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며칠 전.
“그들은 일류다. 실전의 달인들이고. 나보다 나은데 어떻게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냐?”
무한이 신검무적대 훈련을 부탁하자 하기주가 고개를 저었다.
“고수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교관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천하제일인이었지만 사숙을 가르치는 데는 실패하셨지요.”
“나 역시 검사이지, 사실 교관 재목은 아니다.”
“경천십이식을 받은 순간 한 가족입니다. 사숙이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던 하기주가 결국 받아들여 이 자리에 섰다.
막상 신검무적대 앞에 선 하기주는 마음이 무거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 년! 일 년 동안 벽을 넘으세요. 투자는 아끼지 않겠습니다.”
무한이 신검무적대를 향해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신검무적대가 동시에 합창하듯 대답했다.
무한은 그들에게 일류에서 절정으로 올라설 것을 주문했고, 신검무적대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노라고 약조했다.
다음 날부터 무한의 천하방 문파 예방이 시작됐다.
미리 방문첩을 보내고 문주가 있든 없든 찾아갔다.
***
“하하. 검천부주께서 오신다는데 어찌 본문에 앉아 부주를 헛걸음 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예방한 문파인 혼원문.
혼원문주 홍주해가 미리 나와 있었다.
혼원문은 멀리 절강에 있는 문파다.
“절강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밤길을 도와 달려 왔네. 하하하.”
귀밑머리가 허연 혼원문주가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무한을 정중히 맞았다.
무한이 일일이 문파를 찾아 예방을 한다는 소식이 퍼져가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 더해…… 무한이 가지고 간 예물이 날로 화제를 더했다.
작은 성의라며 대수롭지 않게 내민 예물이 각파에 유용한 심법이나 무공이었다.
무한은 검천부 심양조의 서재에 있는 무공서를 꿰뚫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여다봤기에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무공이 들어 있다.
그중에는 천하방에 가입한 문파의 내공과 무공 특성에 대해 심양조가 남긴 기록이 있었다.
심양조는 천하방의 전력을 높이고자 각 파의 무공을 연구해왔던 것이다.
무한은 이를 바탕으로 각파에 도움이 될 만한 심법이나 무공서를 예물로 가져갔다.
당연히…… 문파마다 무한의 예방을 고대했다.
무한의 예물이 문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그 문파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예물을 받은 문파들이 입을 딱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밀히 퍼지는 소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검천부주 덕분에 문파의 오랜 숙원이 해결되었다는군.’
‘우리 파의 절기가 지닌 약점을 보완해주었다더라고.’
각파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로 인해 무한의 예방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무한이 예상했던 대로, 며칠 가지 않아 각파의 문주들이 천하방으로 달려와서 무한을 맞이했다.
무한이 정확히 하루에 한두 문파씩 순서대로 예방하고 있으니 언제쯤 오리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다.
혼원문주 역시 수천 리를 달려 하루 전 도착하여 무한을 기다렸다.
“검천부주로 취임하여 선배들께 인사드리고자 이리 왔습니다. 선배들께서 지켜봐주신 덕분에 검천부가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홍주해는 흐뭇한 표정으로 마주 예를 취했다.
‘번듯하게 자랐어. 심 방주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흐뭇해 하셨을지.’
홍주해는 어린 시절 정마대전에서 심양조와 함께 싸웠고, 죽을 뻔한 위기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가 살아남아 혼원문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심양조 덕분이랄 수 있다.
“무슨 말씀을! 본인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돌아가신 심 전방주 덕분이라네. 어서 들어오시게.”
홍주해가 빈청으로 무한을 안내했다.
무한이 따라온 하인에게 손짓을 하자 하인이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작은 성의입니다.”
무한이 보따리를 홍주해에게 건넸다.
“심 부주의 예물이 천하방 내에서 화제라네. 사양하지 않고 받겠네.”
홍주해가 시원시원하게 말하고 보따리를 그 자리에서 풀었다.
“혼천무극도해?”
홍주해는 처음 보는 책이었다.
“혼원문은 장법이 일절이라고 들었습니다. 장법은 내기 운용이 관건이니 이에 유용할 듯하여 가져왔습니다.”
홍주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혼천무극도해를 펼쳐 훑어보다 벌떡 일어났다.
‘이걸 연구하면 혼원장법의 위력을 한층 배가할 수 있겠구나!’
그는 혼천무극도해의 가치를 알아보곤 자기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다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부랴부랴 무한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혼원문을 대신하여 감사드리네.”
무한이 일어나 마주 포권했다.
“도움이 된다면 저도 기쁠 따름입니다.”
“이리 귀한 예물을 받았는데 가만있을 수가 없지.”
홍주해가 자신이 준비한 답례를 가져오라 이르는데 무한이 말렸다.
“아닙니다. 제가 작은 성의를 보인 건 혼원문의 힘이 강해지면 천하방에 그만큼 보탬이 되기 때문입니다. 답례를 받으면 다른 문파에 그만큼 부담이 됩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답례조차 받지 않는다더니 정말이구나.’
무한은 찾아간 문파에서 답례로 금품이나 귀한 물건을 내줘도 받지 않았다.
“검천부 젊은 부주의 마음씀씀이가 이리 넓고 호쾌하니 천하방의 앞날이 더욱 창창할 것이네.”
홍주해가 감동하여 다시 한 번 정중하게 포권했다.
‘천하방에 새로운 바람이 불겠구나.’
홍주해는 천하방 문파 간 서열다툼과 방내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본거지에 은둔한 지 몇 년 됐다.
심지어 천하방 탈퇴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무한을 만나고는 생각을 바꿨다.
“검천부가 하는 일에 혼원문은 전력을 다해 협조할 것이네.”
“제가 아직 어려서 방의 일을 맡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검천부를 꾸려나가기 바쁜 형편이지요.”
“하하하. 겸손하시군. 검천부는 천하방의 심장이네. 그 심장이 다시 뛰는 걸 보니 이 늙은이의 가슴도 뜨거워지는 것 같군.”
혼원문을 나선 무한은 아래쪽 장원으로 갔다.
숭양검문의 장원이었다.
하인이 미리 기별하였기에 역시 숭양검문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열 명의 검수가 도열한 앞에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헌앙한 모습이 젊은 영웅의 면모를 갖췄다.
무한이 다가가자 청년이 먼저 예를 취했다.
“숭양검문 시천호라고 하오. 검천부주를 뵙소.”
“검천부 심무한, 숭양검문 소문주를 뵙습니다. 문주의 병환은 어떠신지요.”
시천호가 흠칫 놀랐다.
무한이 숭양검문의 문주가 병환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의외였다.
무한은 예방에 앞서 담철조와 공곤으로부터 각 파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
숭양검문 문주 시전은 주화입마를 입고 요양 중인데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 들었다.
시천호는 침중한 얼굴로 답했다.
“알고 계시니 굳이 감추지는 않겠소. 아직 거동이 불편하시오. 대신 부주를 맞이한 점 양해드리오. 안으로 드시오.”
무한이 시천호를 따라 숭양검문의 빈청으로 갔다.
“부주의 예물에 사람들의 관심이 참 많던데. 본문 역시 기대해도 되는 것이오?”
시천호의 말투에 뼈가 담겨 있었다.
숭양검문은 문주가 자리에 눕자 서열다툼에 밀려 군소문파로 전락하고 말았다.
군소문파 후기지수들 가운데는 천하사패에 대해 적대감을 지닌 이들이 꽤 있다.
천하사패가 천하방을 좌지우지하며 군소문파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시천호 역시 천하사패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무한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시 형께서 그리 말씀하니 부끄럽네요. 천하방 여러 선배들을 뵙는데 작은 성의를 보인다는 게 소문이 과하게 나서 아우의 마음에 부담이 큽니다.”
무한이 예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천호의 눈빛이 빛났다.
정중하면서도 솔직했다. 무엇보다 검천부주가 숭양검문의 소문주에게 아우를 자처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진중하구나.’
시천호는 경계심이 일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누그러졌다. 자신을 높여주는데 싫어할 이가 얼마나 있겠나.
무한이 작은 비단 보따리를 건네자 시천호가 그 자리에서 풀었다.
옥합이 나왔는데 상단에 기천이라 쓰여 있었다.
‘기천부의 물건이다.’
시천호가 옥합을 열려 하자 무한이 말렸다.
“열면 약효가 떨어집니다.”
“이게 무슨 약이오?”
“월령환입니다.”
“월령환!”
시천호의 눈이 활짝 열렸다.
월령환이라면 천기자가 빚은 영단 중에 하나다.
중음의 기운을 담은 환약으로, 음의 성질을 익힌 무인이 먹으면 공력을 증진할 수 있다.
“양기에 의한 주화입마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
시천호가 격동했다.
무한이 월령환을 가져온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재빨리 일어서더니 무한에게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정중하게 포권했다.
“부주의 후의에 이 시 모,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무한이 황급히 다가가 시천호를 일으켰다.
“천하방의 모두가 형제인데 시 형께서 이러시면 제가 욕을 먹습니다. 어서 일어나시지요.”
시천호는 숭양검문 시전의 장손이다.
아버지 시전이 숭양검법의 마지막 관문을 뚫으려다 주화입마에 든 지 벌써 몇 해가 됐다. 그간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시도했으나 극양의 기운에 손상을 입은 기맥을 회복시킬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월령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기천부를 찾았으나 낙담하고 말았다.
천기자가 병에 든 후 월령환을 만드는 비방이 끊겼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월령환은 기천부에도 없다고 들었는데 부주의 손에 있을 줄이야.”
“혹시나 하여 검천부의 약재창고를 살펴보았는데 천만다행으로 하나 남은 걸 찾았지 뭡니까?”
월령환 같은 영약을 선뜻 내주다니 시천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무한의 마음 씀에 스스로의 그릇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오기 전에 기천부에 복용법에 대해 문의해보았습니다. 보름날 달의 기운이 가장 성한 자시에 물 가운데 있는 정자에서 복용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하더군요.”
“고맙소. 정말 고맙소.”
아버지를 살리고 문파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된 시천호는 감격했다.
숭양검문은 천하방에서 중상위권에 속하는 대파였다가 군소문파로 전락했다.
과거 숭양검문이 성세를 굳힐 수 있었던 데는 숭양검법이 바탕이 되었다.
숭양검법은 강호에서 알아주는 상승의 공부이지만, 시전이 앓아누우면서 일부 절기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시전이 정신을 차리면 다시 힘을 찾을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시 씨만이 아니라 숭양검문 전체가 은혜를 입은 것이다.
“천하방 각 파는 모두가 형제입니다. 당연히 서로 도와야지 않겠습니까? 마침 도움이 될 수 있어 저도 기쁘군요.”
무한은 숭양검문의 눈에 찰 만한 무공이 많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다 시전이 극양에 의한 주화입마를 겪는다는 말을 듣고 검천부 약실을 뒤지다 월령환을 찾아낸 것이다.
“검천부의 일에 나 시천호는 항상 앞장설 것입니다.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습니다.”
시천호는 처음과 달리 그야말로 극진히 무한을 예우했다.
무한이 나갈 때는 숭양검문 제자가 모두 나와 도열했다.
“검천부주를 배웅합니다!”
우렁찬 함성 소리가 천하방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