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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38화 (38/250)

38화

새벽에 일어나 흙집에 처박혀서 온종일 비무를 복기했다.

그러다 무한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맞다가 나중으로 갈수록 피하거나 반격을 할 수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한두 시진 사이에 이룰 성취가 아니었다.

‘게다가 고벽후의 기운도 느낄 수 있었어.’

비무를 하느라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돌아보니 고벽후의 기운 흐름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았다.

‘풍운조화공과 산수진결은 기운의 흐름과 조화를 느끼는 기공이야. 그걸 왜 생각지 못했지? 상대의 손발이 아니라 기운 흐름을 봤어야 했어.’

풍운조화공과 산수진결, 조화지도의 이치를 다시 새기며 전신의 기운을 조절했다.

온종일 기운을 다루다 밤이 되자마자 공동으로 갔다.

고벽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무한은 공동을 살펴봤다. 특히 바닥의 돌이나 틈을 눈에 익혔다.

「싸우기 전에 전장을 살펴봐라. 전장을 아는 자는 승률 삼 할을 미리 얻고서 싸우는 것이다.」

병법서마다 나오는 대목이었다.

무한은 주위 지형지물을 머릿속에 담은 다음 경천십이식을 펼치며 고벽후를 기다렸다.

“뭐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냐?”

달이 들 무렵 고벽후가 나타났다.

“며칠은 끙끙 앓아누울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제가 좀 강골이라서요.”

아직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멀쩡한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상하군. 내가 약해진 건가? 아니면 네 녀석이 영약이라도 먹는 건가?”

경천심결을 통해 연근 연골 연혈을 이루고 지화령석으로 환골탈태 한 걸 모르는 고벽후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작하죠?”

“자신 있다 이건가?”

고벽후가 씨익, 웃더니 빙글 돌면서 발을 걸어왔다.

무한이 슬쩍 옆으로 피했다.

“이런, 수를 들켰군.”

뒤로 물러났으면 연달아 발차기가 들어왔을 것이다.

“이제 체술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고벽후의 기도가 바뀌었다.

평소처럼 반월형 도를 늘어뜨렸는데 흘러나오는 기운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달빛이 세상을 품듯 주위 공간을 꽉 채운 듯한 느낌이었다.

“완월도법이라한다. 경천십이식에 버금가는 신공이랄 수 있지.”

고벽후가 반월도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은은하면서도 묵중한 기운이 어렸다.

‘저건……!’

무한은 고벽후가 아직까지 진정한 무위를 내보이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도 강한 기운이라니.

무한이 어금니를 콱, 깨물고 검을 세웠다.

‘파천격.’

경천십이식 제육식.

상대와 격렬하게 싸우는 도중에 펼치기는 어렵지만 이렇듯 마주보다 펼치는 거라면 가능했다.

고벽후의 반월도가 빠르게 원을 그려 쳐냈다. 그러자 둥근 월광이 밀려들었다.

싸늘한 예기를 품은 월광은 피할 곳이 없었다.

무한은 전력을 다해 월광의 정 가운데를 찔렀다.

콰쾅!

기파가 터지는 파공성에 공동이 흔들렸다.

반월도와 검이 맞닿았다.

‘우욱!’

검을 통해 고벽후의 내기가 밀려들었다.

이에 맞서 공력을 일으켰으나 무한의 내공으로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순식간에 고벽후의 내공이 밀고 들어왔다.

애초에 공력의 차이가 워낙 크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무한은 검을 밀쳐 뒤로 물러나려 했다.

고벽후는 놔줄 생각이 없는지 반월도를 밀고 들어오며 계속하여 내공을 퍼부었다.

무한의 안색이 바뀌었다.

이대로 당하면 내상을 입을 것이다. 아니, 단전이 손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전에 남은 공력을 쥐어짜서 맞섰다.

비무는 어느새 내공을 겨루는 것으로 바뀌었다.

‘크윽! 나를 죽일 셈인가?’

고벽후의 막강한 기운이 밀고 들어왔다.

꼼짝없이 당하기 직전, 고벽후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

무한이 말없이 검을 내렸다.

고벽후가 말했다.

“싸우다보면 내공을 겨룰 때가 있다. 이렇게 당하면 너는 폐인이 되는 것이다.”

무한은 고벽후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고벽후와의 비무는 끝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산을 넘으니 또 산이 나오는 격이었다.

간신히 몸과 기운이 일체를 이뤄 싸울 수 있었는데 이제 내공이 딸린다.

멍하니 서 있는데 기운이 저절로 움직였다.

‘……?’

텅빈 단전에 기운이 스며드는 걸 느끼고 있었다.

단전이 비워지자 전신 근육과 골수에 쌓인 기운이 저절로 단전으로 흘러 들어갔다.

‘싸우는 도중에도 전신에 배인 기운을 단전으로 끌어들여 내공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력의 부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시험해보자.’

고벽후는 그새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공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에 맡겨야지.”

고벽후가 무한을 위로했다.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하지?”

고벽후가 가져온 술병을 흔들어 잔에 따랐다.

무한이 잔을 받으며 말했다.

“대주, 솔직히 말해주시죠. 대주보다 강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십대고수 중 한 사람이죠?”

고벽후가 크게 웃었다.

“네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나 정도 되는 자는 무수히 많다.”

“…….”

믿을 수가 없었다.

“헛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라.”

무한은 고벽후의 무위가 강호에서 어느 정도인지 정말 궁금했다. 고벽후는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조급해 하지 마라. 집착하다보면 선을 넘고, 결국 사마외도의 길로 빠지고 만다.”

“마천의 마공을 상대해 본 적 있습니까?”

“있지.”

“강합니까?”

“강하지. 마공이 추구하는 건 강함이니까.”

고벽후가 술을 벌컥, 마시고 말을 이었다.

“마공이라고 해서 두려워할 건 없다. 독수를 서슴지 않고 상궤를 벗어나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뿐이지.”

“그렇게 해서 궁극에 이를 수 있을까요?”

“마인 중에도 고수는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극의에 마심이 들어 있어 마공이라 하는 거지.”

“마심이 뭔데요?”

재차 묻자 고벽후가 멋쩍게 웃었다.

“모른다. 알면 마인이게? 곤란하게 자꾸 묻지 마라.”

“모른다는 말이 믿기지 않네요. 왠지 마공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크으음.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군.”

고벽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술을 마셨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고벽후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대주께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보름간 이어진 비무는 그야말로 무한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내공 대결까지 경험했다.

고벽후가 크게 웃더니 말했다.

“정말 감사하다면 형이라 불러라.”

“예?”

“예전에 심 대주를 형이라 부르고 싶었지. 그런데 워낙 차이가 커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그 아들에게서라도 형이라는 소리를 들어야겠다.”

“으음. 너무 나이 든 형인데…….”

“싫단 말이냐?”

“그럴 리가요. 형님.”

막상 부르고 나니 마음이 묘했다.

고아나 다를 바 없이 자랐다. 그런데 가족 같은 호칭을 하는 이가 생기니 기분이 묘했다.

“크흐흐. 후회하기 없기다.”

“예?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후회할 일이 뭐가 있다고.

“동생은 형이 시키는 일은 다 해야 한다.”

후회할 일이 있을 것도 같고.

아침을 먹고 나오는데 외눈박이 오상이 다가오더니 툭, 쳤다.

“네가 막내라며?”

“예?”

“고 대형에게 들었다. 대형에게 아우면 내게도 아우지.”

“내게도 아우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장초가 씨익 웃으며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이렇게 귀여운 막내가 생기다니. 홍염이 좋아하겠네.”

“미친!”

어디서 나타났는지 홍염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 어린 남편이 드디어 막내에서 벗어나는구나.”

장초와 홍염은 부부인데도 특이하게 서로 오라비와 누나라고 주장했다.

“시끄러! 가서 술이나 받아와. 막내가 생겼으니 한잔 해야지!”

연추산의 커다란 손이 무한의 어깨를 잡더니 들어올렸다.

“이리 귀여운 막내가 생겼으니 마시고 죽자고.”

졸지에 형과 누나가 줄줄이 생겼다.

싫지는 않았다.

***

- 기운은 네 의식만큼 존재한다.

고벽후가 비무 수련을 마치고 헤어질 때 해준 말이다.

풍운조화공과 산수진결, 조화지도를 통해 기의 작용과 흐름, 조화를 깨친 무한이다.

풍운벽력수와 요산자, 목령산인의 가르침은 기의 체와 용에 관한 것이었고, 고벽후의 조언은 무공과 직접 관련한 것이다.

‘기는 빛이다. 빛은 의식의 속도다. 운기법에 매달리지 마라. 머릿속으로 행하는 의식보다 빠른 것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방향성이 없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무의식에 심안, 몸의 눈을 달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이보다 적절한 조언이 있을 수 있을까.

고벽후의 완월도법이 떠올랐다.

은은한 기운이 달빛처럼 퍼지던 도법.

‘그게 고 대형의 의식 범위였다는 말일까?’

이는 의식에 기를 실었다는 뜻이다.

그 의미를 새기니 경천심결과 경천승운공이 새롭게 다가왔다.

기인 사부들의 가르침으로 기를 깨쳤으나, 뭔가 아쉬워서 머릿속이 간질간질 하던 걸 고벽후가 뚫어준 느낌이다.

경천십이식은 살상무공이고, 경천심결과 경천승운공은 이를 위한 내공 축기와 운기법이니 고벽후의 조언이 직접적으로 와닿은 것이다.

흙집에 좌정하고 앉아서 내공 대결 후 문득 스쳤던 생각을 정리했다.

‘경천심결을 통해 전신 근육과 골수에 기운이 쌓였어. 요산자 사부는 전신이 단전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지.’

무명신법은 산천의 기운을 끌어들여 쓴다.

자신의 내공은 마중물처럼 지극히 미미하게 쓰일 뿐이다.

같은 원리로 산천의 기운을 끌어들여 내공으로 쓸 수 없을까?

그렇다면 무한한 기운을 얻는 셈일 텐데.

하지만 그렇게 끌어들인 산천의 기운은 무공으로 사용할 만큼 강력하지가 않다. 딱 경신법을 운용할 정도라고나 할까.

산천의 기운을 발경할 정도로 응축하려면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을 끌어들여 경락을 채워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선은 경천승운공에 집중하자.’

경천심결로 전신에 쌓인 내력을 단전으로 끌어들여 정순한 내공으로 바꾸고, 이를 경락으로 보내 발경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경천승운공이다.

과정이 복잡한 듯하지만 무한이 의식하는 순간 바로 발경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부족함을 느꼈다.

고벽후가 말한 것처럼 검이 나가는 순간 발경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의식 이전의 의식, 무의식이 작동해야 한다.

무한은 경천승운공을 통해 경락주천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쥐었다.

무한은 경천승운공의 운기법에 따라 단전을 열었다.

그러자 전신의 기운이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이어 지천격에 필요한 경락으로 기운이 뻗어나갔다.

무한의 검이 뻗어나갔다.

퍽!

흙벽 한 귀퉁이가 무너졌다.

무한은 이 과정을 천천히 몸에 새기며 반복했다.

퍼퍽!

뭔가 달랐다.

검이 나가자 동시에 자연스레 발경을 할 수 있었다.

‘아!’

기가 빛이고, 의식의 속도라는 말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고벽후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그가 몇 년에 걸쳐 깨달은 체득을 무한이 하루 만에 얻은 셈이었으니.

물론 비무를 하며 무수히 두들겨 맞은 깨달음이 있었으니 가능했겠지만.

“아하하하!”

무한이 크게 웃었다.

“뭐냐? 어떤 미친놈이냐?”

난데없이 터진 광소에 경계를 서던 멸마대원들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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