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44화 (44/250)

44화

하기주가 앞으로 튀어나가며 백발노인의 검을 막았다.

채채챙챙!

“크윽”

연달아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하기주가 신음성을 터뜨리며 튕겨나갔다.

단 한 차례 접전이었다.

노인은 가볍게 손을 쓴 것뿐이었는데, 하기주는 전력을 다해 막아야 했다. 그러고도 힘에 부쳐 자기도 모르게 밀려났다.

백발노인의 눈빛이 번뜩였다.

“오호? 막아? 제법이구나.”

무한은 백발노인의 무위에 크게 놀랐다.

‘검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거기다 기괴한 검로까지!’

무한이 고수로 꼽는 이가 고벽후다. 백발노인이 풍기는 무위는 고벽후보다도 한 줄 윗선이라는 감이 스쳤다.

‘세상에는 정말 고수가 많구나!’

그 검을 막은 하기주도 대단했다. 하기주의 무공을 보기는 처음인데 예상 밖이다.

백발노인이 비틀거리는 하기주를 향해 말했다.

“중원 검파 같은데? 어디서 왔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오?”

하기주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하긴, 곧 죽을 놈이 어디서 왔는지 알 필요는 없지.”

백발노인이 다시 검을 겨누자 하기주가 굳은 얼굴로 검을 세웠다.

백발노인이 검을 쭉 뻗었다.

단순한 찌르기.

가볍게 다가오며 일검을 찔렀는데 이미 내상을 입은 하기주는 감히 부딪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백발노인의 검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오며 집요하게 하기주의 심장을 노렸다.

하기주가 벼락같이 검을 감아 백발노인의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허공을 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백발노인의 검은 여전히 하기주를 겨누고 다가가는 중이다.

‘어찌된 일이지?’

분명 치는 걸 봤는데 검이 부딪히지 않았다.

하기주가 다시 한 발 물러나며 검을 내려쳤다.

무한은 백발노인이 살짝 손을 비틀자 검이 순식간에 회전하였다가 제자리로 온 걸 봤다.

‘손이 정말 빠르다.’

하기주는 이번에도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뒤로 빠지려 했다.

그러나 백발노인의 검이 하기주를 놔주지 않았다.

느린 듯하면서도 여전히 하기주의 심장을 향해 밀고 들어왔다.

재차 검을 치려던 하기주가 쿨럭, 입에서 피를 한 모금 토하면서 비틀거렸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연달아 전력을 다했다가 상세가 도진 것이다.

상대가 쓰러지기 직전임에도 백발노인의 검은 비정하게 심장을 노리고 뻗었다.

순간,

쉬이익!

무한이 불쑥 끼어들며 검을 내리쳐 백발노인과 하기주의 중간을 끊어냈다.

심의삼재검 천의 도.

백발노인의 눈이 힐끗 무한을 본다 싶었다.

쉭!

백발노인의 검을 내리쳤으나 실체가 없는 허상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

하기주 대신 백발노인을 막아선 무한은 전신이 난자당하는 듯한 기감을 느꼈다.

동시에 왜 하기주가 허공을 치면서도 내상이 가중되었는지를 깨달았다.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쉬쉬쉭!

무한은 순식간에 검을 내리치고, 좌우 비껴 치고, 그어 치고, 역삼재검까지 사방팔방으로 폭풍처럼 펼쳤다.

깡!

다행히 오른쪽 무릎 쪽에서 백발노인의 검이 걸렸다.

‘으윽!’

무한은 손목을 타고 전해오는 찌르르한 경기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 검을 세웠다.

“……?”

백발노인은 자신의 검이 막히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무한을 봤다.

무한이 찰나의 시간을 벌어준 사이 강소소와 백상인, 형소가 달려와 하기주를 부축하여 끌고 갔다.

무한은 그 자리에 서서 백발노인을 주시했다.

백발노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무한을 보았다.

“넌 뭐냐?”

“…….”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기를 퍼뜨리며 전신의 감각을 깨웠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

“다시 한 번 막아볼 테냐?”

백발노인의 눈빛이 마치 검으로 찌르는 듯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무한은 대답 대신 검극을 내렸다.

백발노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왼발이 슬쩍 뒤로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에 따라 무한의 몸도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백발노인이 검을 감으며 사선으로 내리쳤다.

검의 처음만 보였을 뿐 이내 형체가 사라지고 예리한 검기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촤아아악!

무한은 방향을 바꿔가며 심의삼재검 천지인의 도를 연달아 세 번 중첩하여 펼쳤다.

검에 기가 실리며 은은한 기운이 형성되었다.

채채챙!

검과 검이 부딪히며 파열음이 터졌다.

놀랍게도 무한은 밀리지 않았다.

“…….”

백발노인이 바로 검을 회수하고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무한을 보았다.

“그 단순한 검으로 내 검을 막아?”

“…….”

“내력이 있는 놈 같은데…… 사문을 말할 수 있느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쉽지 않았습니다. 노인장께서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백발노인의 미간이 내천자를 그렸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다니.”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무한은 백발노인과 부딪힐 때 기운이 불안정하다는 걸 느꼈다.

고벽후와의 실전 비무 이후 기를 다루는 능력이 일취월장한 무한이다. 혹시나 싶어 넘겨짚었는데 백발노인의 눈에 흉흉한 빛이 돌았다.

“내가 여기 있는 놈들을 죽이지 못할 거라 여기는 거냐?”

“내상을 입고 쫓기는 분께서 그럴 시간이 있으십니까?”

“내가 쫓기는 건 또 어찌 알았지?”

“방금 살인멸구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한의 시선이 백발노인의 이마를 향했다.

“미간에 어린 묵빛 기운이 예사롭지 않군요.”

백발노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네 말대로 나는 내상을 입고 쫓기고 있는 처지다. 그러니 너희들이 죽어 입을 닫아줘야겠다.”

“저라면 다른 선택을 하겠습니다. 노인께서 전력을 다하신다 해도 저는 십여 초는 막을 수 있습니다.”

무한이 마부석에 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은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겁니다.”

마부석에 있는 사내가 흥미로운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합공을 하겠다는 거냐?”

백발노인이 가소롭다는 듯 말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천하방 사람들입니다. 앞쪽에 승룡대라는 무력대가 있고 뒤에는 감숙지부가 있지요.”

천하방 사람이라는 말에 듣고 있던 마부석에 앉아 있던 팔자수염의 중년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무한이 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곳 다 한나절 거리이군요. 하지만 각자 나뉘어 전력으로 달리면 반나절로 단축할 수 있겠지요. 서로 방향이 다를 텐데, 노인께서는 어느 쪽을 쫓으시겠습니까?”

“네놈은 죽어도 된다는 뜻이냐?”

백발노인이 무한을 노려보았다.

“힘이 부족하면 어쩔 수 없지요. 다만 노인께서도 대가를 치르실 게 분명하니 그나마 위안이 되겠군요.”

“그놈 참 맹랑하군.”

백발노인이 중얼거렸다.

상황이 무한 말대로 돌아가면 확실히 곤란하게 될 것이다.

백발노인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다.”

“뭡니까?”

“나는 천하방의 초청을 받아 가는 중이다. 너희가 천하방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 죽이지는 않겠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백발노인의 행색이나 행동이 아무래도 마천에서 넘어온다는 전향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때 팔자수염 중년인이 다가와 백발노인에게 말했다.

“어르신, 갈 길이 멉니다. 어서 가시죠.”

이미 천목혈을 극성으로 열어놓은 상태다.

백발노인이 망설이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럴 땐 탁 까놓고 말하는 게 낫다.

“제가 생각하기에 노인께서는 마천의 고수이고 마천을 배반하여 쫓기는 모양이군요.”

그 말에 백발노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눈에서 싸늘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어린놈이 기어이 죽을 길로 들어서는구나.”

이제 천하방 사람이든 말든 죽이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때 팔자수염의 중년인이 끼어들었다.

“귀하가 천하방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명을 받고 두 분을 호위하러 왔습니다.”

“뭐라고?”

“…….”

백발노인이 흠칫, 하더니 팔자수염의 중년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고작 어린 놈 다섯이 나를 호위한다고? 천하방이 나를 우습게 아는 건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팔자수염 중년인이 손을 저어 부인하고 물었다.

“호위를 하러 왔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분명 멸마대를 요청했는데 어찌된 일이지?”

“우리야말로 당황스럽군요. 천하방 승룡대가 앞에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까?”

“흥! 그놈들이 어떻게 나를 호위한단 말이냐? 승룡대라면 섬서에 있는 놈들 아니냐? 감숙 지리나 알고 있을지 모르겠군.”

백발노인이 말하자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승룡대를 추격대에게 미끼로 던져주고 감숙지부로 바로 향하신 것이로군요.”

“…….”

백발노인은 물론 팔자수염의 중년인도 부정하지 않았다.

무한이 팔자수염의 중년인을 향해 말했다.

“천하방 분이시니 분명 명을 받고 움직이시는 거겠죠? 그런데 명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니 걱정입니다.”

“뭐가 걱정이란 말이냐?”

무한의 뜬금없이 말에 백발노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승룡대만으로는 마천의 추격자들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

“추격하는 마천의 세력이 얼마나 됩니까?”

팔자수염 중년인이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소속이 어딘가?”

“그건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죠. 두 분 역시 이름을 밝힐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무한은 이름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두 분이 승룡대를 우회할 만큼 마천의 추격이 바싹 붙었다는 뜻이겠지요? 추격자는 노인장이 살인멸구까지 할 만큼 강한 자이기도 하고요.”

백발노인과 팔자수염의 중년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그냥 지나치는 게 좋을 듯하군요. 여기서 우리를 죽이거나 제압해봤자 오히려 일만 커질 겁니다.”

팔자수염 중년인이 물었다.

“소형제의 안목이 참으로 날카롭군. 감숙지부에서 왔다니 하나 묻겠네. 감숙지부는 상황이 어떤가?”

무한의 시선이 팔자수염 중년인을 향했다.

“어차피 지부로 가실 생각이 아니잖습니까?”

팔자수염 중년인이 흠칫했다.

그 표정에서 무한은 그들이 감숙지부도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작전을 마음대로 바꿨다는 건 이자의 신분도 녹녹치 않다는 뜻이지.’

팔자수염 중년인에게는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무한은 백발노인이 마천 수뇌부 중에서도 수뇌부라고 판단했다.

그러지 않으면 팔자수염 중년인이 작전을 무시하고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시던 길 가시죠.”

백발노인은 아직도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무한이 말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마천이 노인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려면, 우리가 승룡대에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적의 이목을 끌겠죠.”

“…….”

“감숙에 마천의 이목도 상당수라고 들었습니다. 노인장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돌발행동을 하신 게 아닙니까? 그게 통하려면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움직여줘야죠.”

“일리가 있군요.”

팔자수염 중년인이 백발노인에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