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51화 (51/250)

51화

“…….”

“묘하군. 묘해.”

무한이 대답하지 않자 소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한은 말없이 소마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소마가 물었다.

“경천십이식을 익혔겠지?”

소마가 등에 맨 검을 뽑아 날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오랜만에 검을 뽑았다. 경천십이식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지.”

그러더니 검을 늘이고 무한을 주시했다.

공격을 하라는 뜻이다.

무한은 소마의 의중을 몰랐으나 근육이 절로 긴장했다.

소마의 입꼬리에 예의 미소가 걸렸다.

“거절해도 괜찮다. 다만 비무를 한다면…… 삼 초를 못 받으면 죽고, 오초를 감당하지 못하면 불구가 될 것이다.”

이상한 제의였다.

비무를 하지 않으면 무사하고, 한다면 삼 초 안에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소마를 쳐다봤으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갈수록 짙어진다.

‘웃으며 사람을 죽인다더니 정말이네.’

표정이란 참 이상하다.

분명 섬찟한 제의인데 웃으며 말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한은 감숙지부로 와서 고벽후와 실전에 가까운 비무를 했다.

그러면서 경천십이식 초반 사식을 완전하게 익히고 중반사식까지 무난하게 펼칠 수 있다.

게다가 화정노의 지화령석에 의해 환골탈태 한 후 경천승운공의 성취도 나날이 높아져 오성을 넘어서고 있다.

소마의 무위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 초는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비무를 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마는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았다. 말하라는 뜻이다.

“고원의 맹약은 파기된 겁니까?”

소마의 웃음이 짙어졌다.

“내가 맹약을 체결한 자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그 말은 내가 맹약의 집행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맹약의 집행자?”

“맹약을 파기한 자를 처단하는 게 집행자의 임무지. 천하방의 집행자는 누구인지 모르겠군.”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검을 뽑았다.

스르릉.

소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좋아. 아주 바람직해.”

무한은 소마가 제의했을 때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차분히 경천승운공을 운기했다. 전신의 기운이 단전으로 몰려갔다.

“오너라.”

소마는 검을 뽑지 않았다.

무한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쉭!

삼재검의 찌르기 일초.

소마는 검이 다가오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면을 찔러가다 삼재보를 펼쳐 방위를 바꿔 소마의 왼쪽을 노렸다.

쉬쉬식!

머리를 노리고 찔러가던 검이 돌연 뚝 떨어지며 다리를 찔러갔다.

소마는 슬쩍 몸을 돌려 무한의 찌르기를 피했다.

‘역시 지금 삼재검의 빠르기로는 무리구나.’

쉬익!

무한의 기세가 바뀌며 기운이 공간을 휘저었다.

‘천의격!’

경천십이식 제일식.

소마의 미소가 짙어지더니 그대로 한 걸음 나아가며 옆으로 돌았다.

검세가 간발의 차로 비껴나갔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는데 적절한 회피였다.

무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의격을 알고 있어!’

경천십이식은 공격일변도의 초식이다.

상대가 검을 막거나 피하거나 상관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진다.

쉬이이익!

나아가는 기세 그대로 제이식 지천격으로 상반신을 노렸다.

소마가 검을 당겨 세웠다.

땅!

무한의 검은 정확히 소마가 세운 검면에 꽂혔다.

얇은 검면을 찔렀는데 마치 무쇠 벽을 찌른 느낌이었다.

내공의 차이가 컸다.

“……!”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한은 곧바로 검을 감아 회천격 후반부를 펼쳤다.

소마가 빙그르르 돌며 무한 옆에 바싹 붙었다.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지천격을 파훼하는 가장 적절한 초식이었다.

순간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

그리고 반대편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는 검.

삼재검이다.

예상치 못한 검로에 소마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사람은 물러나는데 검은 무한의 가슴을 노려왔다.

소리도 없이 찔러오는 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찌르기였으나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막는 순간 변식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무한이 무명신법을 펼쳐 피했으나 검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운중격.’

무한의 검이 사라지는 듯하더니 무형의 기운이 퍼지며 소마의 검을 막았다.

따다당!

검과 검이 수차례 격돌했다.

무한은 손아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충격에 황급히 검을 고쳐 잡았다.

충격은 컸지만 소마의 내력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내공 수위를 알고 있어.’

처음 공격을 검으로 막아내며 무한의 내공 정도를 파악하고는 그에 맞춰 내공을 쓰는 게 분명했다.

소마가 다시 검을 후려치니, 이번에는 바로 검파가 일어 파도처럼 전신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검식을 겨루자는 건가?’

소마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한이 파천격을 펼쳤다.

까강.

깡!

연달아 검이 부딪혔다.

순식간에 육 초가 지나갔다.

무한은 소마의 검세가 경천십이식을 유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무한이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경천십이식은 육초까지다. 칠초 뇌연격은 아직 검세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내공도 부족하다.

무한이 뇌연격을 펼치자마자 소마의 검세가 갑자기 바뀌었다.

공간이 소마의 검세에 휘말린 듯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무한은 자기도 모르게 뇌연격을 거두고 팔초 중천격을 펼쳤다.

콰앙!

기와 기가 충돌하며 기파가 터졌다.

“크읍.”

내장이 흔들리는 느낌에 무한이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소마가 돌연 뒤로 물러났다.

“제법이긴 한데 아직 멀었다.”

“…….”

“오늘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지.”

무한이 소마를 바라봤다.

“경천십이식을 알고 있었군요.”

“모를 리가 있나.”

소마가 납검하며 말했다.

“재미삼아 파훼법을 만들어봤는데 그럭저럭 쓸 만하군.”

‘재미 삼아?’

소마가 파훼법을 알고 있다면 계속 싸워봤자 의미가 없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파훼법이 있다고 반드시 검식이 깨진다고 볼 수 없으니까. 검이란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소마가 말했다.

“십 년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경천십이식을 대성해서 나를 찾아와라.”

소마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무흔이 서 있었다.

소마의 얼굴에는 예의 미소가 어려 있지만, 무흔을 살피는 시선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좋은 호위를 두었군. 재밌군. 재밌어…….”

소마가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리며 무흔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소마의 시선은 멀리 새벽빛이 터지는 동쪽을 향했다.

어둠이 갈라지는 사이로 한 사람이 말 달려오고 있었다.

소마의 시선을 따라간 무한은 오는 이를 대번 알아보았다.

‘고 대형?’

순식간에 다가온 고벽후가 마상에서 뛰어올랐다가 착지했다.

고벽후의 시선이 소마를 향했다.

“하하. 소천주가 직접 오셨을 줄은 몰랐소!”

소마가 고벽후를 응시하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멸마대주로군. 고벽후라고 했던가?”

“마천의 소천주가 알아주다니 참으로 영광이오.”

소마가 빙그레 웃었다.

“고원을 지배한다는 철혈의 매를 모르면 되겠나?”

“고원을 지배한다는 말도, 쳘혈의 매라는 이름도 감당하기 어렵소. 게다가 지금은 멸마대주도 아니오.”

“……?”

“해임됐소. 그러니 그저 이 고원의 사내 중 하나요.”

“흐음.”

소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작을 부리는군.”

“수작? 내가 생각하기에 수작은 그쪽에서 먼저 부린 것 같은데? 대체 이 사달을 일으킨 속셈이 뭐요?”

고벽후의 말이 짧아지고, 소마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나?”

고벽후가 손에 든 가죽 포대를 던졌다.

소마의 발치에 떨어진 가죽 포대가 열리고 사람의 머리통이 굴러 나왔다.

“이건 뭐지?”

“고원의 맹약에 따라 맹약을 어긴 자의 머리를 베어왔소.”

고벽후가 이어서 말했다.

“맹약대로 오백 리를 물러나 난주를 내주겠소.”

소마가 피식, 웃었다.

“일개 대주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이제 대주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고벽후가 품에서 철패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알 거요.”

“…….”

“철패를 가진 자가 맹약의 집행자라는 건 소천주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소마는 잠자코 철패를 보았다.

“고원의 맹약대로 처리했소. 이번 일은 여기서 끝냅시다.”

“…….”

소마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발치에 놓인 머리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자는 누군가?”

소마는 자신의 눈높이에 머리를 띄우고는 물었다.

“유곡선. 천하방 오장로요.”

“흐음.”

무한은 머리의 뒤통수만 보여 누군지 알 수가 없었는데 고벽후의 말에 크게 놀랐다.

‘어찌된 일이지?’

고벽후가 유곡선을 죽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팍!

소마가 손을 휘두르자 유곡선의 머리통이 박살이 났다.

“일개 장로가 맹약을 깼다?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나는 집행자일 뿐이오. 맹약을 어긴 자를 처벌했을 뿐이오.”

“하하. 듣던 것과 달리 의뭉스러운 사내였군.”

소마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썩어가는 머리통을 받고 끝내라? 내가 진실을 원한다면?”

“하하하, 나도 모르는 진실을 어찌 들려드린단 말이오? 원한다면 고원의 바람에 대해서 들려드리겠소.”

“재밌군. 재밌어. 재밌는 자로군.”

그러더니 고벽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들은 미끼에 불과한 거였어.”

“그렇소. 솔직히 처지가 딱하게 됐소. 아무튼, 그건 내 사정이고 당장의 일부터 마무리 지읍시다.”

고벽후는 마천의 소천주를 상대로 조금도 눌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때,

두두두두.

말을 탄 무리가 달려왔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이들이 일백은 넘어 보였다.

‘마적?’

무한은 무리가 마적임을 대번 알 수 있었다.

마적떼는 순식간에 다가와 속도를 줄였다.

가장 앞에서 달리는 자는 피처럼 붉은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삼십여 장 거리에 이르렀을 때 붉은 가죽옷이 손을 들자 마적떼가 멈춰 섰다.

붉은 가죽 옷 사내가 홀로 말을 몰아 천천히 다가왔다.

소마와 무한이 마주 하고 고벽후가 동쪽에 서 있었는데, 붉은 가죽 옷 사내가 서쪽 방위를 차지했다.

고벽후가 붉은 가죽옷 사내를 보고 웃었다.

“더럽게도 말을 듣지 않는군. 하긴 오지 말라고 하면 더 기를 쓰고 올 놈이지.”

붉은 가죽옷 사내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고벽후와 소마를 번갈아 보았다.

약간 큰 키에 늘씬한 몸, 풀어 헤친 머리를 띠로 묶었는데 갸름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생김새만 보면 준수하다고 할 자였다.

“흥! 너희가 수작을 부리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뒤통수 때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붉은 가죽옷 사내가 콧방귀를 끼고는 소마를 응시했다.

“그렇게 뚫어지게 볼 것 없어. 그가 마천의 소천주다.”

고벽후가 중간에서 소개하듯 말했다.

“저놈은 혈랑이라고, 이 근처를 배회하는 마적이요.”

혈랑은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있어 세상을 비웃는 듯 보였다.

“이쪽은 무한, 내 의제다.”

고벽후가 무한을 소개했다.

혈랑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무한이 가볍게 포권을 했다.

혈랑이 푸흐흐, 하고 웃었다.

“고 마귀의 의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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