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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33화 (33/250)

33화

“조장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연무장까지 신경 써주고.”

모우극이 처음으로 하기주를 칭찬했다.

‘다행이다.’

경천십이식을 익혀야 하는 무한에게는 더없이 적절한 조치였다.

작은 창이 난 흙집 안은 어두웠다.

무한은 정좌를 하고 경천승운공에 따라 운기를 하였다.

경천심결에 의해 전신에 밴 기가 경천승운공에 의해 단전으로 흘러들어가 모였다가 경락을 따라 운행했다.

운기를 할수록 경락이 굵어지면서 운기 속도도 빨라졌다.

무한은 온종일 흙집에서 경천승운공을 운공하다 밤이 되어서야 나왔다.

검은 밤하늘에 무수한 별이 빛났다. 드넓게 펼쳐진 고원은 별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경이로운 세계였다.

‘아버지도 이런 밤을 봤을 거야.’

멸마대주이자 지부장을 겸했다니 이 자리에 서서 저 고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한이 성벽으로 올라갔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무한이구나.”

나타난 이는 외눈박이 오상이었다.

무한이 검천부주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멸마대원들은 그를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왜 안 자고 서성이는 거지?”

“밤풍경이 좋아서 성벽을 좀 걸어보려고요.”

“별걸 다 좋아하는군.”

오상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성벽에서 절벽으로 이어진 길을 가리켰다.

“저리로 가봐라. 거기 가면 너처럼 밤잠 없는 사람이 있을 게다.”

“……?”

무슨 소린가 싶어 가봤다.

성벽이 끝나고 절벽과 맞닿은 곳에 이르자 갈지자로 타고 절벽을 오르는 길이 나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길이었다.

길을 따라 올라갔다.

중턱 쯤 오르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절벽 안쪽으로 널따란 공동이 펼쳐진 것이다.

‘절벽 중간에 이런 곳이 있다니.’

아래서는 보이지 않으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나 마찬가지다.

공동 안은 어슴푸레 빛이 어려 있었다.

위를 보니 위쪽이 뻥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별빛이 내렸다. 빛은 희미했지만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됐다.

‘……!’

이십여 장은 됨직한 공동 한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별빛이 내린 어깨가 하얗게 빛난다.

‘고 대주?’

공동 한가운데 석상처럼 서 있는 사람은 고벽후였다.

고벽후는 반월형 도를 지그시 내린 채 묵상에 잠겨 있었다.

‘여기가 고 대주의 연공실인 모양이구나.’

잘못 왔음을 알고 조용히 물러나려는데 고벽후가 불렀다.

“왔으면 들어오지 뭐하나?”

고벽후의 눈이 어둠 속에서 퍼렇게 빛났다.

‘철혈의 매라더니, 저건 늑대 같은 눈빛이잖아?’

고벽후에게 다가갔다.

“이 밤에 무슨 일이지?”

“수련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고원의 별빛이 너무 보기 좋아서 좀 걸었습니다.”

“그래? 고원의 밤처럼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운 곳도 드물지.”

고벽후가 고개를 끄덕이다 무한의 검을 보았다.

“검을 뽑아라.”

“예?”

“비무를 하자는 말이다.”

“갑자기 비무라니요?”

“천무관 문하생이라며? 백 번 수련보다 한 번 비무가 낫고, 백 번 비무보다 한 번 실전이 낫다. 기왕 내 수련장에 왔으니 한 수 가르쳐주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무한이 검을 뽑았다.

“자세가 좋군.”

상단세를 취하자 고벽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무 정직해.”

고벽후가 반월형 도를 비스듬히 내리며 말했다.

“들어와라.”

도를 내린 상대에게 공격하려니 망설여졌다.

“뭐하는 거냐. 공격해봐.”

무한이 한 발 내디디며 일수오검을 펼쳤다.

파팟!

따다당!

고벽후가 반월형 도로 크게 원을 그리며 다섯 차례의 검을 막아냈다.

‘……?’

너무나 간단하게 막혔다.

고벽후가 한심해하며 말했다.

“나 안 다친다. 마음껏 공격해봐라.”

고벽후가 도를 까닥였다.

‘좋아.’

무한이 다시 일수오검을 펼쳤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했다.

파파팟.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근육의 기운을 집중하였으니 타격도 클 것이다.

따다당!

그러나 이번에도 고벽후는 가볍게 검을 쳐냈다.

고벽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하는 거냐? 내력을 실어 제대로 해라!”

무한은 작정을 하고 일수오검 사방위에서 공격을 했다.

쉬쉬쉭!

별빛 속에서 검이 번뜩였다.

그러나 결과는 허무하게도 똑같았다.

고벽후는 선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무한의 검을 모두 쳐냈다.

“심각하군. 요즘 천무관 문하생 수준이 다 이런 거냐. 아니면 너만 그런 거냐?”

“…….”

“이런 실력으로 강호에 나갔다간 첫 싸움에서 죽고 말 것이다.”

수긍하고 싶지 않지만 고벽후가 너무나 간단하게 막아내니 할 말이 없었다.

“다시 해 봐.”

고벽후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무한은 가만 서 있다 벼락같이 한 발을 내디디며 검을 내리쳤다.

일수오검 삼십육방위.

지난 오 년간 익힌 심의삼재검을 다 쏟아냈다.

천지인의 도와 찌르기를 적절히 배합한 공격이었다.

쉬쉬식!

챙, 채채챙!

고벽후는 이번에도 선 자세 그대로 다 막아냈다. 반월도가 고벽후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벽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말했다.

“비무가 어린애 장난이냐? 실전이라 여기고 덤비라니까!”

무한이 검을 내려다봤다.

심의삼재검이 통하지 않으니 경천십이식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천십이식…….’

이제까지 다른 사람 앞에서 경천십이식을 펼친 바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 검을 뻗었다.

‘천의격.’

경천십이식 제일식이자 지금으로선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이다.

소리부터 달랐다.

스스슥.

검극이 고벽후의 요혈을 향했다.

고벽후가 반월형 도를 내밀어 흔들었다.

따당!

천의격 검세가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막혔다.

고벽후가 반월도를 올려치자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나갔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다시!”

고벽후가 인상을 썼다.

무한이 다시 자세를 잡고 경천승운공을 운기했다.

단전 기운이 폭발하듯 일어나며 천의격에 해당하는 경락을 따라 뻗어 나갔다.

위잉!

미미한 내력이지만 검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쉬이이익!

순식간에 십여 차례 검초가 이어졌다.

고벽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좀 낫군!”

그러더니 늘어뜨린 반월도를 올렸다.

“하지만 너무 부족해. 내 공격을 받아봐라.”

고벽후의 반월도는 두 자에도 못 미치는 짧은 도였다. 도신의 중간이 구부러져 있어 더 짧아 보였다.

그런데도 전혀 짧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파파팍!

고벽후의 반월도가 환영을 그렸다.

‘아!’

무한이 속으로 경탄했다.

한순간 수십 가닥의 도영이 피어났다.

차가운 빛을 발하는 도영은 마치 꽃봉오리처럼 첩첩이 겹쳐져 막아섰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꽃봉오리.

닿는 순간 난도질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스쳤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천의격!’

재차 천의격을 펼쳤다. 지금으로선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이니까.

쉬시시시식!

순식간에 열여섯 갈래로 짓쳐드는 검이 반월도가 만들어낸 도영과 부딪히는 순간 연달아 폭음이 일었다.

까가강!

쇠가 부딪힌 소리라고 할 수 없는 기음이 터졌다.

‘으윽!’

양팔이 마비되고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파앗!

고벽후의 도는 멈추지 않았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기음과 함께 무수한 도영이 향해 날아들었다.

‘헉!’

무한은 억지로 몸을 돌리며 검을 내질렀다.

경천십이식 제이식 지천격.

땅과 하늘을 가르는 검세가 고벽후의 도영과 부딪혔고.

“크윽.”

결국은 나가떨어졌다.

고벽후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싸움 아니, 비무도 처음이지?”

“…….”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기 직전 강하보 악 총관과 몇 수 겨루었다. 그때는 악 총관이 무한을 경시했기에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벽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다시 해봐라. 이번에는 검을 받아주마. 마음대로 쳐봐라.”

무한이 내심 작정을 하고 천의격과 지천격, 회천격을 연달아 펼쳤다.

경천십이식 가운데 그나마 제대로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한 세 식이다.

고벽후는 그 자리에 서서 반월도를 살짝살짝 비틀며 가볍게 검격을 받아냈다.

챙! 채챙! 챙!

아무리 공세를 퍼부어도 마찬가지였다.

고벽후는 짧은 도를 감거나 내치거나 당기며 검을 모두 막아냈다.

챙!

반월도와 검이 부딪히고 무한이 뒤로 물러났다.

공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멍하니 서서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상대를 한 발짝도 물러서지 못하게 하다니.

환골탈태 이후 상승 경지에 접어들었다고 자신했던 게 부끄러웠다.

고벽후가 말했다.

“이봐, 애송이. 무공을 익히는 것과 싸움을 하는 건 다른 거다.”

“…….”

“네게 필요한 건 싸움의 기술이다.”

‘싸움의 기술?’

“일류무사도 저잣거리 흑도와 싸우다 죽을 수 있다. 왜? 무공 실력은 무사가 높지만 싸움의 기술은 흑도가 더 뛰어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무인의 싸움은 골목 싸움이 아닌데.

“무인이라고 별 거냐?”

무한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고벽후가 말했다.

“무인을 승부의 길을 걷는 자이니 뭐니 하는 거, 다 개소리다. 이기는 자가 살고, 살기 위해서 이겨야 한다.”

할아버지는 무인의 길을 불인(不仁)의 길이라고 했다.

고벽후는 싸워 이기는 게 무인의 길이라고 한다.

‘그렇구나.’

고벽후가 말하는 무인의 길.

할아버지가 말한 무인의 길.

그건 각자의 길이다.

‘그럼 나의 길은 무엇인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리 와 앉아라.”

고벽후가 손짓했다.

공동 한쪽에 두 사람이 앉을 만한 편평한 바위가 있었다. 위에 술병이 놓여 있었다.

고벽후가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건넸다.

무한도 한 모금 마셨다.

가슴이 확 타오르는 독주였다.

“싸움은 실력이 삼이면 경험이 칠이다. 실망할 것 없다. 경험은 싸워야 느는 거니까.”

“경험…….”

“실전이 가장 중요하지. 그런데 너 같은 애송이는 세 번 싸우기도 전에 죽을 거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싸움에서 운이 세 번 이상 따르는 경우는 없다.”

실전이 중요하다면서 세 번 싸우기도 전에 죽는다니.

“그래서 실전 같은 비무가 중요한 것이다. 실전에서는 다음이란 게 없으니까.”

고벽후가 일어나며 말했다.

“다시 공격 해봐라. 네가 지닌 밑천이 드러나면 그게 네 바닥이다. 거기서부터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거다.”

무한은 다시 검을 들고 고벽후와 마주했다.

술이 한 잔 들어가니 오히려 마음이 진정됐다.

‘그래. 어차피 비무야. 상대는 고수고. 내 실력을 가늠해보자.’

생각해보니 다시없는 기회였다. 고벽후가 호의를 베푸는 거다.

정신을 가다듬고 심의삼재검을 펼쳤다. 아까처럼 막무가내가 아니라 방위를 바꿔가며 탐색전을 펼쳤다.

“흐음.”

고벽후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순간 오른쪽이 비어 보였다.

쉭!

깡!

허무하게 막혔다.

그러나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검세가 어느새 천의격으로 이어지고, 경천십이식을 하나둘 펼쳤다.

고벽후는 철벽과 같았다.

무한은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그러다 지쳤다. 팔이 뻣뻣해지고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검세는 흐트러져 막싸움처럼 형을 잃어버렸다.

하루에 수천 번 내려치던 삼재검식도 제대로 펼치기 어려웠다.

상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컸다.

어느 순간 막기만 하던 고벽후가 한 걸음 내디뎠다.

“이만 됐다.”

“……!”

고벽후의 도가 어느새 정수리 위에 놓였다.

싸늘한 도의 예기에 머리가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고벽후가 도를 거두고 말했다.

“이 느낌을 잊지 마라. 네가 죽기 직전의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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