형일천이 들어서자 권왕이 눈을 떴다.
고리눈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심무한이 전해달라더군요.”
형일천이 목합을 내밀자 권왕이 받아서 열었다.
“……!”
목합에는 나무로 만든 신분패가 있었다.
복호명.
권왕의 이름이 적힌 신분패였다.
형일천이 의아해하였다.
“이건 형님의 신분패 아닙니까?”
권왕이 서늘한 눈으로 신분패를 내려다보다 집어 들었다.
신분패에는 혈인이 찍혀 있었다. 권왕 자신이 직접 찍은 것이다.
권왕이 신분패를 들어 혈인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다른 말은 없던가?”
“보시면 아실 거라고만 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권왕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심 대형의 손자로구나. 하기는 그 피가 어디 가겠나?”
권왕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심양조다.
“그 녀석하고 얼굴 붉힐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신분패를 돌려준 걸 보면 스스로 알아서 처신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기를 바라야지…….”
권왕이 말하다 말고 끊었다.
그의 눈빛이 서늘하다.
무한이 패천부를 예방한 다음 날, 천하방의 이목이 도천부로 쏠렸다.
고강후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무한을 기다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심사는 복잡했다.
‘귀영을 내보내다니…… 눈치챈 건가.’
귀영에게 문파 수장들과의 대화를 알아오라고 했는데 무한이 휘주로 보내버렸다.
‘역시 풀은 자라기 전에 뽑았어야 했어.’
열 살 어린아이가 홀로 이뤄봐야 뭘 할 수 있을까 싶어 귀영을 붙이고 이따금 동정만 보고 받았는데, 그게 실수였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이렇듯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천하방의 이목을 모을 줄이야.
“형님, 녀석이 뭘 가져올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고강후의 집무실에는 둘째 고성후와 막내 고동후가 앉아 있었다.
오지 않아도 될 놈들이 굳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참 희한한 놈이지 않습니까? 무공서를 뿌리다니……. 설마 우리에게도 도법서를 가져올까요?”
고성후도 섭선을 살살 부치며 고강후를 향해 말했다.
“상당히 많은 문파가 이 일로 검천부에 호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흥! 그래봐야 잠시일 뿐이지요. 줄을 세우는 건 결국 힘 아니겠습니까?”
고동후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으나 고성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인심이란 건…… 늘 흘러 다닌다는 게 문제지.”
고동후가 딴죽을 거는 고성후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다 인상을 썼다.
“그런데 왜 이리 굼뜬 겁니까? 출발했다고 들은 지 꽤 된 것 같은데.”
고동후가 투덜거리더니 바깥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검천부주가 어디까지 왔나?”
“알아보겠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떨떠름한 표정으로 총관이 들어왔다.
“검천부주가 방주께 갔답니다.”
“뭐? 아버님께 갔다고?”
고동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렇답니다.”
총관이 고강후의 눈치를 살폈다.
고강후의 미간이 우그러들었고, 고성후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강후를 바라봤다.
“형님, 이거 무슨 상황입니까? 도천부의 주인을…….”
고동후가 뇌까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을 멈췄다. 얼굴 표정이 묘하다.
무한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고강후가 도천부의 주인 행세를 하지만 공식적으로 승계 받은 게 아니다.
고동후보다 먼저 무슨 상황인지 알아챈 고성후가 탄식을 하며 고강후에게 말했다.
“어린놈이 형님을 무시하는군요.”
고강후의 눈에 잠시 살기가 스쳤으나 이내 사라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제법 영민한 놈이군. 놈이 이리 왔다면 내가 혼을 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성후와 고동후에게 손짓을 했다.
“너희는 가봐라.”
집무실을 나가는 고성후와 고동후를 보는 고강후의 눈빛이 흉흉했다.
문을 닫고 나온 고성후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한의 행동으로 천하방 모든 사람이 알게 됐다.
도천부의 주인은 아직 도왕이라고.
‘이거…… 의외의 소득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