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고원의 맹약!
심군하와 소마와 맺었다는 정전협정이다.
당시 대치하던 전선을 경계로 각각 백 리 이내는 공유지역으로, 다시 일백 리까지는 무력대 하나만 주둔하자는 게 골자였다.
“멸마대를 해체하였으니 승룡대는 천하방을 대표하여 이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소. 하지만 현무대까지 있다면 다르지. 분명 마천에서 꼬투리를 잡을 것이오. 천무관 문하생들을 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오.”
유곡선의 아전인수 격 해석에 우문조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 조장은 정찰을 가장하여 호위인사를 데리러 가고, 나머지는 조별로 나뉘어 사방으로 정찰 나간다.”
“내 예상이 맞는 것 같구나. 이런 야비한 수를 쓰다니.”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 하기주가 탄식하며 말했다.
“조원을 운용하는 건 내 권한이다. 너는 지부에 남아 연락조를 맡는 게 좋겠다.”
그러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체 나를 어찌할지 봐야겠습니다.”
조원들만 사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무한의 굳은 표정에 하기주도 더 말리지 못했다.
하기주가 조원들을 불러 일렀다.
“승룡대가 주둔하는 곳은 여기서 한나절 거리지만 길이 험하니 왕복 이틀 잡아야 한다. 각자 건량과 무기를 충분히 챙겨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
모두 해산하자 무한은 고벽후를 찾았다.
‘이상하네.’
멸마대원들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직위해제 되었는데 정찰 나갔을 리도 없고.
‘설마 다 돌아간 건 아니겠지.’
유곡선은 멸마대를 직위해제 하고 처벌이 있을 때까지 감숙지부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외곽에 있나?’
무한이 바깥쪽 흙집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고벽후는 지부 외곽 흙집에서 연추산과 오상, 장초와 홍염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한이 들어가니 고벽후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명이 떨어졌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무한이 말하자 연추산이 인상을 썼다.
“대주, 쟤들 죽는 거 보고만 있을 거요?”
“저들도 이제는 무인이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책임져야지.”
고벽후가 비스듬히 누워 술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막내는 챙겨야 하지 않을까요?”
장초가 무한을 보며 말했다.
“무한, 저놈이 죽으면 곤란하죠. 나중에 저승에 가서 심 대주 뵐 면목이 없을 게요.”
연추산도 맞장구치자 오상이 나섰다.
“내가 따라갈까요?”
고벽후는 말없이 술만 마셨다.
무한이 말했다.
“형님들, 별 일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러자 오상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별일 없을 거라 믿냐?”
장초가 혀를 찼다.
“막내는 삼재검밖에 익히지 않아서 삼재검수라고 하더군. 마천도를 만나면 바로 죽을 거야.”
“삼재검? 그게 검법이야? 마천도가 아니라 마적을 만나도 죽을 거야. 요즘 마적이 어디 그냥 마적이야?”
홍염이 거들며 고벽후의 눈치를 봤다.
고벽후가 클클, 웃으며 모두를 봤다.
“해직된 놈들이 오지랖도 넓군. 너희는 천하방의 규율을 어긴 죄인들이다. 본방으로 끌려가 뇌옥에 처박힐 놈들이 남 걱정하게 생겼냐?”
“크크크. 본방에서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천하방 뇌옥을 다 부숴버릴 겁니다.”
연추산이 술병 주둥이를 입에 대고 들이부었다.
“게다가 너희가 착각하는 게 있다.”
“뭡니까?”
“막내가 제법 세다는 거지.”
“예?”
모두가 무한을 봤다.
무한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저 보기보다 강합니다. 고 대형과 맞장 뜬다고요.”
“말도 안 돼.”
모두 일제히 외쳤다.
고벽후가 술병을 들어 벌컥, 비우고는 던졌다.
와장창!
술병이 깨졌다.
고벽후가 비스듬히 누웠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세긴 센데 좀 어수룩한 데가 있어 걱정은 되지.”
그러더니 연추산에게 물었다.
“혈랑단 소재지 파악됐나?”
“요즘은 연벽산 쪽에 있답니다.”
“장초, 네가 혈랑에게 말 좀 전해야겠다.”
“혈랑? 그 흉악한 마적에게 가란 말입니까? 새신랑 죽일 일 있어요?”
장초가 펄쩍 뛰었다.
“홍염하고 같이 가. 둘이 같이 죽으면 되잖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저 뱃속에 내 씨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 가렵니다.”
장초가 홍염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가서 뭐라고 할까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고 해.”
“예?”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야.”
“정말 목 잘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장초가 울상을 하고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홍염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이 될지 몰라. 어서 방으로 가자고.”
“미쳤나? 이리 와서 술이나 마시고 같이 가.”
홍염이 장초의 등을 퍽, 소리 나도록 치고는 술을 따랐다.
고벽후가 연추산에게 말했다.
“애들 풀어서 마천과 인근 부족의 움직임 좀 알아봐.”
연추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따로 한 잔 마시자.”
고벽후가 옆에 있는 자루를 들고 일어나 나가며 무한을 불렀다.
“이 자리 좋지?”
고벽후가 데려간 곳은 성벽 위였다.
벽이 무너져 휑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고벽후가 자루에서 술병을 꺼내 던져 주었다.
이어서 자신의 술병을 꺼내 꿀꺽, 마신 고벽후가 고원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달빛이 내린 고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무한도 술병 마개를 열어 한 모금 마셨다.
고벽후가 무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싸움의 주도권을 놓치지 마라.”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전은 다르다. 상대방이 너 좋으라고 그냥 주도권을 내줄 것 같으냐?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진다.”
고벽후가 술 한 모금을 벌컥 마시고는 말을 이어갔다.
“상황에 몰리다 보면 양보를 하게 된다. 첫 한 발 물러서기가 어렵지, 한번 물러나면 두 발 세 발 물러나기는 쉽다.”
“그러다 주도권을 잃는 거겠죠.”
“그렇지. 패한 자에게는 항상 이유가 있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한 발씩 물러나다보면 어느새 주도권을 잃고, 네 목에 칼이 들어와 있을 것이다.”
“…….”
“일대일 승부나 무력대 간의 전투나 마찬가지야.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것! 주도권을 잃느니 차라리 팔 하나를 내주는 게 낫다는 걸 명심해라.”
고벽후가 다시 술 한 모금을 마시고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싸움은 여기 머리.”
이어서 자신의 칼을 흔들어 보였다.
“이 칼.”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쳤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건 필요 없어.”
“머리와 칼을 써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가슴은 뭡니까?”
고벽후가 미간을 찌푸리곤 물었다.
“머리와 칼이 뭔데?”
“머리는 주도권을 쥐기 위해 끊임없이 굴리라는 거고, 칼이야 힘을 기르라는 거잖아요.”
“뭐, 비슷하지.”
고벽후가 무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적을 기필코 쓰러뜨리겠다는 마음일까요?”
“아니다.”
고벽후가 씨익, 웃었다.
“적은 그런 마음이 없겠냐? 이건 실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다. 아무에게나 말해주지 않는 거라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이럴 때는 개구쟁이 같다.
“적을 이해하는 마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마음, 그리고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
“으음…….”
적을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아는 마음은 지피지기 백전불태와 닿아 있으니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런데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니.
“설령 네가 일대일로 싸우더라도 거기에는 동료가 있다. 네 주위 동료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적을 쓰러뜨린다 해도 너는 얻는 게 없을 것이다.”
“…….”
“해줄 말은 다 했다.”
고벽후가 가져온 자루를 뒤져 뭔가를 꺼내서 무한에게 던졌다.
붉은 칠을 한 대나무통인데 한쪽에 줄이 달려 있었다.
“줄을 당기면 폭죽이 하늘로 올라가 터진다. 위급할 때 신호를 보내라. 한 시진 거리에서는 알아볼 수 있다.”
“신호탄이군요.”
무한이 대나무통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조심해서 다뤄라. 화섭자 불똥이라도 튀면 그 자리에서 터지니까.”
“알겠습니다.”
무한이 폭죽을 챙겼다.
***
메마른 고원에 황토바람이 불었다.
일행은 말없이 말을 달렸다.
형소는 임무를 들은 이후 내내 얼굴이 굳어 있었다.
하기주가 선두에 서고 무한이 후미를 따랐다.
하기주는 가다가 멈추고 지형을 살피곤 하였다.
무한은 그런 하기주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다. 싸움이나 추격전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지형을 숙지해두려는 것이다.
갑자기 하기주가 말을 멈추고 앞으로 주시했다.
멀리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작은 마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옆으로 빠진다.”
하기주가 말머리를 돌려 비탈길로 올라갔다.
길보다 위쪽이기에 공격하기가 유리한 위치였다.
“말은 뒤로 숨기고 바위를 찾아 은신해라.”
하기주는 앞으로 가서 바위에 엎드려 아래쪽을 살폈다.
무한이 하기주 옆에 엎드렸다.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는 빠르게 달려왔다.
꽤 먼 길을 달려온 듯 먼지가 지붕에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마부석에 한 사람만 앉아 있었다.
마적이 수시로 출몰하는 지역인데 호위 하나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마차는 크지 않았는데 창문이 닫혀 있었다.
좀 더 다가오니 마부가 보였다. 팔자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연신 말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두두두.
마차가 가까이 왔을 때 돌연 안에서 노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마차가 언덕 아래쪽에 멈춰 섰다.
이어 노회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죽여라!”
대뜸 죽이라니.
‘마천도들인가?’
마천도는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팔자수염의 중년인이 한숨을 쉬고는 이쪽을 보더니 손을 저었다.
지나가라는 뜻이다.
그러자 마차 안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들을 놓아줄 셈이냐?”
“길 가다 마주쳤다고 모두 죽일 수는 없소.”
마차 안의 인물과 마부는 주인과 하인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이 행적을 누설할 것이다.”
“당신의 안위가 중요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는 없소.”
“네가 못한다면 내가 하는 수밖에.”
마차의 문이 열리고 장검을 든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은 키가 무척이나 컸다. 백발을 단정히 빗어 묶고 흑관을 썼다.
백발노인이 언덕을 흘깃 올려다보는 듯하더니 발을 굴렀다.
단숨에 삼 장을 뛰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언덕 위에 나타났다.
놀라운 경신법이었다.
“……!”
하기주와 무한이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았다.
비스듬한 언덕 아래쪽 삼 장 거리쯤 바위 뒤에 형소와 강소소, 백상인 등이 은신하고 있었다.
백발노인이 하기주와 무한에 이어 바위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은신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어린놈들이 안됐군.”
백발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하기주에게 말했다.
“자결해라.”
황당했다.
처음 보는 이가 대뜸 자결하라니.
‘이런 미친 늙은이가 있나?’
무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하기주도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어린놈들 피를 묻히고 싶지 않으니 자결할 기회를 주겠다.”
하기주가 백발노인을 노려보며 검을 뽑으며 말했다.
“무한, 조원들과 뒤로 물러나라.”
백발노인이 비웃듯 말했다.
“어차피 다 죽는다!”
어느새 뽑았는지 백발노인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썼는지 닳고 달은 검이었다.
백발노인은 검을 들자마자 손을 썼다.
파파팟!
검이 허공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검광이 번뜩이며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