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혈랑이 갑자기 손을 휘저었다.
휙!
비도가 무한을 향해 날아왔다.
천목투심술을 극성으로 발휘하고 있던 무한은 혈랑의 의도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터엉!
검을 세워 비도를 막아냈다.
예상대로 비도에 실린 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탐색하기 위해 던져본 것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법인데?”
혈랑이 씨익, 웃었다.
“고 마귀 같은 놈보다는 내 밑이 낫지. 나한테 와라.”
“뭐 하는 짓이냐?”
고벽후가 어이없어 했다.
“네놈이 대귀를 죽였잖아. 나는 저놈을 뺏어야겠다.”
“미친놈아. 대귀를 죽인 건 난데 왜 엄한 사람한테 시비냐?”
혈랑은 들은 척도 않고 무한에게 말했다.
“너와는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혈랑의 시선이 다시 소마를 향했다.
“마천의 소천주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세상이 마천에 대한 경외심을 잃은 모양이구나.”
소마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혈랑은 상대방의 이야기는 무시하는 습관이라도 있는 건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마천과 천하방이 왜 여기서 싸우는 건데? 무슨 맹약인가 뭔가 맺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깨진 건가?”
고벽후가 끼어들었다.
“목숨 부지하려면 말조심해라. 고원의 새로운 주인이니까. 물렁한 나와는 다르다고.”
혈랑이 피식, 웃었다.
“나 혈랑이 있는데 누가 이 고원의 주인이란 말이냐?”
“하아…….”
소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고벽후가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시오?”
“대체 너희가 뭘 믿고 내 앞에서 이리 찧고 까부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그 말에 혈랑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미친 걸 보니 마인이 맞구나?”
“…….”
“…….”
“좀 궁금하긴 했어. 왜 그리 마천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거든. 솜씨 좀 보자.”
훌쩍 뛰어 말에서 내린 혈랑이 말 엉덩이 쪽에 매어둔 도집에서 커다란 도를 뽑았다.
치리링.
아홉 개의 둥근 환이 달린 구환도였다.
“소천주라고 했지? 붙어보자.”
“이봐, 마천의 소천주를 너무 가볍게 보는 거 아냐? 어떻게, 좀 도와줘?”
“시끄러! 닥치고 구경이나 해!”
드르르르륵.
구환도가 땅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하하하. 정말 제대로 미친놈 아닌가?”
소마가 시원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재밌어서 웃었다.
겉보기와 달리 소마는 마흔이 넘었다. 지난 이십여 년 소천주의 자리를 노리고 수많은 마인이 도전하였으나 모두 죽이고 그 자리를 지켜왔다.
지금은 마천의 이인자라는 걸 의심하는 이가 없다.
그런데 마적떼 우두머리가 이를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칼까지 쥐고 덤비니 어이가 없었다.
“진짜 마귀새끼인지 보자고!”
혈랑이 벼락치듯 몸을 날렸다.
쌔애애액!
구환도가 허공을 갈랐다.
소마를 단숨에 두 쪽 낼 기세였다.
“고작 그 실력을 믿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나불거렸던 게냐?”
소마는 짓쳐들어오는 구환도의 기세를 읽으며 말했다.
치리리링.
구환도가 허공에서 번뜩이다 사라졌다. 대신 소마의 양옆으로 도광이 번뜩였다.
“어림없다.”
소마는 왼발을 축으로 슬쩍 한 바퀴 돌며 검을 그었다.
검 끝을 따라 묵빛 기운이 흘렀다.
쾅!
구환도와 검이 제대로 부딪혔다.
“큭!”
혈랑이 주르륵 밀려났다.
단 일합에 우열이 가려졌다.
혈랑은 침을 퉤, 뱉고는 소마를 노려보았다. 수긍할 수 없다는 눈빛이다.
‘정말 늑대 같은 사내야.’
무한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혈랑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좀 수다스럽긴 했다.
반쯤 입으로 싸우는 듯…….
“간은 봤고. 다시 해볼까?”
혈랑이 오른발로 땅을 딛고는 몸을 회전하며 구환도를 뿌렸다.
치리리링!
놀랍게도 아홉 개의 환이 소마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소마의 신형이 사라지고 싸늘한 코웃음만이 울렸다.
이어서 맹렬한 검광이 폭사되면서 아홉 개의 환이 튕겨 나왔다.
“칫!”
혈랑은 튕겨 나온 환들을 일일이 구환도로 때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아홉 개의 환이 사방으로 튕겨나가듯 하다 허공을 선회하더니 소마를 향해 내리꽂혔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했다.
‘아……’
무한은 내심 감탄했다.
혈랑이 펼친 한 수는 도법인지 암기술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만큼 기이했다.
“흥!”
소마는 이번에도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왼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아홉 개의 환이 모두 잡혔다.
“이따위 얕은 수작이나 부리는 놈이었나?”
“실망하지 않을 거요. 저놈이 제정신이 아니긴 한데 너무 쉽게 생각지는 마쇼.”
고벽후의 말이었다.
“그래?”
소마의 싸늘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치링!
혈랑이 구환도를 흔들더니 길게 늘어뜨린 채 소마를 향해 걸어갔다.
콰지직!
소마가 힘을 주자 환이 깨어져 나갔다.
“으응. 제법 세잖아?”
혈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공을 익힌 뒤 고벽후 외에는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한 혈랑이다. 마천주도 아니고 소천주에게 자신이 밀릴 거라 생각 못 했다.
“챙겨 놔.”
혈랑이 손에 든 구환도를 뒤로 던졌다.
수하로 보이는 마적이 재빨리 구환도를 주워 혈랑의 말 잔등에 매달았다.
“다시 해보자고.”
혈랑이 양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도를 뽑아 들었다.
고벽후의 반월도와 반대로 바깥쪽으로 휘어진 곡도였는데 크기가 약간 작았다.
기이하게도 칼자루는 물론 도신까지 피처럼 붉었다.
“혈랑아(血狼牙)…… 대막혈사(大漠血師)의 제자였나?”
소마의 시선이 혈랑의 곡도에 꽂혔다.
‘대막혈사?’
무한은 처음 듣는 별호였다.
소마는 혈랑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는데 그마저도 웃는 것처럼 보였다.
“대막혈사가 아직 살아 있었나보군.”
“멀쩡하지. 아직도 나를 들들 볶으며 잘 살고 있어.”
혈랑이 한 쌍의 혈랑아를 휙휙, 휘둘러 허공을 찢더니 소마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냈다.
“막아 봐!”
혈랑은 소마를 향해 달려들며 양손의 도를 번갈아 찍었다.
두 자루의 혈랑아가 허공에 핏빛 그림자를 그리며 소마를 덮쳤다.
샤샤샥!
마치 낫질을 하는 듯한 소리가 일었다.
“흥!”
소마가 싸늘한 코웃음을 흘리며 검을 좌우로 휘저었다.
검광이 일어나더니 파도처럼 혈랑을 향해 나아갔다.
까가강!
혈랑아가 검광을 내리찍자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일었다.
혈랑이 검광을 깨뜨리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검광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막혈사가 온다면 모를까, 너는 아직 부족하다.”
“지랄!”
혈랑이 이를 악물고는 혈랑아를 크게 휘젓자 검광이 일순 사라졌다.
그러자 소마가 검을 내리그었다.
쿠우웅!
일 장 크기의 거대한 검형이 일어나 혈랑을 내리찍었다.
혈랑이 곡도를 교차하여 막았다.
콰왕!
굉음과 함께 혈랑의 키가 반 자는 줄었다. 무릎까지 땅으로 파고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두 쪽이 나지 않은 건 혈랑아로 검형을 막아낸 덕분이었다.
“용케도 막았군. 푸후후.”
소마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의외였다.
수다스러운 혈랑과 싸우면서 소마도 말이 많아졌다. 둘은 마치 싸움을 즐기는 것만 같았다.
“퉤!”
혈랑이 울혈을 뱉어냈다.
소마가 거만한 미소를 지은 채 어깨를 으쓱 하더니 검을 까닥거렸다.
“너희 둘이 함께 덤벼라. 그래야 싸워볼 마음이 생길 것 같구나.”
“헛소리 마라!”
혈랑이 땅에 박힌 오른발을 빼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소마는 다가오는 혈랑은 무시하고 한쪽에 서 있는 고벽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시꺼먼 검형이 고벽후를 향해 날아갔다.
“하하! 사양하지 않겠소!”
고벽후가 크게 소리치며 반월도를 들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형을 쳐냈다.
그사이 혈랑아가 들이닥쳤다.
소마가 좌장으로 혈랑아를 향해 묵빛 기운을 쳐냈다.
콰앙!
파앙!
연달아 기파가 터지며 혈랑과 고벽후가 주춤 뒤로 밀려났다.
두 사람이 합공하였으나 소마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
소마는 손을 멈추고 고벽후의 반월도를 노려보았다.
“완월도법?”
소마의 시선이 반월도에서 고벽후의 눈으로 향했다.
고벽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인연이 있었소.”
“오늘 참 많이 놀라는군.”
소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귀 새끼! 싸우다 말고 뭐하는 거냐?”
혈랑이 고함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소마가 슬쩍 뒤로 물러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검을 그었다.
묵빛 검강이 번뜩였다.
혈랑의 혈랑아와 고벽후의 반월도에서도 도강이 뻗어 나왔다.
콰앙!
쾅!
세 사람 모두 강기를 자유자재로 썼다.
강기의 여파가 사방으로 비산하여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기가 막히군. 강기를 젓가락 쓰듯 하네.”
어느새 왔는지 귀영이 무한 옆에서 중얼거렸다.
무한은 세 사람이 싸우는 걸 보느라 말이 없었다.
고벽후나 소마와 비무를 했으나 절대 고수들 간의 실전을 보는 건 또 달랐다.
콰쾅!
강기가 부딪히는 폭음에 귀가 따가웠다.
소마의 묵빛 검강은 혈랑아와 반월도의 강기를 연달아 깨뜨렸다.
“좋아, 좋아!”
소마는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혈랑이 인상을 팍, 쓰더니 기운을 일으켰다.
순간 혈랑아의 기세가 바뀌었다.
붉은 기운이 일어나 혈랑아를 따라 소마를 덮쳤다.
고벽후의 완월도 역시 원을 그렸다. 은은한 달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흥!”
소마가 코웃음 치더니 검을 허공으로 던졌다.
“아!”
보는 이들이 감탄성을 흘렸다.
검은 살아있는 듯 허공에 곧추서더니 좌우로 줄줄이 검형이 일어나 마치 벽처럼 소마의 앞을 가로막았다.
“허걱……!”
“……!”
귀영의 입이 딱 벌어지고, 무한의 눈도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듣도 보도 못한 무공이다.
“마왕검벽!”
고벽후는 소마의 무공을 알아보았다.
혈랑아의 혈기와 고벽후의 월기가 마왕검벽을 두드렸다.
콰쾅!
혈기와 월기는 마왕검벽에 가로막혀 터졌다.
마왕검벽도 깨져나갔으나 소마는 멀쩡했다.
“이것도 받아봐라!”
혈랑의 외침과 함께 핏빛 혈기가 화살처럼 쏘아갔다. 고벽후의 월기도 물밀 듯 밀려갔다.
“흡!”
소마의 전신에서 묵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혈랑의 혈기와 소마의 묵기, 고벽후의 월기가 어우러졌다.
기운들이 짙어지며 누가 누군지 보이지가 않았다. 번뜩이는 섬광과 연달아 터지는 굉음만 들려올 뿐이다.
‘아…….’
무한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고벽후가 절정이라고 말해준 후 은근히 자신의 무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 순간 여지없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격렬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살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무한이 보기에 세 사람은 생사결이 아닌 비무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원이 달랐다.
싸움이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따앙!
멀리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 가득 붉은 섬광이 터졌다.
먼 하늘에 붉은 연기가 번졌다.
순간 싸움의 양상이 달라졌다.
묵빛 기운이 맹렬하게 퍼져나가더니 굉음이 터졌다.
콰아앙!
허공이 진동하고, 세 사람이 뒤로 튕겨나듯 물러났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마는 멀쩡했으나 혈랑과 고벽후는 옷이 찢기고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두 사람이 합공하고도 소마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윽고 소마가 입을 열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재밌었다.”
소마가 검을 허공으로 던졌다.
검에 눈이라도 달린 듯 등 뒤에 맨 검집으로 들어갔다.
“아쉽게도 지금은 더 상대할 시간이 없구나. 나중에 보자꾸나.”
소마는 말을 마치자마자 붉은 폭죽 연기가 퍼진 하늘 쪽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