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어둠에 묻힌 고원을 달렸다.
마천의 무력대주가 쫓아오는 걸 느꼈으나 초조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밤길을 말달리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제아무리 기마술이 뛰어나도 전력을 다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을 달리는 건 경신법이 떨어진다는 거겠지?
무한은 달리면서도 정보를 분석하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동시에 새삼 요산자 사부의 무명신법에 대해 감탄했다. 남다른 신법이 있다는 게 이렇게 유용할 줄은 미처 몰랐다.
잠시 후 앞쪽에 조약평 등 승룡대 궁수가 가는 게 보였다.
뒤에서 마천의 무력대주가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달은 없지만 별들이 빛을 발하며 고원을 비췄다.
저 멀리 협곡이 보였다.
먼저 출발했던 승룡대가 협곡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승룡대는 부상자들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저 무리에 합류한다면…….’
적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차라리 적을 유인하는 게 나도, 저들도 낫다.’
무한은 이 와중에도 홀로 도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지 않은 자신이 기특했다.
이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수많은 싸움을 치러야 할 것이고, 오늘 첫 싸움의 경험은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잠깐만요!”
무한이 앞서가는 조약평 등 승룡대 궁수들을 따라잡아 세웠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죠.”
승룡대 본대가 들어간 곳과 다른 협곡 길을 가리켰다.
“무슨 뜻이오?”
“잠시라도 시간을 벌어보자는 겁니다. 저쪽으로 적을 유인하죠.”
“그렇게 합시다.”
조약평이 동의하자 나머지는 말없이 따랐다.
협곡 입구에 다다른 무한이 뒤를 봤다.
한 사람이 미친 듯이 말을 달려오는 게 보였다.
마천의 무력대주다.
마천도들은 따라오지 못한 듯 홀로 달려왔다.
‘저자가 홀로 쫓아온다는 건 고수라는 뜻이겠지. 저자만 잡으면 잠시 추격을 멈출 수 있을 거야.’
무한이 승룡대원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를 기습한 놈들은 광풍대였네. 소천주 소마의 직속 무력대이지. 소마에게는 좌선우포라 불리는 심복이 있는데 저자가 광풍대주라면 소마의 오른팔이라는 광포일 걸세.”
조약평이 대답해줬다.
‘소마?’
무한은 소마가 아버지와 고원의 맹약을 체결한 소천주라는 걸 알고 있다.
‘웃으면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소마라지.’
고벽후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자가 소마일까?’
광풍대가 승룡대를 기습하여 난전이 벌어졌을 때 멀리서 다가오던 자.
어둠을 밀고 오듯 천천히 말을 타고 오던 이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엄중했다.
‘마천의 소천주까지 왔다면.’
따라온 무력대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군사부에서 세운 계책이 통했을까 싶었다.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한은 협곡의 이점을 살려 광포를 잡을 궁리를 했다.
‘소마의 오른팔이라면 전투 경험이 풍부한 고수일 터. 이 고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고원은 협곡이 갈래갈래 나 있어 길을 잘못 들면 헤맬 수 있다.
“이쪽으로!”
무한은 지세를 살피며 승룡대를 이끌었다.
요산자에게 배워 산천의 흐름을 아는 무한은 어둠 속에서도 지세를 가늠하며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여기는 막다른 길이오.”
길이 막히자 조약평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서너 장 넓이의 폭에 십여 장 길이의 협곡은 막힌 골목과도 같았다.
“일부러 이리 온 겁니다.”
무한이 막다른 길 입구 쪽을 가리켰다.
“입구 위쪽으로 올라가 은신했다가 광풍대주가 이리 들어오면 입구를 막아 주세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제가 길 안쪽에 은신하고 있겠습니다. 저자가 쫓아 왔다가 막다른 길이라는 걸 알면 함정인 줄 알고 돌아나가려 할 겁니다. 그때 화살을 쏴서 이목을 끌어주세요. 제가 기습을 하겠습니다.”
“화살이 없네. 아까 남은 화살을 모두 자네에게 줬네.”
무한이 자신의 화살통에서 남은 화살을 세어보았다.
세 발 남았다.
“저자는 못 잡더라도 말은 꼭 쓰러뜨려야 합니다.”
조약평이 새삼 무한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임기응변이 뛰어난 걸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오. 어디 소속이오?”
무한은 천무관 문하생이라고 하려다 문득 드는 생각에 둘러댔다.
“본방에서 왔습니다.”
“오!”
승룡대는 섬서지부의 무력대이다. 지부의 무력대는 은연중 본방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무한이 본방에서 왔다고 하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안을 지울 수 없었는지 우려를 표했다.
“저자가 정말 광풍대주라면 절정고수일 거요. 기습이 통하지 않을 수 있소.”
“도주하는 건 자신 있습니다. 화살을 날려 이목을 끈 다음 여러분은 바로 자리를 벗어나 본대를 찾아가십시오.”
“그럴 수는 없소. 혼자서 감당할 상대가 아니오.”
조약평이 고개를 저었다.
무한도 더 권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거들면 나을 것이다.
“일단 상황을 보고 대처하시죠.”
더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
광풍대주가 탄 말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승룡대원들이 일제히 경신법을 펼쳐 협곡 위로 올라갔다.
무한은 막다른 길 바위 뒤쪽에 은신했다.
히히힝!
말울음 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졌다.
광풍대주가 막다른 길임을 알고 말고삐를 채어 세운 것이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광풍대주는 도주하는 적들이 엉뚱한 길로 자신을 유인했다고 생각하곤 바로 말을 돌려 나가려 했다.
피웅!
광풍대주의 머리와 가슴을 노리고 두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흥!”
광풍대주가 커다란 도를 들어 화살을 쓸었다.
타탕!
화살이 비껴 나가자 뒤이어 비수 세 자루가 날아와 광풍대주와 말의 목을 겨누고 날아왔다.
“어림없다!”
광풍대주가 다시 도를 휘두르자 비수가 모두 튕겨 나갔다.
그런데.
히히힝!
광풍대주가 탄 말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광풍대주가 탄 말은 전마였다. 말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구가 덮여 있어 어지간한 화살은 뚫기 어렵다.
그런데 언제 날아왔는지 말의 앞발굽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조약평 등 승룡대원들도 만만치 않아서 세 발의 화살과 비수를 적절히 사용하여 말을 제압한 것이다.
“이 비겁한 놈들이!”
애마가 다치자 광풍대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고통에 겨워 날뛰는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화살이 박힌 부위를 살폈다.
가까이서 쏜 화살은 말의 앞발 뼈를 관통했다.
빠드득.
광풍대주가 이를 갈았다. 뼈가 다쳤으니 더는 달릴 수 없을 것이다.
광풍대주가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더니 곧바로 도를 휘둘렀다.
말은 그대로 목이 잘려 쓰러졌다. 애마의 고통을 덜어준 것이다.
“미안하구나. 너를 쏜 놈은 더한 고통 속에서 죽여주마.”
광풍대주가 이를 갈며 애마를 위로하고는 입구를 향해 소리쳤다.
“들었느냐? 네놈들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광풍대주가 도를 세우고는 천천히 입구로 향했다.
바위 뒤에 은신했던 무한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쉬쉭!
비수가 광풍대주를 노리고 날았다.
승룡대는 광풍대주의 이목을 끌어달라는 무한의 부탁을 착실히 따랐다.
무한은 무명신법을 펼쳐 소리 없이 다가가며 속으로 갈등했다.
사람을 직접 해하는 건 처음이다. 화살로 쏘는 것과 또 다르다.
상대가 수많은 승룡대를 죽인 마천의 무력대주이긴 하지만 뒤에서 기습한다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무한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앞에 있는 승룡대는 물론이고 본대까지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
‘죽여야 하나, 부상만 입힐까?’
잠시 망설였는데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기척을 죽여 다가갔으나 광풍대주가 뒤를 돌아봤다.
“이것도 함정이라고 판 것이냐? 너희가 나를 정말 우습게 봤구나!”
광풍대주의 전신에서 기파가 터졌다.
무한이 검을 고쳐 잡았다.
잠시 망설인 건 사치였다. 서늘해지는 가슴을 세우고 광풍대주를 바라보았다.
“…….”
어두운 협곡에 별빛이 내렸다.
광포와 대치하자 고벽후와 비무를 하던 공동이 떠올랐다.
희미한 별빛 속에서 수없이 비무를 했으니 지금 상황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마천의 무력대주라는 게 달랐다.
광포는 거한이었다. 전신에 흐르는 위맹한 기운에서 패도를 추구하는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들고 있는 도 역시 보통 도와 달리 도신이 두껍고 길었다.
“애송이를 희생양으로 내보내다니. 정말 비겁한 놈들이군.”
무한을 본 광포가 미간을 찌푸렸다.
“승룡대도 아니로군. 대체 너는 뭐냐?”
광포가 인상을 썼다.
“아직 어린놈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다. 살려줄 테니 가라.”
의외였다.
무한이 들은 마천도들은 노인이든 어린애든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죽이는 자들이었다.
광포는 무한이 말없이 서 있자 겁을 먹었다고 여겼는지 입구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와라! 애를 방패로 삼을 셈이냐?”
고함이 그치기도 전에 입구에는 다섯 명의 승룡대가 섰다.
앞에선 조약평이 말했다.
“나는 승룡대 일조장 조약평이다. 광풍대주 광포! 대주와 형제의 원한을 갚겠다.”
승룡대주 전조는 광풍대가 기습을 할 때 광포와의 싸움에서 죽었다.
“흥? 전조? 그놈은 오래 전에 내 손에 죽었어야 할 놈이었다. 오늘까지 살게 해줬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헛소리 마라!”
조약평이 검을 세웠다.
“고작 너희 다섯이 나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광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시간을 끌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다. 너희가 가려고 하는 곳이 감숙지부 아니냐? 그곳은 무사할 거라 생각하느냐?”
광포의 말에 조약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광풍대주와 함께 죽는다면 헛된 희생은 아니겠지.”
“크흐흐. 전조도 내 손에 죽었는데 하물며 그 수하가 나와 동귀어진한다고? 가소롭구나.”
광포가 돌연 일도를 사선으로 후려쳤다.
파앙!
기파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도가 허공을 갈랐다.
‘도기?’
무한은 광포의 도에서 엄청난 기가 뿜어 나오는 걸 느꼈다.
차착!
조약평과 승룡대가 일제히 몸을 날리며 도를 피했다.
도기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이나 마찬가지다. 형태가 없으니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등한 검기로 막거나 피하는 수밖에 없다.
조약평과 승룡대원들은 도기를 피해 구르거나 허공으로 솟구치며 광포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험해!’
완벽한 합격술 같았으나 무한은 승룡대원들이 위험하다는 걸 직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광포가 몸을 회전하더니 연달아 도를 세 번이나 휘둘렀다.
파파팡!
거센 도기가 사방으로 뻗쳤다.
“헉!”
승룡대원들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늦었다. 도기가 승룡대원들을 향해 파편처럼 비산했다.
조약평이 이를 악물고는 검을 휘둘렀다.
카강!
조약평의 검이 간신히 도기를 막아냈다.
그 역시 승룡대 조장이다. 검기를 쏟아낼 수는 없지만 검에 담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도기를 자유자재로 뿌리는 광포와는 격차가 컸다.
순간,
쉬이익!
무한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며 전력을 다해 지천격 일식을 펼쳤다.
광포는 뒤에서 오는 공격을 무시하려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앞으로 내려치던 도를 끌어 뒤쪽으로 후려쳤다.
무한은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 검에 실었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