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거구의 연추산이 말을 타자 거대한 전마가 꼭 당나귀 같아 보였다.
연추산은 평원에서 이어진 바위산 아래쪽에 붙어서 이동했다.
“요즘은 마천도들이 뜸한 편이지. 대신 마적떼들이 날뛰고 있어.”
“마적이야 토벌하면 그만 아닌가요?”
모우극이 자신만만하다는 듯 자신의 검을 흔들었다.
“흐흐. 애송이, 여기 마적을 단순한 도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고수도 제법 많다고.”
“그런 고수들이 왜 이런 데서 도적질을 한다는 거죠?”
“중원에서 공적으로 몰린 놈들이 여기로 쫓겨 와서 마적 행세를 하는 거지.”
“아!”
연추산이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한다는 듯 은근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고 대주가 따온 머리가 누군지 알아? 중원에서 악명 높았던 음산쌍귀 중 대귀였다고.”
“음산쌍귀?”
모우극은 들어보지 못한 별호다.
강소소가 불쑥 끼어들었다.
“하북 사도에서 알아주는 고수야. 정파 고수 여럿이 당했지.”
“와아. 그런 고수를 잡았다면 고 대주가 엄청난 고수라는 거네요?”
“크흐흐. 너희들이 고 대주를 잘 모르는구나. 고 대주야말로 진정한 고수지.”
연추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 지역에서 대주의 상대가 되는 놈이 딱 하나 있지.”
“누군데요?”
“혈랑.”
연추산이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적 중 가장 강한 혈랑단 우두머리인데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지.”
그때 앞서가던 멸마대원이 멈췄다.
멀리 지평선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연추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여기는 상단이 지나는 길이 아닌데.”
먼지구름이 다가오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이리 따라와라.”
연추산은 일행을 끌고 암벽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바위 뒤에 은신한 그는 앞을 살펴보며 말했다.
“마적떼는 아니야.”
이어 연추산이 지시하자 멸마대원 하나가 말에서 내리더니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잠시 후 척후가 수신호를 보내왔다.
연추산이 의아해 하였다.
“우리 편이라고? 이거야말로 이상한 일이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먼지구름 사이로 일백여 무인이 보였다.
“정말이네? 천무방 무력대잖아?”
선두에 나부끼는 기치에 ‘천하’와 ‘승룡’이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승룡대면 섬서지부 무력대인데? 왜 섬서지부 무력대가 여기까지 온 거지?”
연추산이 말고삐를 채었다.
승룡대의 진로와 무한 일행이 가는 길은 사선으로 엇갈린다.
계곡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오자 무인들의 행렬이 멈췄다. 경계하는 빛이 뚜렷했다.
연추산이 십여 장 거리에서 멈추더니 소리쳤다.
“우리는 천하방 감숙지부 멸마대요. 어디서 온 형제들이오?”
말을 탄 우두머리가 이쪽을 보더니 한 사람을 보냈다.
날렵한 신법으로 다가온 이가 연추산 삼 장 거리에 섰다.
흑의무복 가슴팍에 승룡(乘龍)이라는 글귀가 금색 수실로 놓여 있다.
“우리는 섬서지부 승룡대요. 임무를 띠고 가는 중이요.”
연추산이 의아해했다.
“섬서지부? 섬서에서 감숙까지 올 임무라니. 대체 그게 뭐요?”
“그건 알려줄 수 없소.”
“흥!”
연추산이 말을 몰아 승룡대쪽으로 달려갔다.
멸마대와 무한 등도 뒤를 따라갔다.
“멈춰라!”
승룡대 선두, 말을 탄 사람 옆에 있던 자들이 줄줄이 나와 막았다.
“나는 멸마대 부대주 연추산이다.”
말을 탄 자가 연추산을 보더니 말했다.
“내가 승룡대주 전조다. 무슨 일인가?”
“전 대주는 고원의 맹약을 모르시오? 여기서 더 나가면 맹약을 어기는 셈이오.”
“명을 받았을 뿐이다.”
“명이라니? 어디서 내려온 무슨 명이란 말이오? 멸마대와 상의 없이 고원으로 들어올 수는 없소!”
“멸마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지금 내게 텃세를 부리는 건가?”
전조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연추산의 인상이 우그러졌다.
“텃세? 나는 맹약을 이야기하는 것이오.”
“흥! 마천 따위와 맺은 맹약은 관심 없다. 본방에서 내려온 명이다. 멸마대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분명하오?”
“믿지 못하겠다면 본방에 물어보든가.”
전조가 말을 마치고는 손을 들었다.
“진군하라.”
전조가 말을 달리자 승룡대가 다시 움직였다.
장포를 입은 백 명의 무인이 경공을 펼쳐 질주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
백상인과 모우극이 그 모습에 감동하여 탄성을 질렀다.
“이런 씨팔. 이게 뭐하자는 거야?”
연추산이 분통을 터트리고는 하기주를 향해 말했다.
“지금 무슨 짓을 꾸미는 거요?”
“…….”
하기주가 곤혹스러워했다.
“천무관 문하생들이 몰려오더니 섬서지부의 승룡대마저 나타났소. 이게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소?”
“승룡대가 왜 왔는지, 나도 모르는 일이오.”
연추산은 믿지 않았다.
“저쪽은 마천과의 공유지역이요. 고원의 맹약이 적용되는 땅이지. 천하방 무력대가 들어간다면 마천에서 분명 문제를 삼을 거요.”
“…….”
“본방의 명이 있지 않고는 저럴 수가 없지. 공교롭게도 본방에서 천무행이 왔소. 그런데 모른다는 말이오?”
하기주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이번 천무행에 별도의 임무가 있다고 알고 있소. 솔직히 나는 고 대주가 임무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하여 서둘러 달려왔던 것이오.”
“흥!”
하기주의 말에 연추산이 콧방귀를 꼈다.
“본방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지들 멋대로야.”
연추산은 버럭, 화를 내고 기수를 돌렸다.
“돌아간다! 정찰은 취소다!”
“에이, 이게 무슨 짓이람.”
멸마대원들이 투덜대며 기수를 돌렸다.
한나절 갔던 길을 반나절 만에 돌아왔다.
감숙지부는 조용했다.
대부분의 멸마대원들은 천무관 문하생들을 이끌고 정찰을 떠났으니 빈집이나 마찬가지다.
“대주!”
연추산은 돌아오자마자 고벽후를 찾았다.
그런데 고벽후의 집무실 앞을 천하방 무복을 입은 무인 네 명이 지키고 있었다.
“너희는 뭐냐?”
연추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인이 연추산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본방 오장로 호위요. 신분을 밝히시오.”
“본방 오장로? 그게 누군데?”
연추산이 무시하고 들어가려 하자 무인들이 막았다.
“회의 중이시오.”
“나, 멸마대 부대주야.”
“안 됩니다.”
그때, 안에서 고성이 터졌다.
“어떤 새끼가 이따위 계책을 내놓은 것이오?”
고벽후의 목소리였다.
누군가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비켜!”
연추산이 밀고 들어가려 하자 호위무사가 가로 막았다.
“물러가시오.”
퍽!
연추산의 커다란 주먹이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호위의 얼굴에 작렬했다.
“이 새끼들이 남의 집에 와서 주인 행세하고 지랄이야.”
챙!
호위무사들이 검을 뽑았다.
“얼래? 검을 뽑아? 죽을래?”
연추산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때 덜컥, 문이 열리고 고벽후가 나왔다.
“뭐야?”
“들어가려는데 이 새끼들이 막지 뭐요.”
호위무사들은 고벽후와 연추산 사이에 있었다.
고벽후가 자신의 앞에 있는 호위무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호위무사가 나뒹굴었다.
“이 새끼들이 멸마대를 뭘로 알고!”
고벽후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호위무사에게 분풀이를 하고는 돌아서서 안쪽을 향해 외쳤다.
“경고하는데 어설픈 수작 부리지 마쇼.”
“고 대주! 이러지 말게. 어서 들어오게.”
천무행 행수 우문조가 따라 나와 잡았으나 고벽후는 뿌리치고 갔다. 연추산이 뒤따라갔다.
우문조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 하기주가 서 있는 걸 보았다.
“하 조장은 정찰 나가지 않았나?”
“일이 있어 중도에 돌아왔습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문조가 난색을 표했다.
“본방 오장로가 와 계시네. 나중에 얘기하세.”
우문조가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하기주는 미간을 찌푸리곤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너희는 거처에서 대기해라.”
그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
느닷없이 얻어맞고 걷어차인 호위무사들이 독기 어린 눈빛으로 무한 등을 노려보았다.
“온종일 달렸더니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모우극은 눈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먹을 것 타령이다.
“난 생각 없어.”
“나도.”
무한과 강소소가 빠지자 모우극과 백상인만 주방으로 갔다.
무한이 발길을 돌려 성벽으로 가자 강소소가 따라왔다.
무한은 말없이 고원을 바라봤다.
‘고원의 맹약을 천하방이 먼저 어겼다.’
공교롭게도 천무행을 나온 이 시점에.
맹약이란 서로 존중하는 것이다.
한쪽이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마천에서 공격을 할 빌미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둔 단 말인가?’
천하방 군사부의 작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출발하기 전 하기주가 이번 작전이 군사부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천부를 언급했다.
‘도천부가 원하는 게 뭘까?’
무한과 나란히 서서 고원을 바라보던 강소소가 몸을 돌려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한은 여전히 앞으로 보다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총군사 손우자는 어떤 사람이지?”
손우자는 천기자의 대제자이자 강유의 사형이다.
강소소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들었다.
“어떤 사람이냐니? 그렇게 막연한 질문이 어딨어.”
“도천부가 천하방을 좌지우지하고 있어. 총군사는 그걸 보고만 있고.”
무한의 눈빛이 서늘했다.
“도천부의 세가 강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손 군사는 도천부와 한 배를 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
잠시 망설이던 강소소가 말했다.
“나도 잘 몰라. 몇 번 본 적도 없어. 하지만……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
우울한 목소리로 뇌까린 강소소가 성벽을 내려갔다.
홀로 남은 무한이 멀리 평원을 바라보았다.
땅과 맞닿은 하늘이 타는 듯 붉었다.
매 한 마리가 붉은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철혈의 매!’
- 철혈의 매는 심 대주의 별호였다. 내가 그걸 물려받았다는 건 영광이지.
고벽후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
고벽후 같은 사내에게 존경을 받았다면 아버지는 진정한 사내였을 것이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황혼이 물든 하늘을 유유히 날던 매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매는 땅에 꽂힐 듯하더니 뭔가를 채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끼아아악!
황량한 고원 붉은 하늘 저 멀리 매의 날카로운 울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 고벽후가 일전에 한 말이 스쳐갔다.
-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자가 있다.
무한의 미간이 절로 좁아들었다.
‘설마…….’
천무관 문하생들은 천하방 고위층 자제들이다. 모우극만 해도 장로의 아들이다.
천하방 고위층 자제들이 몰살당하면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겠지.’
천하방 고위층 자제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이 작전을 고위층이 안다면 자신들의 자식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천무행에서 빠진 이들이 생각났다.
출발 전 날 대파, 세가의 자제들이 빠졌는데 핵심 고위층 자제 몇몇도 포기했다.
‘장로들도 모를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계략을 꾸몄다면……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