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무한은 소마의 신형을 쫓다가 먼 하늘에 퍼진 붉은 연기가 난 곳이 어딘지를 가늠했다.
‘감숙지부.’
지부의 하늘과 사라지는 소마를 보며 고벽후가 침중한 얼굴로 혈랑에게 말했다.
“마천이 고원에 들어올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많이 달라질 거야. 부디 머리 간수 잘 하거라.”
“…….”
혈랑은 소마와의 비무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얼굴로 소마의 뒷모습을 보다 말없이 돌려 말에 올랐다.
“가자.”
마적떼가 그대로 퇴각했다.
귀영이 중얼거렸다.
“어찌된 일일까요? 마적들이 순순히 물러가다니.”
마적과 한판 할 생각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냥 가니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의아했나 보다.
“우리가 재물을 지닌 상인도 아닌데 뭐 하러 죽자고 싸우겠나? 저들도 생기는 게 있어야 싸울 생각이 나지.”
고벽후가 대신 대답하고는 무한에게 전음을 하였다.
- 천무행 일행은 난주로 갔다. 난주로 가서 강가에 있는 풍향정(豐享亭)을 찾아라. 사람이 오지 않으면 편액 뒤에라도 소식을 남기겠다.
그러고는 무흔이 있는 쪽으로 흘깃 시선을 주고는 말에 올랐다.
“나는 먼저 가마.”
말에 오른 고벽후가 바로 말고삐를 채어 달렸다.
***
고벽후는 바로 난주로 가라고 했으나 무한은 감숙지부를 들렀다.
감숙지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잖아도 폐허 같았던 감숙지부였기에 황폐한 느낌이 더했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귀영이 도를 빼어들고 경계의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한도 주위를 살폈다.
싸움을 치른 흔적은 없었다.
앞서 무한이 백상인을 보냈으니 미리 피했을 것이다.
“어쩌실 겁니까?”
“일단 난주로 가지요.”
난주로 향하는 길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 여깁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흔의 전음.
혈향을 따라 길에서 약간 벗어난 협곡으로 가니 수많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현무대.’
시신의 반은 천하방 무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참혹한 광경에 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대로 당했네요.”
얼핏 봐도 현무대 시신이 훨씬 많았다.
“양쪽에서 기습을 한 것 같군요. 마천의 무력대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네요.”
“…….”
무한은 말없이 현장을 둘러보다 말머리를 돌렸다.
해가 질 무렵 난주에 들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왠지 흉흉한 분위기였다.
“적당한 곳을 찾아서 묵으세요.”
귀영에게 이르고 지난번 묵었던 객잔으로 들어갔다.
“무한아!”
마침 객잔 마당에 나와 있던 형소가 무한을 보고 달려왔다.
“너 죽은 줄 알았어. 막 찾으러 갈 참이었다고.”
“네가?”
“하 조장이 너를 찾으러 간다고 난리야.”
의식을 회복한 하기주가 무한을 찾아야 한다고 하여 형소와 강소소가 말리는 중이라고 했다.
“백상인은?”
부조장으로서 조원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다.
“맞은편 객잔에 천무관 문하생들과 있어. 현무대 패잔병들은 길 끝에 있는 객잔에 들었고.”
“현무대?”
“마천과 싸웠는데 패한 것 같더라.”
형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이 절반도 안 돼. 게다가 대부분 부상을 입었더라고.”
“승룡대는?”
“승룡대는 저쪽.”
형소가 반대편 객잔을 가리켰다.
“난주가 천하방 지부가 된 거 같아.”
승룡대는 작은 객잔을 통째로 빌려 부상자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무한은 하기주부터 찾았다.
“다친 데는?”
하기주는 무한의 팔다리부터 살폈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 내상부터 회복하시죠.”
“대체 어찌 된 거냐?”
무한이 승룡대를 만난 뒤부터 벌어진 상황을 전했다.
하기주가 탄식했다.
“결국 마천에게 감숙지부를 넘기고 말았구나.”
무한은 우문조를 찾아 귀환을 보고했다.
“무사히 왔으니 다행이다.”
무한을 보자 잔뜩 굳어 있던 우문조의 얼굴이 반쯤 풀렸다.
문하생들의 안위는 천무행 행수인 그의 책임이었다. 무한이 별 탈 없이 돌아오자 안도했다.
“멸마대와 함께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
멸마대 행적을 물었으나 우문조는 미간만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감숙지부로 돌아간 백상인이 유곡선에게 마천의 전향자가 감숙지부를 우회하리란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유곡선은 현무대를 보내 쫓게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고벽후가 유곡선을 죽였다.
멸마대는 그 사실을 감춘 채 우문조와 천무관 문하생들을 겁박하여 난주로 퇴각시킨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문조는 난주에 와서야 고벽후가 유곡선을 죽인 사실을 알았다.
숨 가쁘게 돌아간 상황에서 철저히 배제된 우문조는 내심 불쾌해하고 있었다.
문하생들이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이번 천무행 작전은 완전 실패였고, 행수로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는지 우문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승룡대와 현무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다니…….”
마천 전향자를 쫓던 현무대는 소마 휘하의 사천대와 마천 외성의 주력인 혈천대 협공을 받고 패주했다.
“승룡대 부대주가 자네 덕분에 대원들을 살릴 수 있었다고 감사의 뜻을 전해왔네. 방으로 돌아가면 공적조서를 올려주겠네.”
“아닙니다. 이번 작전은 기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천하방 무력대가 대패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을 내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우문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럼 하 조장이 회복되는 대로 귀환하기로 하지. 사나흘 걸릴 것이라고 하더군.”
“다시 생각해보시죠.”
“으응? 무슨 소리인가? 다시 생각해보라니.”
“승룡대나 현무대는 중상자가 많습니다. 적어도 보름은 지나야 거동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들 또한 천무행 작전의 일환으로 참여했으니 동료인 셈입니다. 부상당한 동료를 놔두고 우리만 귀방 하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우문조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무한이 말하자 흠칫, 하는 표정이었다.
“천하방 형제를 두고 갈 수는 없지요.”
“…….”
우문조가 생각에 잠겼다.
마천이 감숙지부를 차지한 이상 한시라도 빨리 난주를 벗어나야 한다.
그 마음은 현무대나 승룡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숙에는 중원에서 공적으로 몰려 쫓겨 온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천하방이 패하여 퇴각한다면 이틈을 타서 보복하려는 놈들이 있겠지요. 현무대나 승룡대는 부상자가 많으니 멀쩡한 천무행 인원들이 그들을 지켜야 합니다.”
우문조의 얼굴에 잔잔한 감동의 빛이 어렸다.
“과연…… 천하사패 검천부로군. 내가 생각이 짧았네. 부끄럽군.”
“아닙니다. 행수께서는 문하생의 안위를 우선하신 것이겠지요.”
“아닐세. 함께 작전에 투입되었다면, 함께 돌아가는 게 맞아. 그게 진정한 천무행의 의미인 것이겠지.”
우문조가 일어서며 말했다.
“현무대와 승룡대를 찾아 일정을 조율해보겠네.”
다음 날.
아침 일찍 승룡대 부대주 전경목과 일조장 조약평이 찾아왔다.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네.”
승룡대가 그나마 전멸하지 않은 건 무한 덕분이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우 행수로부터 들었네. 모두 함께 귀방을 하자고 제안했다니…… 사실 생각지도 못했네.”
부상자가 많은 승룡대는 어떻게 감숙을 벗어날지 궁리 중이었는데 현무대 생존자와 천무행 문하생들과 함께한다니 한시름 놓았다.
“우리도 우리지만 현무대도 중상자가 한둘이 아닐세. 천무행 인원과 함께 간다면 적잖은 도움이 될 걸세.”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고는 돌아갔다.
잠시 후 무한은 객잔을 나가 귀영을 불렀다.
“강호에 정보를 취급하는 하오문이라고 있다던데 난주에도 있겠지요?”
“글쎄요.”
“알아보세요.”
귀영이 사라지자 무한은 거리로 나섰다.
천하방이 마천과의 싸움에서 패해 난주 이북을 잃었다는 소문이 저자거리의 화제였다.
그로 인해 상인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이제 마천에게 통행세를 바쳐야 하나?”
“마적들이 더 활개 치는 건 아닐까?”
여러 가지 우려와 억측이 불안감을 키웠다.
무한은 난주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강으로 향했다.
강가의 정자.
‘풍향정이라고 했지?’
고벽후가 헤어지기 전 일러준 풍향정을 찾아 정자의 편액 뒤를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난주로 온 게 아닌가?’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리려는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장초 형.’
변복을 했지만 분명 장초였다.
“무사했구나.”
“고 대형 덕분이죠. 고 대형은 어디 계십니까?”
“마천에서 온 놈을 쫓고 있어.”
역시 고벽후는 마천의 전향자를 쫓는 중이었다.
“멸마대는 공격받지 않았나요?”
“흥? 우리가 누군데 마천 놈들에게 당해. 걱정 마라. 대원 모두 무사해.”
고벽후는 멸마대원들을 난주 일대에 은신하게 하고, 의형제들과 함께 마천의 전향자를 쫓고 있다고 했다.
“대형이 네 안위를 확인하라고 해서 온 거야. 무사한 걸 봤으니 됐어.”
“마천의 전향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공동산으로 갔어. 대형이 나중에 따로 소식을 전한다고 했으니 조심해서 본방으로 돌아가.”
장초가 먼저 정자를 나가 사라졌다.
고벽후와 멸마대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무한은 바로 객잔으로 돌아왔다.
무한은 자기 방에 처박혔다.
귀방을 보름간 미룬 건 부상자들을 위함이지만 그 자신에게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지난 며칠 숨 돌릴 틈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무한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혈향이 느껴진다.
광포의 피이거나 이름 모를 흑천도의 피겠지.
죽어가던 흑천도의 눈빛이 떠오르고, 무력대 간의 전투가 남긴 참혹한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한은 산도의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죽음을 앞두고 손자가 어떤 인간이 될지 걱정했을 것이다. 네가 겪은 일은 경우에 따라서는 살귀가 된다 해도 무방하지 않느냐?
처음으로 살인을 하고,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목도했다.
제아무리 부동심을 익혔다고 해도 무한의 내면 깊은 곳은 요동치고 있었다.
무한은 경천승운공을 운기하며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불인(不仁).
할아버지가 말한 무인의 길.
그러나 그의 길은 아니다.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귀방을 하루 앞둔 날.
무한이 자신의 객방에서 나왔다.
귀영이 궁금하여 물었다.
“대체 뭘 하신 겁니까?”
“길을 찾았습니다.”
객방에서 길을 찾아?
미쳤냐고 대꾸하려던 귀영이 입을 닫았다.
어딘가 모르게 무한의 표정이나 어조가 달랐다.
“갑시다.”
무한의 기세에 눌린 귀영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왜지? 왜 사람이 바뀐 거 같지?’
귀영은 뒤를 힐끔거리며 길을 걸었다.
귀영이 찾아 놓은 하오문과의 접선 장소는 미로처럼 얽혀 있는 좁은 골목길 끝에 있는 작은 객잔이었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도 없는 후미진 객잔에는 점소이조차 없었다.
“잠깐.”
귀영이 객잔에 들기 전 천으로 무한의 얼굴을 가렸다.
“이런 데서 얼굴 팔리면 안 됩니다.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놈들이거든요.”
늙은 주인이 주방 앞 의자에 기대어 졸다가 무한과 귀영이 들어오자 고개를 쳐들며 일어났다.
“어서 오시지요.”
“잃어버린 사람이 묵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소.”
귀영의 말에 늙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이층 객실로 안내했다.
“붉은 천을 걸어놓으면 사람이 올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