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백발노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나를 위해서 미끼가 되겠다고? 그걸 믿으란 말이냐?”
무한이 냉소를 터뜨렸다.
“내가 생면부지 노인을 위해 목숨을 버릴 것 같습니까?”
팔자수염 중년인이 무한을 보았다.
그는 백발노인의 신분을 안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무한이 죽을 까봐 염려했다.
“나는 승룡대에게 알리러 가는 겁니다. 노인장이 이미 빠져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야 그들이 퇴각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노인장은 나와 아무 상관없지만 승룡대는 천하방 무력대입니다. 그들이 사지에서 죽기를 기다리게 둘 순 없지요.”
백발노인의 날카로운 눈이 무한에게 꽂혔다. 잠시 뚫어져라 보더니 휙,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가자!”
팔자수염의 중년인이 마부석에 오르고 마차는 다시 바삐 달려갔다.
“우욱!”
하기주가 피를 토하고는 혼절했다. 그동안 참고 있었던 듯했다.
“조장!”
백상인이 부축하며 불렀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강소소가 재빨리 하기주를 진맥하고는 말했다.
“내상이 깊어.”
그러면서 자신의 약낭에서 환약을 꺼내 먹였다.
“죽지는 않을 거야.”
“정말 무서운 고수였어. 살아난 것만도 다행이야.”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발노인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자신도 마찬가지 신세였을 것이다.
“너는 괜찮아?”
백상인이 무한에게 말했다.
“응, 보다시피.”
무한이 검을 들어 보였다.
“너, 대, 대단하구나.”
형소가 떠듬거리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한이 형소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천무관 삼재검수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잖아.”
무한이 말을 끌고 왔다.
“조장이 중상을 입었어. 임무 끝난 거 아니야?”
“아니.”
백상인의 말에 무한이 짤막하게 대답하고 형소에게 말했다.
“소소와 네가 조장을 모시고 난주로 가.”
“난주?”
“지금 상황은 감숙지부도 위험해.”
백상인이 저지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귀환하려면 감숙지부로 가야지.”
“방금 봤잖아. 마천 전향자도 감숙지부를 피해서 갈 거야.”
“뭐라고?”
“노인은 마천의 추적대가 어느 정도의 전력인지 알고 있어. 아마 감숙지부도 상대가 안 될 거야. 그러니 우회할 게 분명해.”
백상인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럴 리가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아.”
그 역시 저만한 고수가 쫓긴다는 게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형소가 물었다.
“그, 그럼 우리는 어떡해야 해?”
“소소와 형소가 조장을 호위하고 난주로 가. 은신처를 구하고 의원부터 찾아.”
그러고는 백상인에게 말했다.
“감숙지부로 가서 상황을 전해. 마천의 전향자가 뒤통수 쳤다고.”
“너는?”
무한이 백발노인이 오던 길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승룡대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지.”
승룡대는 마천과의 공유지역에 있다. 이는 마천의 무력대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표적이 된다는 뜻이다.
강소소가 말했다.
“너 혼자 간다고? 미쳤어?”
“천하방 형제들이야. 진정 형제라고 생각한다면 가야 해.”
강소소는 무한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형제라고?’
천하방 사람들은 늘 형제라고 떠들지만 사실 말뿐이라고 생각해왔다. 강소소 본인조차 진정으로 형제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한이 형제의 의를 말하니 놀랍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했다.
무한은 하기주를 형소의 말에 태웠다.
“떨어지지 않게 잘 부축해.”
형소와 강소소가 떠나고 뒤이어 백상인이 감숙지부로 되돌아갔다.
홀로 남은 무한이 한곳을 응시하며 손짓을 하였다.
멀리 떨어진 바위에서 귀영의 머리가 쑥, 나왔다. 귀영은 잠시 주춤하다 몸을 날려 다가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이제부터 함께 움직여야겠습니다.”
무한이 하기주의 말을 가리켰다.
“타고 따라오세요.”
그렇잖아도 경공으로 말을 타고 가는 무한을 쫓느라 힘들었던 귀영이 반색하며 말에 올랐다.
‘무흔이야 경공이 차라리 편할 테고.’
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가 무흔이 은신하고 있을 텐데 알 수가 없다.
“가죠.”
무한이 말고삐를 채어 달려 나가고 뒤이어 귀영이 따랐다.
해가 질 무렵 승룡대가 진을 친 곳에 당도했다.
달려가던 무한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고개만 넘으면 승룡대 주둔지인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무한이 말에서 내려 고갯마루 바위 뒤에 은신한 뒤, 아래쪽을 살폈다.
“아!”
고개 아래는 분지 형태의 골짜기였다.
승룡대는 분지 한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막사가 보였다.
천으로 세운 막사들 사이로 무인들이 우왕좌왕 오가는 모습과 진내를 휘젓고 있는 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흑의를 입은 무리는 대략 일백 명 정도였으니 승룡대와 비슷했다.
그러나 기세는 현격히 차이가 났다.
흑의인들은 이리떼와 같았고 기습을 받은 승룡대원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막사에서 튀어나오다 바로 칼을 맞고 쓰러지거나, 병장기도 없이 맨손으로 적을 맞아 싸우다 팔이 잘려나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참혹했다.
무한은 무력대 간의 서로 죽고 죽이는 참상은 처음 봤다.
‘이런 게 전쟁이구나.’
착잡한 시선으로 살펴보는데 저 멀리, 한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치열한 전투 현장과 어울리지 않게 유유자적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승룡대 주둔지를 향해 느릿느릿 유람하듯 다가오는데, 왠지 불길한 어둠이 서서히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천목혈이 찌릿, 하더니 그 사람이 오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귀영도 다가와 아래쪽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끝장났군요. 대주가 죽은 모양입니다.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있어요.”
“…….”
“이미 늦었습니다. 돌아가시죠.”
“그럴 수는 없죠.”
잠시 전황을 살피던 무한이 귀영에게 말했다.
“백여 장 정도 뒤로 갔다가 모포로 길바닥을 쓸며 달려오세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마대가 달려오는 것처럼 먼지를 피우라는 말입니다.”
“…….”
귀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내가 내려가서 원군이 온 것처럼 외치고 승룡대 전력을 모을 겁니다.”
“이런 수가 통할까요?”
무한이 하늘을 가리켰다.
“마침 시야가 불분명해지는 초저녁입니다.”
“그래서요?”
“이때는 멀리 있는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렵죠. 그걸 이용하는 겁니다.”
귀영이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을 따라다니다가는 제 명에 죽기 어렵겠군.’
무한의 호위직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서둘러요.”
무한이 재촉하자 귀영이 마지못해 말을 몰고 뒤로 달려갔다.
이어 모포를 풀어 바닥에 펼치고, 줄로 말안장과 이었다.
무한이 수신호를 하자 귀영이 말을 달렸다.
귀영이 말을 몰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먼지를 피웠다.
메마른 황토고원이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무한은 말에 올라 안장에 매어둔 활을 들었다.
화살에 헝겊을 말아 기름을 담은 가죽주머니에 담갔다가 꺼내서 불을 붙였다.
무한은 발로 말 옆구리를 차서 앞으로 달려가며 불붙은 화살을 활시위에 겨눠 당겼다.
피융.
휘리릭.
불붙은 화살이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질러가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무한이 말을 달려 고개 아래로 내려가며 크게 소리쳤다.
“원군이 왔다!”
“승룡대는 원군과 합류하라!”
연신 내력을 담아 고함을 질렀다.
우왕좌왕하던 승룡대원들이 무한이 달려오는 걸 봤다. 고개 뒤로 먼지구름이 무성하다.
적어도 일백 기병이 달려오는 기세였다.
“원군이 왔다!”
“원군 쪽으로 합류한다!”
승룡대 곳곳에서 고함이 터졌다.
“후퇴한다! 조별로 뒤를 경계하며 물러난다!”
승룡대원들도 허수아비들이 아니다. 기습을 받아 우왕좌왕하다가 살길이 생기자 필사적으로 적을 물리고 몸을 뺐다.
절망에 빠졌다가 희망이 생기자 기세가 바뀌었다.
두두두두!
무한은 말을 달리며 연신 화살을 날렸다.
피융!
마천도들이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으나 승룡대원을 쫓는 기세는 주춤했다.
승룡대가 무한 쪽으로 몰려들며 대형을 이루자 적들도 더 이상 기습의 이점을 누리기 어려웠다.
그때 마천의 무리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적이 온다. 진형을 갖춰라!”
내공을 담아 외친 소리가 분지를 쩡쩡 울렸다.
‘저자가 대주로구나.’
남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마천도들을 독려했다.
“진형을 갖추고 적을 맞아라!”
마천도들이 대주의 말을 복창하며 승룡대 추격을 멈추고 진형을 갖춰나갔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느슨해졌다.
승룡대를 독려하며 달려온 이가 무한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승룡대 부대주 전경목이오. 마침 적절하게 와줘서 고맙소. 어디서 온 형제들이요?”
“감숙지부에서 왔습니다.”
무한이 답했다.
“몇 명이나 왔소?”
격전을 치른 전경목은 피투성이였다.
“고개까지만 올라가면 됩니다.”
무한은 자세한 사정은 일러주지 않고 어서 고개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전경목이 승룡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고개 위로 올라가 전열을 정비한다! 원군과 함께 동료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무한은 말에서 내려 부상을 입은 사람을 태웠다.
무한은 승룡대원들과 함께 고개 위로 올라갔다.
마천의 대주가 외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얼마든지 오너라. 이 고원이 너희들 무덤이 될 것이다.”
무한이 뒤를 봤다.
대열을 갖춘 마천도들의 진영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고원을 뒤흔들었다.
“궁수 앞으로!”
누군가 외치자 궁수들이 전방으로 나왔다.
마천도의 입장에서 보면 지형상 아래쪽에 있으니 불리했다. 그러니 궁수들을 선발로 내세워 선두를 무너뜨릴 생각인가보다.
마천도들은 정말 원군이 오는 걸로 알고 대비했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으나 아무도 시도하지 않을 전술이니 승룡대나 마천 무력대도 깜박 넘어간 것이다.
무한이 신법을 펼쳐 먼저 고개 위로 올라갔다.
혹시나 먼저 올라간 승룡대가 실상을 알아채고 당황해하다 적이 눈치라도 채면 곤란했다.
“원군은?”
실제로 먼저 올라온 승룡대원이 황량한 고개 뒤편을 보고 당황하였다.
“쉿! 조용히 하고 어서 달리기나 하세요.”
뒤이어 올라온 전경목도 황당해하였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저는 감숙지부의 전령입니다. 기습을 당하는 걸 보고 임시변통을 한 것뿐입니다.”
“……?”
“길게 생각할 시간 없습니다. 적이 눈치채고 공격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네. 여기서 정비하고 적을 막을 것이네.”
전경목이 고개를 저었다.
무력대 부대주다운 결정이다.
“그러다 모두 죽습니다.”
“무력대의 무인이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병법에 적이 강하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
“감숙지부에 현무대가 와 있습니다. 그들과 합류하여 싸우는 게 낫습니다.”
전경목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습을 받은 승룡대원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전경목이 마지못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일단 감숙지부로 간다!”
무한은 귀영을 말에서 내리게 하고 중상을 입은 두 사람을 자신과 귀영의 말에 태웠다.
무한이 전경목에게 말했다.
“먼저 가시고 활을 잘 쏘시는 다섯 분만 남겨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