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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54화 (54/250)

54화

늙은 주인이 내려가자 귀영이 말했다.

“하오문은 정말 철저하더군요. 저 늙은 주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겁니다.”

잠시 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길거리에서 흔히 볼 법한 평범한 사람이 슥, 들어왔다.

“나를 찾았소?”

무한이 보니 표정이 없다. 인피면구를 쓴 듯했는데 감쪽같아서 구별하기 어려웠다.

“원하시는 게 뭐요?”

사내는 통성명도 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찾는 일이오.”

“사람?”

“불망객.”

사내가 무한을 뚫어져라 보다가 말했다.

“그자는 이미 팔 년 전에 실종된 사람이오.”

“그러니 찾는 것이겠지.”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은자 백 냥. 착수금은 절반. 못 찾는다 해도 돌려주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추가금이 붙을 수 있소.”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전표를 꺼냈다.

백 냥짜리 전표다.

“착수금은 절반…….”

사내가 금액을 지적하려 하자 무한이 전표를 건넸다.

“결과를 가져올 거라 믿겠소.”

무한이 사내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 눈빛을 받은 사내가 아, 하더니 시선을 전표로 돌렸다. 잠시 전표를 보던 사내가 말했다.

“그가 살았든 죽었든…… 어디 있는지 알아내겠소.”

“결과는 천하방 검천부에서 받겠소.”

무한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사내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은자 백 냥이라니…….

‘차라리 나를 주지. 내가 알아서 찾아줄 텐데.’

무한과 귀영은 객잔을 나왔다.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귀영이 투덜거렸다.

“저를 시키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사람 찾는 건 전문이라고요.”

“맡은 임무나 잘하세요.”

“예?”

“오늘 내가 하오문과 접촉한 걸 도천부에 흘리란 말입니다.”

아, 나 이중첩자지?

귀영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고, 한편으로 서운해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런 사람 맞죠. 지금은 이중첩자 노릇에 충실하는 게 임무입니다.”

“…….”

잠시 후 귀영이 물었다.

“뭐라고 보고할까요?”

“보고 들은 것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귀영은 무한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죄다 보고하라고? 무슨 생각이지?’

귀영이 자신을 슬금슬금 살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한은 묵묵히 걸었다.

이번 천무행으로 확실하게 깨달은 바가 있다.

‘누군가 마천의 검을 빌려 날 죽이려고 했어.’

마천의 전향자가 뜻밖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소마가 자신에게 알 수 없는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고벽후와 비무로 실전감각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승룡대와 함께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시작인 건가?’

덫을 피해 살아나온 데다 마천과의 교전으로 무한의 무위가 확인되었으니, 암중의 적은 더욱 더 교묘하게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대체 누구냐 넌…….’

무한은 암중의 적을 도천부 고강후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속단하지 않았다.

설령 고강후라고 해도, 그 외에 또 다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무한을 죽이자고 천하방 고위급의 자제들까지 희생시킬 음모를 꾸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는지 보자.’

무한은 우선은 고강후부터 건드려볼 생각이다.

고강후의 거만한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힘을 기르기 위해 자신을 숨겨왔다면 이제는 맞서야 한다.

***

천무행을 간 문하생들이 복귀하자 천하방이 뒤집어졌다.

마천에게 난주를 내어주고 멸마대는 실종됐다. 거기에 더해 현무대와 승룡대는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그 와중에 천무행을 떠난 문하생들이 모두 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이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다.

대신 뜬소문만 횡행했고, 마천의 전향자나 소천주 소마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문하생들에게는 천무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령이 내려졌다.

그런 가운데 천무관 출관식이 다가왔다.

천무관 대연무장.

천무행이 위험천만했기에 올해 천무관 출관식은 더욱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

형소가 빈 단상을 보며 투덜거렸다.

“현무대와 승룡대가 전멸 수준으로 당했다고. 그런데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사람을 허수아비로 아나.”

“정말 한심한 건 사람들이야. 거짓을 사실로 믿고 있잖아.”

강소소가 맞장구쳤다.

형소와 강소소는 지난 몇 년 동안 천무관 문향전 상방에 속했으나 그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또래보다 영특해서 대화가 되는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말이 없어 보였을 뿐, 타고난 천성은 그렇지 않았다.

그간의 묵언수행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둘은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묘하게 둘은 무한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했다.

형소가 말했다.

“그런데 고 대주와 멸마대는 어디로 갔을까?”

고벽후와 멸마대의 행적은 마치 물에 빠진 돌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잖아. 하늘로 솟지 않은 이상 마흔 명이나 되는 멸마대원의 행적을 아무도 모르다니.”

“마천에서 왔다는 그 노인을 쫓아갔겠지.”

“그럼 그 노인은 어디로 갔다는 거야? 전향을 했다는데 방에 그런 사람이 왔다는 소문이 없잖아?”

형소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으면 풀릴 때까지 집착하곤 한다.

무한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노인, 아니 검마는 과연 진정 전향할 의사가 있었던 걸까?’

천무행에서 돌아온 뒤 만현서고에 들어가서 무림인명록을 뒤져본 바 있다.

백발노인의 생김이나 무공으로 봐서 검마가 분명했다.

검마(劍魔).

그는 팔대마가 중 혁련가의 원로이자 마천의 수뇌부였다.

정말 검마가 전향했다면 천하방과 마천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검마는 뼛속까지 마인이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위장 전향일까?’

검마의 전향 때문에 결과적으로 천하방은 난주를 내주고 감숙 북부의 패권을 잃었다.

이 모든 게 마천의 계략이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손실이었다.

“모두 조용해라.”

누군가 외치고 단상 쪽이 부산스러워졌다.

이윽고 천무관 문향전 대학사 동중용과 무화전 대교두 송양이 천무전에서 나와 단상에 올랐다.

수석학사 왕선유와 수석교두 우문조가 옆을 보좌하고, 문향전 학사들과 무화전 교두들이 옆에 도열했다.

“이상하네? 단상에 의자가 하나 남아.”

동중용과 송양 사이 의자가 비어 있었다.

학사들과 교두들이 단상에 도열하자 왕선유가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오늘 출관식에는 특별히 방주께서 참석하신다!”

왕선유의 말에 대연무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이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도왕께서 직접 오신다고!”

“와아!”

대연무장에 도열한 서른세 명의 출관 문하생은 물론이고, 그 뒤로 선 천무관 문하생, 하객들까지 일제히 환호했다.

도왕 고진.

천하방주가 일개 무관의 출관식에 참석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주께서 오십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천하방주 도왕이 대연무장 한쪽으로 들어섰다.

붉은 장포를 입은 도왕이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절로 위엄이 넘쳐흘렀다.

도왕이 자리에 앉자, 왕선유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우선 출관 문하생의 성적을 발표하겠다.”

그러더니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 외쳤다.

“조겸! 문향전 상방 갑, 무화전 상방 갑.”

왕선유의 말에 대연무장에 환호가 일었다.

“우와, 처음부터 문무쌍절이 정해진 거잖아?”

천무관 출관 성적은 문무 양전 상중하 방과 각 방에서의 성적을 갑을병정으로 나뉘어 책정한다.

문무쌍절은 천무관 문향전과 무화전 상방에서 갑을 받은 자를 지칭한다.

문하생들이 앉은 자리 앞줄에서 훤칠한 청년이 일어나자 몰려든 하객들이 탄성을 흘렸다.

“와아아!”

“역시 좌호법의 아들이야.”

조겸은 천하방 좌호법 조천경의 아들이다.

그는 문무쌍절이라는 우수한 성적은 물론이고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 정도로 용모가 준수했다.

조겸이 앞으로 나가자 우문조가 그의 성적이 담긴 두루마리를 건넸다.

이어서 왕선유는 출관 문하생의 성적을 줄줄이 읊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탄식이 흐르기도 하고 환호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천무관 출관 성적은 천하방에서 무슨 직책을 맡을 수 있는지를 좌우한다.

높은 성적을 받을수록 요직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모두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모우극, 문향전 중방 병, 무화전 상방 을!”

모우극은 자신의 성적이 불만스러운 듯 뚱한 얼굴로 나갔다 왔다.

“후하게 주네. 문향전 중방 병이라니. 저 멍청이가.”

강소소가 투덜거렸다.

왕선유가 곧바로 강소소를 호명했다.

“강소소! 문향전 상방 갑, 무화전 상방 을!”

강소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받아오자마자 내팽개쳤다.

“내가 을이라고? 모우극과 같다고! 이게 말이 돼!”

강소소가 씩씩거렸다.

그녀 옆에서 형소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보단 낫잖아.”

그는 문향전 상방 갑이었으나 무화전에서는 중방 정이었다. 중방에서 최하점인 셈이다.

“심무한!”

왕선유가 무한의 성적 두루마리를 펼쳤다.

“문향전 상방 갑, 무화전 상방 갑!”

무한의 성적이 발표되자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어찌된 거지?’

무한조차 놀랐다.

무화전 중방인 자신이 상방으로 둔갑하고, 거기다 갑이라는 성적까지 받다니.

“무한이 무화전 상방 갑이라고? 뭐가 잘못된 거 아냐? 쟤는 중방이잖아?”

“천하제일인의 후손이잖아. 예우를 해준 거겠지.”

“이건 불공평해! 가진 바 실력으로 정확히 성적을 매겨야지.”

“삼재검수가 무화전 상방 갑이라니! 이건 분명 잘못된 거야!”

사방에서 수군거렸다.

“뭐해? 빨리 나가지 않고.”

형소와 강소소가 떠밀었다.

무한이 얼떨결에 앞으로 나가 자신의 출관 성적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았다.

분명 문향전과 무화전 모두 상방 갑이다.

형소와 소소가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맞아, 너야말로 진정한 무화전 상방 갑이지!”

“소마하고 맞장 떴다는 걸 말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천무행에서 일어난 일은 함구 대상이니 무한이 소마와 단독으로 비무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없었다. 형소와 소소만 무한을 닦달한 끝에 알아냈을 뿐이다.

무한을 끝으로 모두의 성적이 발표되었다.

왕선유는 도열한 천무관 문하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올해는 두 명의 문무쌍절이 나왔다. 조겸과 심무한은 앞으로 나와라.”

천무관이 천하방 여러 무관 중에 최고의 무관으로 꼽히니 천무관 문무쌍절은 그해 배출한 천하방 인재 중에 최고임을 뜻한다.

매해 문무쌍절은 한두 명에 불과했는데 올해 역시 조겸과 심무한 두 사람으로 그쳤다.

그런데.

먼저 단상에 올랐던 조겸이 걸어오는 무한을 보며 말했다.

“천무관 성적에 불만이 있는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겸의 말에 장내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심무한이 문향전 상방 갑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무화전 상방 갑이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겸은 훤칠한 키에 관옥같이 하얀 얼굴, 붉은 입술을 지닌 미남자였다.

문무 양면에서 뛰어났기에 천무관은 물론 주위 무관에서도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다.

오늘도 천무관 후배들은 물론 주위 무관의 많은 여자들이 그를 보러 왔는데 조겸의 말을 듣자 소리쳤다.

“맞아요! 조 공자와 심무한이 같은 문무쌍절이라니!”

“심무한은 중방 삼재검수잖아요! 상방이라뇨!”

“조 공자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말도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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