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잠시라도 적을 저지해야죠.”
전경목이 다섯 사람을 호출했다.
“어서 부상자들을 인솔하여 가세요. 이 사람이 길을 알려줄 겁니다.”
무한은 귀영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일렀다.
귀영을 따라 승룡대가 떠나고 남은 다섯 사람이 다가왔다.
“승룡대 일조장 조약평이라고 하네.”
“무한이라고 합니다.”
조약평이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물었다.
“뭘 해야 하는가.”
“일단 바위를 찾아 은신하고 계시죠.”
무한은 승룡대 궁수 다섯 명을 고개 위에 배치했다.
그사이 어둠이 고원에 내렸다.
달이 아직 뜨기 전이라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신호를 하면 화살을 쏘면 됩니다.”
무한이 고개 바위 뒤에서 마천도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마천도들은 횃불을 밝히고 정렬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쪽에서 공격하는 기미가 없자 뒤쪽 지휘부 몇몇이 모여 이쪽을 가리키며 뭔가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척후조 두 사람이 튀어 올라왔다.
승룡대원이 검을 뽑으려 하는 걸 막았다.
“척후조는 일단 보내죠.”
“뭐?”
“일단 적을 안심시키자고요. 시간도 벌고요. 들키지 않게 숨을 죽이세요.”
무한은 좀 더 완벽히 은신했다.
척후조가 조심스레 올라왔다. 고갯마루에 선 척후조가 적이 없다는 걸 알자 화섭자를 켜고 횃불을 밝혔다.
멀리 승룡대가 가고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한 놈이 아래쪽 본진을 향해 수신호를 하며 외쳤다.
“놈들이 도주합니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렸다.
“쥐새끼들이 도주한다! 쫓아라!”
척후조가 승룡대 쪽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무한이 신호를 했다.
승룡대 궁수 두 사람이 활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피융!
피이이잉!
화살이 척후조의 등판에 박혔다.
척후조는 방심했다가 뒤에서 날아온 화살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무한이 승룡대 궁수들을 향하여 수신호를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적이 올라올 겁니다. 신호를 하면 일제히 적 조장들을 노리세요.”
무한은 고갯마루 바위 뒤에 숨어서 아래를 살폈다.
마천도들이 횃불을 들고 어둠을 헤치며 벌떼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승룡대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쉬익! 쉭!
“크윽!”
“컥!”
앞서 달려오던 마천도 몇 명이 거꾸러졌다.
무한도 활시위를 당겼다가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마천도를 향하여 쏘았다.
피잉!
횃불을 든 마천도가 가슴에 박힌 화살을 맞고 뒤로 밀려나며 이쪽을 봤다.
십여 장 거리였으나 무한과 크게 부릅뜬 마천도의 눈이 마주쳤다.
횃불에 비친 눈빛이 무한의 가슴에 콱, 박혔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눈빛을 처음 본 무한이 잠시 멍하게 섰다가 적들이 외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매복이다!”
“횃불을 꺼라.”
마천도들이 화살을 쳐내며 옆으로 퍼졌다.
그사이 횃불을 모두 껐다.
무척이나 빠른 대응이었다.
‘조장들을 화살로 잡기는 무리구나.’
조장으로 보이는 자들은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을 용케도 쳐내며 수하들을 독려했다.
“조장들은 포기하고 수하들을 노리세요.”
무한이 바로 전략을 바꿨다.
피웅!
피이잉!
승룡대 궁수들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다시 몇 명이 고꾸라지자 올라오던 마천도들이 십여 장 뒤로 물러났다.
마천도들 뒤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비열한 놈들! 적은 몇 명 안 된다! 밀고 올라가라!”
마천 무력대주는 뒤에서 지휘하면서도 화살의 숫자를 알아챈 모양이다.
무한이 바위 뒤에서 나오며 승룡대원들을 불렀다.
“이제 됐습니다.”
“아직 화살이 남았네.”
“적이 대비하고 있으니 별 효용이 없을 겁니다. 나중에 유용하게 써야죠. 그보다 혹시 신호탄이 있습니까?”
조약평이 품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무한은 과감하게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펑!
신호탄이 터졌다.
“이제 가죠.”
무한은 조약평 등과 함께 승룡대가 간 방향으로 전력질주 했다.
“원군이 오는가?”
신호탄을 흘깃 본 조약평이 무한에게 물었다.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살려면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무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적이 신호탄이 터진 의미를 헤아리느라 지체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실제로 잠시 시간을 벌었다.
마천도들이 고갯마루로 올라선 것은 한참 후였다.
무한은 한참 달리다 뒤를 돌아봤다.
고갯마루에 마천의 무력대주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감히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마치 곰이 포효하는 듯했다.
내공을 실은 마천 무력대주의 고함소리가 고원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병법을 아는 자였으면 좋겠는데…….’
병법에 이르기를 밤중에 적을 추격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
마천 무력대주가 머리를 쓰는 자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머리보다는 힘을 쓰는 자인 모양이다.
어이없는 수에 당하자 분노한 마천 무력대주가 연신 고함을 질렀다.
“쫓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어둠 속에서도 흑의를 입은 마천의 무리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앞서간 승룡대는 부상자들이 있어 속도가 떨어진다.
마천도들이 전력을 다하면 얼마 가지 않아 따라 붙을 것이다.
야트막한 오르막길, 좁아진 길목에서 무한이 멈추더니 승룡대 궁수를 향해 말했다.
“화살을 나눠 주시죠. 제 화살이 다 떨어졌습니다.”
“뭘 하려고 그러시오?”
조약평이 물었다.
“조금이라도 지체시켜봐야죠.”
“그럼 내가 하겠소.”
“아닙니다. 신법은 제가 빠릅니다. 여러분은 먼저 본대를 따라 가시죠.”
“그래도 되겠소?”
조약평은 무한이 아직 어린 나이인데 홀로 남겨두는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제가 남은 이유는 신법이 가장 빠르기 때문입니다. 시간 없습니다. 어서 움직이세요.”
승룡대 궁수들이 화살을 건네고 본대의 뒤를 따라 질주했다.
무한은 고개 위에서 저 멀리 마천의 무리가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마천의 무리는 이제 횃불을 들지 않고 달려왔다.
불을 밝혔다가 화살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어둠속이라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사정거리에 들어온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달려오는 적을 향해 선 무한은 이상하리만치 머리가 맑았다.
지금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활시위를 겨눴다.
딱히 누구를 겨눌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위협을 느낄 정도면 된다.
활시위를 당기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여기에 뇌전의 기운을 실어보면 어떨까?’
고벽후와 비무를 하면서 기의 운용 능력이 넓어졌다.
생각이 미치자마자 뇌전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경락을 타고 올라온 기가 활시위를 잡은 손을 통해 화살까지 전해가는 게 느껴진다.
화살에 뇌기가 어린 듯했다.
활시위를 놓았다.
피웅!
화살이 날아갔다.
뇌기는 화살이 시위를 떠나자마자 사라졌다.
화살대는 나무다. 나무에 뇌전의 기운을 담는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다시 활시위에 화살을 재고 이번에는 경천승운공을 운기하며 오행 목(木)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운을 화살에 담는다는 심정으로 활시위를 놓았다.
파아앙!
기운이 실린 화살은 날아가는 소리도 다른 것 같았다.
게다가.
파악!
대단하지는 않지만 기파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혹시나 했는데 정말 기운을 담아 날려 보내는 게 가능한 걸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마천의 무리에서 소란이 이는 게 느껴졌다.
“멈추지 마라!”
무력대주가 외쳤다.
많은 적도 아니고 고작 화살 하나다.
하지만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화살은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마천도들은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앞을 주시하며 달렸다.
무한은 계속해서 목의 기운을 담아 화살을 날렸다.
적을 저지하면서 기를 사물에 싣는 수련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실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이 아니었다.
적을 앞에 두고 수련한다며 정신을 팔고 있다.
놀랍게도 무한은 그런 자신을 느끼고 있다.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관조한다고나 할까.
“컥!”
어둠 속에서 달려오던 그림자 하나가 거꾸러지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이 달려오는 와중에 들려온 신음이 무한의 귀에 꽂혔다.
“……!”
그제야 무한은 자신이 극도로 흥분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아까 자신의 화살에 죽어가던 마천도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게… 첫 살인이었을까?’
따지자면 그 직전 자신의 지시로 승룡대가 쏜 화살에 죽은 척후조가 처음 살인이 아닐까.
아니, 그 이전 승룡대를 구하러 내려가며 쏘았던 화살에 누군가 쓰러진 걸 본 듯도 하고.
일행과 고갯마루에 당도하여 승룡대가 무참히 죽어나가는 걸 봤을 때, 임기응변이 절로 떠올랐고 주저 없이 실행에 옮겼다.
무모한 시도였으나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대로 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십 명의 적이 달려오고 있는데 화살로 저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은 차분하게 화살을 날리며 화살에 기운을 싣는 수련을 하고 있다.
마치 지금 상황을 외면이라도 하듯, 놀라우리만치 흔들림 없이 화살을 날린다.
‘이건 평정심이 아니야.’
무한은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걸 깨닫자 화살 쏘기를 멈췄다.
사물에 기를 담는 건 발경과는 차원이 다르다.
책에서 본 바로는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잠시나마 사물에 기운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손에 쥐거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술잔이나 단도 같은 것에나 가능하다.
‘화살에 기운을 담는다는 건 천하제일인도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부질없는 짓인데 몰두하고 있는 건…….
‘두려운 건가?’
첫 살인에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고벽후와의 비무는 무척이나 격렬했지만 끝나고 나면 후련하고 뿌듯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싸움은…….
무한의 지금 상태는 일종의 주화입마와 비슷했다.
눈앞에서 악귀처럼 서로를 죽고 죽이는 광경과, 그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또 하나의 악귀가 되었다는 정신적인 부담에 엉뚱한 잡념으로 생각이 새어나가는 중이다.
“……!”
고벽후와의 비무를 떠올린 게 천우신조였다.
떠나기 전 성벽에서 술을 마시면 했던 고벽후의 조언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나 보다.
고벽후를 연상하자 불현듯 떠올랐다.
- 적을 이해하는 마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마음, 그리고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
지금 적은 어떤 생각이지?
나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바를 아는 마음이라고 했지.
동료…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밀려들었다가 저 뒤 어딘가를 달리고 있을 승룡대가 떠올랐다.
순간, 무한은 다시 시위에 화살을 재었다.
지금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무한이 이를 악물고 시위를 당겼다.
파앙!
쉬이익!
화살이 날아갔다.
“크윽!”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
동시에 고함이 터졌다.
“대체 어떤 새끼냐! 나와 일합을 겨뤄보자!”
마천의 무리에서 우렁찬 욕이 터지더니 누군가 말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천의 무력대주였다.
무한은 미련 없이 뒤로 돌아 달렸다.
아슬아슬했던 주화입마 상황을 벗어나자 바로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은 것이다.
적이 원하는 건 자신의 죽음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건…….
‘살아서 검천부로 귀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