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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34화 (34/250)

34화

“나는 매일 밤 여기서 수련을 한다. 비무를 할 생각 있으면 찾아와라.”

고벽후가 공동을 나갔다.

무한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공동이 훤해졌다.

해가 완전히 뜬 뒤에야 무한은 공동을 나왔다.

“어디 갔다 왔어?”

모우극이 인상을 썼다.

“왜?”

“네 아침밥 저깄다. 내가 이런 것까지 챙겨야 하겠냐?”

모우극이 대청 한쪽에 놓인 상을 가리켰다.

어느새 모두 아침밥을 먹은 모양이다.

“아, 미안. 그런데 모두들 어디 갔지?”

감숙지부가 한산했다.

“나도 몰라. 아침 먹자마자 우르르 나갔어. 마적질 하러 가는지 병장기를 단단히 챙겨서 가더라고.”

마침 지나던 장초가 그 말을 듣고는 와서 모우극의 뒤통수를 쳤다.

“아야!”

“마적?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고생하는데 마적질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장초가 침을 퉤, 뱉고는 말했다.

“천무행인지 지랄인지 왜 여기로 와서 사람 피곤하게 하는 거냐?”

“오고 싶어 왔나요. 가라니 온 거지.”

“대체 뭐 하러 온 거냐?”

“그건 저희도 모른다고요. 모두 모이면 그때 임무가 주어진다고 했거든요.”

“임무? 뭔 개소리야. 네놈들이 여기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장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개뼉다귀 같은 소리 말고 어서 돌아가.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모우극과 장초가 티격태격하는데 홍염이 나타났다.

“왜 그래?”

“이놈들 때문에 순찰이 강화됐잖아.”

“애들 닦달 말고 빨리 와. 이러다 해지기 전에 못 돌아오겠다.”

두 사람이 마구간으로 가더니 말을 타고 지부를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모우극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유. 성질 같아서는 그냥.”

무한이 바라보자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한 번은 맞아준다. 다시 한 번 그랬다간 멸마대고 뭐고 박살을 내버릴 거야.”

천하방 장로의 외아들 모우극은 변방의 하찮은 멸마대원에게 뒤통수 맞은 게 분했다.

“그럴 수는 있고?”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웃어? 야, 내가 못할 줄 알아?”

흙집에 정좌하고 운기를 하였다.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자만하고 있었다.

네 명의 사부로부터 기연을 얻고 고수가 된 듯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고벽후는 멸마대주다. 무력대 대주의 무공이 그리 높은지 처음 알았다.

산도가 무인의 길 앞까지만 데려다 줬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아직 무인의 길에 들어서지도 못한 것이다.

‘신공을 가지고 있으면 뭐해.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풍운조화공이나 산수진결, 조화지도는 자연과 만물을 보는 눈을 뜨게 했지만,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는 소용이 없었다.

‘신법조차 펼칠 생각을 못하다니.’

요산자에게 배운 무명신법도 있고, 풍운벽력수로부터 얻은 뇌전의 기운을 생성하는 공법도 있다.

하지만 고벽후와의 비무에서 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그저 고벽후를 공격하기에 급급했다. 계속 막히니 어거지로 달려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얻은 것 있어.’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달았다.

부족함을 알았으니 채우면 된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실전이야.’

언제 실전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고벽후와의 비무를 통해 나아가야 한다.

오전 내내 경천승운공을 운기하고, 오후에 경천십이식을 펼치는데 검세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비무 덕분일 것이다.

밤이 되자 무한은 공동으로 갔다.

‘오늘은 맥없이 밀릴 수 없다.’

고벽후는 먼저 와서 도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어스름한 별빛 아래 춤을 추듯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원형을 그리는 반월도에서 기운이 흘러나와 주위로 퍼졌다.

무한은 숨을 죽이고 고벽후의 도법을 보았다.

고벽후는 무한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천천히 도법을 시전했다.

잠시 후 도법을 마쳤을 때, 무한은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도법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을까?

단순한 원을 그리고 있으나 수많은 변초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왔나?”

무한은 정신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포권했다.

“다시 한 번 비무를 부탁드립니다.”

“어려울 것 없지. 대신 알아둬야 할 게 있다.”

고벽후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어제는 처음이라 받아만 주었지. 오늘부터는 공격도 할 것이다. 다칠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당연히 괜찮습니다.”

“팔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실전에서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좋아.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기꺼이 응해주지.”

고벽후가 씨익, 웃으며 도를 까닥였다.

“들어와라.”

파파팟!

무한은 바로 발검을 하였다.

“일단 기세는 어제보다 나아졌군.”

고벽후가 선 자세 그대로 도를 옆으로 쓸었다.

터엉!

검이 쓸려나갔다.

무한이 몸을 돌려 검이 튕겨나가는 힘을 이용해 고벽후의 허리를 노렸다.

회천격이다.

어제 비무 이후로 미진했던 제삼식 회천격까지 제대로 펼칠 수 있었다.

“그렇지, 이제야 공격답군.”

고벽후가 슬쩍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처음으로 무한의 검을 회피한 것이다.

재차 회천격을 시전하면서 무명신법을 펼쳐 옆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뺐다.

터엉!

고벽후가 좌장을 뻗어 검을 밀어내며 빙글 돌아 들어왔다.

무한이 바로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어느새 반월도가 들이닥치더니 목을 겨눴다.

“……!”

검을 멈추고 고벽후를 보았다.

“경천십이식을 알고 있군요?”

고벽후가 피식, 웃었다.

“이런, 들켜버렸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오래전 경천십이식을 본 적이 있을 뿐이다.”

“단지 본 것만은 아닐 겁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군. 그렇다. 비무를 한 적이 있지.”

‘아버지…….’

경천십이식을 쓴다면 아버지일 것이다.

“일단 비무부터 끝내자.”

파파팟!

무한이 다시 공격을 하였다.

천의격과 지천격 그리고 회천격을 번갈아 쓰면서 삼재검을 섞었다.

단전의 기운을 배합하며 검을 운용하니 어제처럼 맥없이 검이 튕기는 경우는 없었다.

파파팟!

채채챙!

수십여 차례 공수가 오가고.

퍼억!

기어이 반월도가 무한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옆면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깔끔하게 몸이 동강 날 뻔했다.

“크윽!”

일시 숨이 막혀 주저앉았다. 숨을 쉴 때마다 불에 덴 듯한 고통이 일었다.

“좀 낫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멀었다.”

고벽후가 다시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으드득.

무한이 어금니를 깨물고는 일어섰다.

쉬쉭!

검을 뻗어 고벽후의 가슴을 정면으로 찔러갔다.

수천수만 번 찔렀던 찌르기.

고벽후가 뒤로 물러나며 반월도를 그었다.

채챙!

뒤이어 다시 검과 반월도가 현란하게 부딪혔다.

얼마나 싸웠을까?

싸우면서 무한은 무아지경에 들었다.

어느 순간.

텅!

손에서 검이 날아갔다.

“정신 못 차리지?”

고벽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춤추는 거냐? 적을 쓰러뜨리려는 의지가 없잖아!”

고벽후가 반월도를 내렸다.

“오늘 비무는 여기까지다.”

그러지 않아도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무한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져 대자로 누웠다.

온몸이 텅 빈 것 같았다.

“운기해라.”

고벽후가 한마디 하고는 바위에 걸터앉아 술병을 들었다.

무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경천승운공을 운기했다.

기운이 단전으로 모였다가 경락을 순환하며 근육과 뼈를 어루만졌다.

다행히 아까 맞은 갈비뼈는 온전했다. 연골을 연성했기에 이 정도였지 다른 이라면 부러졌을 것이다.

온몸 경락을 순환한 기가 단전으로 몰려들었다.

‘아!’

이런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기운이 단전을 채우는데 이전보다 가득한 느낌이다.

내관반청의 호흡으로 가만 느껴보니 경천심결로 근육과 골수, 피에 배였던 기운이 단전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렇지. 기운은 충만한 데서 부족한 곳으로 흐르는 거였지.’

몸 안에서 이뤄지는 기의 작용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전신 기운이 몰려들자 단전에 기운이 금방 찼다.

운기조식을 마치고 일어나자 고벽후가 약간 놀라는 눈치로 보다 피식, 웃었다.

“흐음. 멀쩡한 걸 보니 때리는 맛이 있겠군.”

내심 욱, 하는 마음이 일었다. 하마터면 갈비뼈가 나갈 뻔했다.

“오늘은 봐준 거다. 내일부터는 금창약을 가져와야 할 거야.”

어느새 공동의 하늘이 뿌옇다.

새벽이 온 것이다.

“잠을 안 잔 것 같더군. 운기로 체력을 회복하는 건 한계가 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해.”

“…….”

그렇지 않아도 밤을 꼬박 샜더니 정신이 멍멍했다.

무한은 오전에 잠시 눈을 붙이고 오후에 경천십이식 제사식 운중격을 수련한 후 저녁엔 다시 공동을 찾았다.

그리고 깜박 잊고 외상약을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고벽후는 봐주지 않겠다는 어젯밤 말을 지키겠다는 듯 무한을 흠씬 두들겨 팼다.

반월도 옆면으로 맞았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싸웠다면 수십 조각난 고깃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크어어억!”

무한은 버티고 버티다 결국 복부를 얻어맞고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고벽후는 냉정했다.

바위로 가더니 술병을 들어 꿀꺽 마셨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이리 와라.”

다가가자 고벽후가 약합을 건넸다.

“멍든 데는 이게 제법 잘 듣는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약을 받아 멍든 부위에 발랐다. 시원한 느낌과 함께 퍼렇게 든 멍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약합을 돌려주려하자 고벽후가 손을 저었다.

“또 발라야 할 테니 가지고 있어라. 내일은 금창약을 잊지 말고.”

금창약은 병장기에 베인 상처에 바르는 약이다.

‘오늘은 팼는데 내일부터는 베겠다는 뜻이구나.’

죽이지는 않겠지.

다음 날.

무한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고벽후의 반월도가 전신을 쓸었다. 말 그대로 전신을 골고루 베였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크아아아.”

피는 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반월도가 아니라 반월도의 예기에 베인 것이다.

피는 나지 않은 대신 죽을 만큼 아팠다.

움직일 때마다 전신이 조각나는 느낌에 절로 비명을 질렀다.

물론 속으로.

“기에 베인 상처가 더 아픈 법이다. 낫는 데도 오래 걸린다.”

알면서 사람을 난자하다니.

무한은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하였다.

경천승운공을 운기하자 전신 경락으로 기운이 퍼졌다가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단전 기운이 금세 충만해졌다.

“그거 좋은 거 아냐. 단전 그릇이 작아서 그래.”

고벽후는 무한의 내공 수준을 이십 년 정도라고 평가했다.

뒤늦게 무공에 입문한 것치고 무척 빠른 것이나, 명문세가의 자제들과 비교할 때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고벽후도 알지 못한 게 있었다.

무한의 몸에 쌓인 기는 사실 일갑자를 넘는다.

다만 전신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경천승운공의 화후가 부족하여 비무 중에는 이를 제대로 끌어 쓸 수가 없을 뿐이다.

그래도 강하보 악 총관에게는 통했는데 고벽후에게는 어림없었다.

무한은 전신의 기운을 단전으로 끌어들이고 단전에 들어찬 기운을 다시 전신 경락을 따라 돌렸다.

경락에 기운이 차오르며 반월도에 스친 상처 부위의 사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점차 고통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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