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소란이 커지자 송양이 도왕에게 뭔가 말하더니 우문조에게 손짓을 했다.
우문조가 앞으로 나섰다.
“네가 심무한의 성적에 불만이 있다는 건, 비무로 실력을 밝혀보겠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천무관의 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면 앞으로 누가 입관하려 하겠습니까?”
무한이 조겸을 바라보았다.
문향전 상방에서 조겸과 같이 수학을 하였기에 그가 어떤 성품인지 알고 있다.
조겸은 천하방 좌호법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으로 학문을 익히고 무공을 수련하는 데 최선을 다한 자였다.
그런 그로서는 무한이 자신과 같은 문무쌍절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문조가 무한에게 물었다.
“심무한, 이의제기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비무로 증명할 것이냐?”
무한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비무로 증명해야겠지요. 아니면 제게 이런 평가를 하신 무화전 교두들께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우문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비무를 거행하겠다. 연무장을 비워라!”
천무관 사상 처음으로 이의제기가 나오자 대연무장에는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비무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조겸이 무한과 나란히 단상을 내려가며 말했다.
“네게 다른 감정은 없어. 하지만 천무관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천무관은 내가 십년을 보낸 곳이야.”
조겸의 얼굴은 진지했다.
“이해한다.”
무한이 대답하고는 연무장 한쪽 구석 병기대로 갔다.
목검과 목창, 목도 등 나무로 만든 병기들이 꽂혀 있었다.
강소소가 다가와서 말했다.
“진검을 쓰지 않을 생각이야?”
“같은 문하생들끼리 진검을 쓸 필요가 있나?”
“저쪽은 그리 생각지 않는 것 같은데?”
무한이 조겸 쪽을 보았다.
조겸은 자신의 검을 뽑아 살피고 있었다.
무화전 중방부터는 진검을 쓴다. 그랬기에 조겸은 당연히 목검이 꽂힌 병기고는 생각지 않은 것이다.
“그러네.”
무한은 출관식 날이라 따로 검을 챙기지 않았다.
강소소가 자신의 검을 건넸다.
“내 검을 써.”
“고맙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겠지?”
강소소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뭔가 찜찜한데?’
께름칙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연무장에 섰다.
우문조가 가운데 서서 말했다.
“오늘은 너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천무관을 출관하는 경사스러운 자리다. 불상사는 용납하지 않겠다.”
무한과 조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겸이 말했다.
“나는 가문에서 내려오는 천뢰연환검법을 쓸 거야. 뇌기를 다루는 검법이라는 걸 미리 알아둬.”
‘뇌기? 뇌기라면 나도 좀 아는데.’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잡았다.
“삼재검?”
“역시 삼재검수야.”
무한의 기수식을 보고 사람들이 놀렸다.
“삼재검이긴 한데 좀 빠를 거야. 조심해.”
무한도 주의를 주었다.
둥!
북이 울렸다.
조겸이 검을 드리웠다.
들어오라는 뜻이다. 무한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게 분명했다.
쉬익!
무한이 앞으로 나아가며 정면으로 찔렀다.
단순하고 정직한 찌르기였다.
“……!”
조겸은 찌르기에 실린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뭐지? 단순한 찌르기였는데.’
무한은 쫓아가지 않고 검으로 중단을 겨누었다.
조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그랬듯 무한의 저 자세는 자신보고 들어오라는 뜻이다.
“조심해!”
조겸이 검을 세워 흔들었다.
그러자 허공에 검광이 번뜩이는데 마치 뇌전과도 같이 날카로웠다.
“오! 저건 천뢰검객의 독문검법이다!”
“가문의 비기를 제대로 익혔군. 역시 무화전 상방 갑의 자격이 있어.”
사람들이 조겸의 검법에 경탄했다.
조겸의 검이 더욱 빠르게 움직이며 수십 가닥의 뇌전 같은 검광이 허공을 수놓았다.
천뢰연환검법은 강호의 일절로 꼽히는 검법이다. 상대하는 사람은 어느 검광부터 막아야 할지 당혹해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하나의 검광을 막으면 곧바로 수십 가닥의 검광이 연이어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뇌전을 닮은 검광이 어느 순간 쏟아졌다.
파파팟!
“아앗!”
무한을 향해 검광이 쏟아지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순간 무한의 신형이 왼쪽으로 돌았다. 연이어 일수오검이 펼쳐졌다.
채채챙!
연달아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한의 검은 단순했다.
우직하게 방위를 옮기며 침착하게 검광을 쳐낼 뿐이다.
“제법 버티는데?”
“아니 근데, 저게 정말 삼재검이야?”
관전하는 이들은 조겸의 승리를 예상하면서도 무한의 분전에 놀랐다.
조겸은 내심 당혹해하는 중이었다.
여러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가문의 비전 천뢰연환검법을 시전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랬기에 처음부터 절초를 펼쳤다.
수십 가닥의 검광은 그가 펼쳐낼 수 있는 최대 한계였다.
과한 감이 있지만 단숨에 무한을 제압해야 이의제기가 받아들여질 거란 판단이었다.
그런데 무한은 묵묵히 검광을 받아냈다.
보법 또한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방위를 바꾸곤 하는데, 그때마다 십여 개의 검광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나머지 검광은 무한의 검에 막혀 스러졌다.
‘이, 이게 아닌데.’
검광 하나하나에 내기가 담겨 있다. 이렇게 간단히 튕겨 나갈 검광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무한은 심지어 찌르기 한 수로 서너 개의 검광을 단숨에 쳐냈다.
겉으로 보면 조겸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으로 보였으나, 고수들은 실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기에 내심 놀라워하였다.
“빠른 눈, 간결한 검로, 적절한 힘! 검이 나아갈 길은 그것뿐이지.”
형소가 심의삼재검 검의를 중얼거렸다.
그 역시 삼재검수로서 무한의 분전이 감격스러웠다.
조겸은 비무가 예상치 않게 흐르자 조급해졌다. 갑자기 몸을 솟구치더니 허공에서 검을 휘저었다.
우르릉!
놀랍게도 어디선가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최근에야 연마한 천뢰연환검법의 절초를 펼치려는 것이다.
“아앗!”
“오!”
조겸의 신형이 검광에 가려 사라지고, 오로지 번뜩이는 뇌전을 담은 검광이 줄줄이 무한을 향해 내리꽂혔다.
“저 나이에 저런 초식을 구사하다니!”
“심무한이 더는 버티기 어렵겠는 걸?”
순간 무한의 신형이 멈췄다.
쏟아지는 검광에 놀라 비무를 포기한 듯 보였다.
“위험해!”
강소소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조겸 역시 자신이 너무 과했음을 깨닫고 내기를 회수하려 했다.
무한은 천천히 검을 내밀어 쏟아지는 검광의 가운데를 찔렀다.
쾅!
놀랍게도 폭음성이 터지고, 조겸이 허공에서 두세 바퀴 회전한 후 내려섰다.
“……크.”
조겸의 안색이 창백했다.
반면 무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대부분의 문하생은 두 눈으로 보고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반면에 단상의 교두들이나 참석한 빈객 가운데 고수들은 알 수 있었다.
무한은 수많은 검광 가운데 조겸의 검을 정확히 찾아 찔렀다.
그러고는 나머지 검광이 덮쳤을 때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나 공격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마치 검광이 무한을 밀어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무한의 검에 검로가 막힌 조겸은 허공에서 튕기듯 회전하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럴 수가.’
조겸의 손이 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의 내공은 또래를 상회하여 이미 이십 년 수련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그런 공력을 무한은 가벼운 찌르기로 막아냈다.
경천심결로 다져진 무한의 육신은 그 자체가 기운 덩어리였으나 겉으로 보자면 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축기와 운기 방식이 여타의 내공심법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조겸은 더욱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문조가 가운데로 나섰다.
“이만하면 입증됐다고 본다.”
사실 무한이 무화전 상방 갑의 성적을 받은 데는 하기주와 우문조의 역할이 컸다.
하기주로부터 무한이 광풍대주 광포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말을 들은 우문조는 직접 섬서까지 사람을 보내 신임 승룡대주 전경목에게 확인했다.
우문조는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무한을 무화전 상방으로 승방 시키고 갑의 성적으로 위에 보고했다.
파격적인 성적이라 고심하는 송양에게 실력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천무관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겸이 이의제기를 해서 내심 당황했는데, 무한이 조겸과 맞수를 이루는 걸 보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우문조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려 했으나 조겸은 수긍할 수 없었다.
그로서는 고작 삼재검을 꺾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무한이 경천십이식이라도 펼쳤으면 모를까, 삼재검이랄 수도 없는 단순한 검법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직 제대로…….”
조겸이 다시 나서려 하는데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겸아. 승복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나타난 사람은 천하방 좌호법이자 조겸의 아버지 천뢰검객 조천경이었다.
굵은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조천경은 체구가 장대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이 나오게 만드는 옛이야기 속 호걸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천경은 아들이 문무쌍절로 천무관을 출관한다는 소식에 서둘러 오는 길이었다.
“방주를 뵙습니다!”
조천경은 단상에 있는 도왕에게 예를 취하고 말했다.
“아들놈의 어설픈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무화전 갑으로 출관하게 되었으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조겸이 무한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안하다. 승부욕이 앞섰나봐. 멋진 비무였다.”
조겸이 깨끗하게 인정하자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문조가 말했다.
“두 사람은 단상으로 올라가거라.”
두 사람이 단상에 오르자 도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양도 일어나 옆에 서더니 말했다.
“올해 문무쌍절은 방주께서 직접 옥패를 하사하실 것이다.”
그러더니 도왕에게 옥패를 건넸다.
앞뒤로 용이 조각되어 있는 옥패는 운남옥 중에서도 상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양쪽에 각기 문절과 무절이라 새겨진 옥패는 천하방 내에서는 출세의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았다.
도왕이 조겸에 이어 무한에게 옥패를 건네며 말했다.
“천무행에서의 활약은 들었다.” 뜻밖의 말에 무한이 놀라 바라보았다. 도왕의 눈빛은 무심하였다.
“수고했다.”
도왕은 짤막하게 한마디 하고 돌아서더니 단상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도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방은 강호제일방파로 무림의 정의를 실현해왔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 뛰어난 인재 덕분이 아니다. 바로 서로를 위해 피를 흘릴 줄 아는 형제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방은 넓다. 각자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오라! 천하방으로!”
도왕의 말은 짧았으나 울림이 컸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었다.
천무관 출관과 천하방 입방은 서로 다른 이야기다.
천무관에는 타문파의 인재들도 있는데 대부분 출관을 하면 자파로 돌아간다.
심지어 천하방 고위인사의 자제가 다른 방파로 가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도왕이 직접 천하방으로 오라고 했으니 지원자가 많겠군. 요직 경쟁이 치열하겠어.”
“우리야 이미 정해졌잖아.”
형소와 강소소가 수군거렸다.
도왕은 짤막하게 말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갔다.
강소소와 형소가 다가왔다.
“축하해!”
“삼재검수가 문무쌍절이라니!”
형소가 무한의 옥패를 살펴보며 자기 일처럼 뿌듯해하였다.
저들끼리 재잘대는 형소와 강소소 틈에서, 무한은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도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고했다……라니. 무슨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