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고강후가 귀영을 호출했다.
귀영이 무한의 개인 호위로 들어간 후 직접 부르기는 처음이다.
귀영은 크게 당황했다.
지난번 난주에서 무한이 하오문에게 청부를 의뢰한 걸 보고한 이후 따로 보고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이중첩자 노릇이 발각된 건가?’
고강후가 의심할 만한 게 있나 생각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발각된 건 아닐 거야. 만일 알아차렸다면 자객을 보냈겠지.’
귀영이 생각을 정리하고 고강후를 찾았다.
귀영이 들어서자 고강후는 집무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 새끼는 아직도 저러는구나.’
고강후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이를 잘 아는 귀영이지만 켕기는 게 있어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고강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요즘 그놈이 각 문파를 들쑤시고 다닌다며?”
귀영은 고강후의 첫 마디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식적으로 검천부주의 위에 올랐음을 알리고자 예방을 다니고 있습니다.”
“찾아가는 문파에 예물을 준다며? 대체 뭘 주기에 온통 그놈 이야기만 하는 거냐?”
고강후의 미간이 잔뜩 우그러들었다.
무한이 화제가 되는 것도 모자라서 도천부와 친한 문파까지 무한을 반기는 게 못마땅한 것이다.
‘새꺄, 귀한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을 마다할 사람은 없잖아.’
귀영이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단단히 포장을 하였기에 열어볼 수가 없습니다.”
쾅!
고강후가 책상을 내리쳤다.
“뭐라? 그게 지금 할 소리냐? 개인 호위도 모르면 대체 누가 안다는 말이냐?”
“죄송합니다.”
귀영이 넙죽 엎드렸다.
“너를 보낸 이유가 무엇이더냐. 그 녀석 속곳이 무슨 색인지까지 샅샅이 보고하라 이르지 않았더냐? 그 녀석이 각 문파에 무공비급이며 영단을 주고 다닌다는데 감시한다는 놈이 그걸 몰라?”
귀영은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웃기만 할 뿐이다.
“놈이 문파의 수장들과 무슨 대화를 하더냐?”
“잘은 모르지만…… 안부를 묻고, 앞으로 잘 지내자 뭐 그런 으레 할 법한 요식적인 말들 아니겠습니까?”
고강후의 눈에 살기가 스치자 귀영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부주와 문주가 독대하는 자리까지 제가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
고강후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귀한 예물을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열어볼까.
실제로 지금까지 각 파에 들어간 예물이 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문파의 입장에서는 예민한 사안이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아내서 상세히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귀영이 죽상을 하고 돌아와 보고하자 무한이 피식, 웃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따로 할 일을 드리죠.”
“할 일이요?”
“휘주로 가세요.”
“예?”
“천하상단의 정황을 파악해서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천하상단의 본단이 휘주에 있다.
“아하, 저를 아예 치워버리실 생각이군요?”
귀영이 무릎을 탁, 쳤다.
“여비는 유아에게 말해놓지요.”
귀영이 일어나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색을 하고 무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주!”
두 눈에 물기까지 어려 있는 모습에 무한이 어리둥절해하였다.
귀영은 바로 몸을 돌려 나갔다.
‘왜 저러지?’
바깥으로 나온 귀영이 밤하늘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어린놈이 대범하기도 하지. 나를 뭘 믿고…….”
저 먼 휘주까지 보낸단 말이냐.
그대로 도주해버리면 어쩌려고.
‘아무래도 내가 옆에서 지켜야겠어. 똑똑한 척 해도 알고 보면 허당이라니까.’
***
무한의 문파 예방은 나날이 화제를 모았다.
작은 선물이라는 무한의 예물은 매번 초미의 관심사가 됐고, 이를 알아맞히느라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무한이 문파를 찾는 예방 길에 나와서 지켜보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한은 항상 정중한 표정으로 문파를 찾았다.
오후 첫 방문으로 초죽문을 찾았다가 나온 무한이 내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순서는 고각장원입니다.”
염량이 반대편 길을 가리켰다.
귀영이 휘주로 떠난 뒤 검천사위가 본격적으로 호위를 맡았다.
염량은 검천사위의 맏형이다.
“아뇨. 이 길이 맞습니다.”
무한이 계속 앞으로 가자 염량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이쪽에는 문파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무한은 내성 벽에 있는 작은 암문 쪽으로 걸어갔다.
암문은 두 사람의 수문무사가 지키고 있었다.
무한이 그중 한 수문무사 앞에 섰다.
수문무사가 앞에 선 무한을 보았다. 무척이나 냉막한 표정의 무사는 눈매가 날카로웠다.
무한이 포권을 하였다.
“일선문 곽 장문이시지요?”
“……?”
수문무사 곽우는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무한을 보고 당황하여 냉막한 표정까지 사라졌다.
“검천부 심무한입니다.”
염량을 비롯한 검천사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한과 곽우를 번갈아 보았다.
이윽고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곽우가 입을 열었다.
“이미 멸문한 문파요. 장문이라고 할 것도 없소.”
냉랭한 대답이었다.
“한 분이라도 남았다면 멸문이 아니지요.”
“일선문의 절기가 끊겼소. 그런데 무슨 문파가 남아 있다는 말이오.”
곽우가 대답하는데 목소리에 회한과 원망이 어려 있다.
일선문은 삼십 년 전 마천과의 접전에서 장문인을 비롯한 전 문도가 전멸했다.
중요한 전투에서 일선문이 혈로를 뚫고 마천의 고수를 해치운 덕분에 천하방이 대승을 거뒀다.
마천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선문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가솔은 물론이고 전각까지 모두 불태워버렸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이든 문도가 문을 이어받았으나 대부분의 절기가 소실되고 말았다.
천하방에서는 일선문의 희생을 감안하여 그를 문주로 대우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내성 문지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지기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고아를 보고 데려와 제자를 삼아 자신이 아는 바를 가르쳤는데, 그가 바로 곽우였다.
곽우는 사부가 죽자 뒤를 이어 내성의 문지기를 해왔다.
“문파로 대우했다면 사부께서 어찌 문지기만 하다 세상을 떠났겠소.”
곽우의 말에 뼈가 담겼다.
무한이 검천사위 막내 문역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문역기가 들고 온 보따리를 건넸다.
“예물입니다.”
무한이 보따리를 곽우에게 내밀었다.
곽우는 여전히 냉막한 얼굴로 보따리를 쳐다볼 뿐 받지 않았다.
“일선문의 절기가 끊겼다고 했습니까? 검천부 좌호법께서 과거 일선문과 함께 싸웠더군요. 좌호법은 당시 일선문 고수와 친분이 있었고, 무공을 교류한 바가 있었답니다. 이 책은 좌호법이 당시 들었던 일선문의 무공입니다. 남아 있는 무공을 참고로 익히면 일선문의 절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
무한의 말에 곽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곽우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보따리를 받아 풀었다.
보따리에는 책자가 세 권 담겨 있었다.
“일선문의 도법은 장강 줄기처럼 끊이지 않고 유려하게 이어지는 게 특징이라고 하더군요.”
곽우의 눈에 격동의 빛이 어렸다.
‘사부!’
자신에게 무공을 전수하면서 제대로 된 무공이 아니라고 미안해하던 사부의 얼굴이 스쳐갔다.
곽우가 보따리를 품에 넣고 정중하게 포권을 하였다.
“일선문 곽우, 돌아가신 사부를 대신하여 감사드리오.”
“이건 일선문의 재건을 바라는 분이 전해달라는 겁니다.”
무한이 품에서 전표를 담은 봉투를 꺼내 곽우에게 건넸다.
“돈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곽우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무한이 곽우의 손을 잡고 봉투를 쥐여 주었다.
“곽 장문께 드리는 게 아닙니다.”
“……?”
“마천과의 싸움에서 희생된 일선문의 영령에게 드리는 겁니다.”
“……!”
무한이 예를 취하고 돌아서 가는데, 곽우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예를 취했다.
무한이 일선문 곽우를 찾은 사실은 금세 퍼졌다.
다음 차례라고 여기고 기다리다 지친 고각장원에서 무한을 마중 나오다 곽우를 찾아간 걸 본 것이다.
“멸문지경의 문파까지 예우하다니.”
“고작 문지기인데 일문의 문주로 예우했다고 하더군.”
“이거 참, 부끄럽군. 일선문이 과거에 큰 희생을 치렀는데 잊고 있었다니.”
“이제라도 제대로 예우해야 하지 않겠나?”
무한의 작은 행동이 뜻하지 않게 화제를 모았고, 각 문파에서 앞다퉈 천하전에 건의를 하였다.
천하방은 외성의 작은 전각을 곽우에게 내주고 일선문의 재기를 지원했다.
***
“후우…….”
유아의 한숨이 깊었다.
“왜 그래?”
“요즘 부주께서 너무 돈을 많이 쓰세요.”
거침없는 유아의 직격.
무한에게 유일하게 할 말 다할 수 있는 유아만 가능한 일이다.
“부주 재산이니 제가 뭐랄 건 없는데요. 지금 재정이 너무 빠듯해요.”
“아직은…… 버틸 만하잖아?”
“그렇게 느긋한 상황이 아니라고요!”
유아가 울상을 지었다.
무한이 거처로 가더니 커다란 목합을 들고 왔다.
“열어 봐.”
“이게 뭔가요? 헉!”
목합을 받아 열어본 유아가 숨을 들이켰다.
주먹 만한 야명주가 셋이나 되었다. 빛이 퍼져 온방이 환해졌다.
“얼마짜리 같아?”
“세상에! 이렇게 큰 야명주라니!”
유아는 기뻐했고 무한은 속이 쓰렸다.
지하의 비밀연공실 벽에 있는 야명주 가운데 세 개를 빼온 것이다.
“이만한 크기면 하나에 은 이십만 냥은 충분히 받겠는데요?”
무한은 야명주를 유아에게 건네주었다.
“소문 안 나게 매각해서 자금을 확보해. 앞으로도 돈 쓸 일이 많을 테니까.”
무한이 입이 쫙 벌어진 유아의 등을 토닥여주고 나갔다.
***
무한의 문파 예방이 끝났다.
각 문파는 성향에 따라 천하사패 중 한 곳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무한은 도천부나 패천부와 친한 문파도 똑같이 찾았다.
“부주께서 수고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검천부에 대한 천하방 각 파의 호감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좌호법 담철조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두 분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한이 담철조와 공곤을 향해 말했다.
“천하방 소속이면서도 방에 파견을 보내지 않은 문파들을 순회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문파는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천하방에 이름을 올리고도 문파 사정 때문에 본방에 지부를 설치하지 못한 문파도 있다.
“지부조차 설립 못 한 곳들은 대부분이 유명무실한 문파입니다.”
“그래도 천하방 형제들이죠.”
“사방에 흩어져 있을 텐데.”
담철조와 공곤이 난감해 했다.
“일 년을 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나눠서 한 바퀴 돌아 주십시오. 문파에 보낼 예물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이미 무한은 군사부에 들어간 강소소를 통해 각파의 사정을 알아봐 두었다.
역시 필요한 무공이나 약, 자금 등을 건넬 생각이었다.
“그동안 검천부가 빌 텐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후원에 계시는 다섯 분이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저도 당분간 휘주를 다녀올 생각입니다.”
“천하상단을 찾으실 생각이시군요.”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천부 사업을 꽤 말아먹었던데, 소화가 잘 되는지 물어봐야겠습니다.”
“하하하.”
무한의 농담에 담철조와 공곤이 크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부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시원스레 대답하자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천하사패를 예방할 겁니다.”
무한은 그렇게 검천사위와 함께 기천부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담철조가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대 이상이야.”
천하방으로 무한을 데려오던 날이 생각난 것이다.
공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의 새끼는 역시 범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