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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39화 (39/250)

39화

고벽후가 고개를 살짝 기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흥분한 것 같은데?”

“비무를 해보면 알 겁니다.”

“흐흐. 하루만에 내공이 두 배라도 됐다는 거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고벽후는 잠시 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무한은 고벽후와 대등하게 겨루었다. 내공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이게 말이 돼?”

어제까지만 해도 내공이 부족해 쩔쩔매던 무한이 자신의 기운을 능숙하게 받아낸다.

우물이 하루 사이에 장강대하를 이룬 듯했다.

고벽후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금지된 약이라도 먹은 거냐?”

“금지된 약이라뇨?”

“단기간에 내공을 올려주는 약 말이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고벽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이냐?”

“운기 요령이 늘은 겁니다. 말씀해주셨잖아요. 운기법에 매달리지 말라고.”

“으음.”

고벽후가 이상한 시선으로 무한을 봤다.

“뭡니까? 그 눈빛은?”

“내가 아무리 감숙 변방에 처박혀 살긴 하지만, 일러준다고 하루 만에 깨친다는 건 정말이지…… 게다가 네 나이에 이런 내공이라니, 대체 뭘 먹은 거냐?”

“기연도 있었습니다.”

“그랬겠지. 그래야 말이 되니까. 하지만 명심해라. 내공이 높아지면 기에만 의존하려 드는 인간이 있다. 하지만 싸움은 내공의 높낮이나 무공 성취와 별개로 승부가 결정된다.”

“알고 있습니다. 몸으로 알려주셨잖아요.”

고벽후와의 비무를 통해 무한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한 고벽후를 상대하며, 제아무리 고수라고 하더라도 날아오는 돌멩이 하나 잘못 대처했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절감했다.

“으음…….”

고벽후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듯 무한을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바뀌다니. 정말 기가 막히긴 하구나.”

“다 형님 덕분이죠.”

“다시 한 번 붙자.”

“좋죠!”

무한이 검을 세워 달려들었다.

처음으로 고벽후에게 얻어맞지 않고 비무가 끝났다.

“네가 천하제일인의 핏줄인 건 맞는 모양이구나.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고벽후는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술을 마셨다.

무한은 고벽후와의 비무를 통해 얻은 바가 컸다.

‘전신의 기운과 단전, 경락이 일체를 이뤘다.’

그날 이후로도 고벽후와의 비무는 밤마다 계속됐다.

비무는 나날이 실전에 가까워졌고, 무한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전신에 배인 기운을 단전을 통해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되자 고벽후와 내공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하루는 고벽후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넌 수련만 하고 살았냐? 이렇게 성취가 빠른 놈은 처음 본다.”

“그런 셈이죠.”

실제로 지난 오 년간 수련만 하고 살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 해도 결국 인간이다.”

“…….”

고벽후가 진지하게 말하자 무한이 경청했다.

“무의 극의를 추구하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잃어버린 자들이 있다. 흔히 절대고수라고 하는 자들이 종종 그런 함정에 빠지지.”

“절대고수의 함정? 심마라는 건가요?”

고벽후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초인이나 되는 양 착각한다. 심지어 인륜을 거스르는 짓도 서슴없이 하지.”

“왜 그럴까요?”

“자신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으니 인간의 윤리규범 역시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

“무의 극의를 추구하는 건 무인으로서 바람직한 자세이지만 그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어야 한다.”

왠지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네가 수련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들려준 것뿐이다.”

“지금 이 말씀은 형님이 절대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죠?”

“뭐?”

“자신이 체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잖아요.”

“그게…….”

고벽후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나도 들은 말이다.”

“예? 분명 체험에서 우러난 말 같았는데요?”

“과거에 내가 그랬다. 무공에 미쳐 살았지.”

“그랬을 거 같아요.”

“그때 네 아버지가 해준 말이다.”

“……!”

“네 아버지는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로 절대고수의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아!”

“절대고수라는 건 수련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라고 하더군. 심득을 얻어야 하는데 그건 스스로를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어렵군요.”

무한은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고벽후를 통해 자신에게 이르는 말처럼 들렸다.

“명심하겠습니다.”

고벽후가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심 대주의 아들이 무공에 미친 괴물이 되면 곤란하지.”

“그러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죠.”

고벽후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이미 절정의 문턱을 넘보고 있다. 그건 내가 보증하지.”

“예?”

가슴이 뛰었다.

자신이 지닌 무공의 경지를 처음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어떻게 며칠 만에 이럴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네가 홀로 가야하는 길이다. 벽은 스스로 깰 수밖에 없으니까.”

“벽이요?”

“일류와 절정의 차이가 뭔지 아냐? 둘 사이의 경계는 애매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디쯤에 두 경지를 가르는 벽이 있다는 것이다.”

벽.

수련의 벽에 대해서는 들어봤다.

“그 벽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고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 그 벽을 깰 수 있는 사람 또한 그 자신뿐이다.”

“아……!”

“벽을 깬다는 건 스스로를 깬다는 것이고 이는 쉽지 않다. 실제로 수많은 고수들이 절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이유이지.”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경천십이식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벽을 경험하겠어요?”

일류의 벽을 넘는다면 절정이다. 절정고수라면 천하방 무력대 대주급이다.

‘내가 무력대주와 맞먹을 수 있다고?’

경천십이식도 완벽하게 펼치지 못하니 언감생심 벽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무한은 경천십이식 후반 사식을 완전하게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고벽후가 피식, 웃었다.

“아니, 절정이란 그런 게 아니야.”

고벽후가 말했다.

“자신의 벽을 느낄 수 있는 경지, 그리고 그걸 스스로 넘어설 수 있는 경지가 절정이다.”

“……?”

“수십 년 수련을 하고도 벽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그런 사람의 검이 제아무리 숙달되었다고 해도 절정이라 부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일류고수가 더 강할 수도 있지.”

고벽후의 무학 강론은 오랜 수련과 풍부한 실전에서 나온 것이다.

무한의 무공 단계에서 이렇게 쉽게 정리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또한 기연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수많은 벽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나를 허물면 다시 하나가 나오지. 무인의 길에 대해 물었지? 나는 그 벽을 넘는 것이라 생각한다.”

“벽…….”

문득 무한은 자신이 이번에 최초의 벽을 넘었다는 걸 느꼈다.

무공 구결에 따라 축기하고 운기하다 보니 늘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몸으로 행할 수 있었다.

‘그것 또한 일종의 벽이었어.’

자신이 일류를 넘어 절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무한은 고벽후와의 비무를 통해 급성장한 것이다.

“벽은 끝이 없다. 넘고 넘다 보면 어느새 경지가 바뀔 뿐이지.”

무한은 잠자코 고벽후의 말을 되새기다 문득 궁금했다.

“형님도 벽이 있습니까?”

고벽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고벽후가 침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인이라는 네 할아버지도 벽이 있었을 것이다.”

“…….”

“네 아버지의 말은 그 벽을 넘는 데 집착하여 인간의 길을 잃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무한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버지가 추구한 무인의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한 번 더 붙어 볼까?”

고벽후가 반월도를 들었다.

무한은 문득 고벽후의 사문이 궁금했다.

고벽후의 완월도법은 경천십이식 못지않은 위력적인 신공이었다.

그만한 신공이라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을 텐데 무한은 고벽후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무한이 사문을 묻자 고벽후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이제는 내 밑천까지 파헤칠 셈이냐? 어림없다. 절대 알려줄 수 없지. 내 도나 받아라!”

고벽후는 말 대신 도를 앞세웠다.

챙!

검을 들어 막았다.

검광과 도광이 공동을 채웠다.

***

무한 일행이 당도한 후 이십여 일이 지나자 다른 조들이 속속 도착했다.

천무관 문하생들이 오며 감숙지부는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이제 오는구나.”

무한은 형소를 반갑게 맞았다.

호신갑을 착용한 형소는 땅딸보 같았다.

무한이 형소의 배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물었다.

“귀왕갑?”

“응. 속에 입었지.”

“불편하지 않아?”

“전혀.”

형소는 자신의 모습이 남의 시선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형소가 주위를 경계하듯 은근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언제 왔어? 오다가 다른 조는 만났는데 너희 조는 보이지가 않던데?”

“미친 듯이 달려왔지.”

스무 날이나 일찍 온 덕분에 무한의 조는 멸마대와 친해지고 이 지방 풍물이나 지형도 전해 들었다.

“너희가 마지막 조야. 모두 도착했어.”

“그런데 여기는 왜 이리 삭막해?”

형소는 마적떼 같은 멸마대의 행색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천하방도는 마적떼들의 사냥감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낭인 복장으로 지내는 거래. 너도 조심해.”

“사냥감?”

“응. 언제 적을 만날지 모르니 여기 멸마대원들도 항상 조를 짜서 다녀.”

“으응.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네.”

형소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든 조가 당도하자 행수 우문조가 전원을 소집했다.

우문조 옆에 멸마대 부대장 연추산과 외눈박이 오상이 나란히 섰다.

“이번 천무행의 임무는 멸마대와 함께 변방 전선을 둘러보는 것이다.”

우문조가 옆에 있는 연추산을 소개했다.

“감숙지부 멸마대 부대주이시다.”

연추산이 앞으로 나섰다. 얼굴에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희 모두가 귀한 집 자식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여기는 신분의 귀천이 통하지 않는다. 힘이 없으면 죽고 적을 죽이면 살아남는다.”

강자존.

연추산이 진지하게 말했으나 천무관 문하생들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지간히도 겁주네.”

“마적떼가 나타나면 누가 많이 잡나 내기할까?”

가전 절학을 익힌 그들은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마적떼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기세였다.

연추산이 가소롭다는 듯 천무관 문하생들을 둘러보았다.

“알다시피 이곳은 마천과의 공유지역이다. 마천도를 만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마천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제야 약간 긴장하는 기색들이다.

뒤이어 외눈박이 오상이 나섰다.

“조별로 함께할 멸마대를 소개하겠다.”

오상은 각 조마다 멸마대 세 명을 배치했다.

조별 인원이 조장 포함 다섯 명이니 모두 여덟 명씩 편성되었다.

연추산이 어슬렁거리며 하기주에게 다가갔다.

“하 조장, 당신 조는 나와 함께 갑시다.”

연추산이 무한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흐흐. 형님이 잘 챙겨줄게.’

무슨 뜻인지 알아챈 무한이 씨익 웃음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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