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32화 (32/250)

32화

고벽후가 하기주에게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천무행이 수련의 과정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다른 사정이 있는 건 아니고?”

“일개 교두가 윗사람들의 뜻을 어떻게 알겠소.”

고벽후는 말없이 술을 들이켜고는 생각에 잠겼다.

모우극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무한에게 속삭였다.

“야, 왜 네가 여기 있는 게 비밀이냐?”

무한이 답하기도 전에 외눈박이 오상이 끼어들었다.

“그걸 모르냐?”

“…….”

“검천부주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 마천 놈들이 기를 쓰고 달려올 거야.”

“왜요?”

“몰라서 물어? 예전 검천부주가 누구야?”

“검신 어르신이었죠.”

“그분 손에 죽은 마천의 고수가 수십 명은 될 거다. 또 그 아드님이 누구냐?”

“…….”

“검왕 심군하.”

모우극이 바로 대답을 못하자 오상이 답답한 듯 자기가 말했다.

“……?”

무한은 아버지의 별호를 처음 들었다.

검왕이라고?

도왕과 권왕과 같은 반열이었던 거야?

오상이 하나 남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아드님이 마천을 감숙에서 내몰았단 말이다.”

모우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군요. 그래서 원한이 있는 모양이죠?”

“그렇지. 마천도들은 천하방 검천부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지.”

오상의 말은 나직했으나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기에 다 들을 수 있었다.

화라락!

치익!

장내에는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와 고기가 익어 기름이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무한은 가만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의 자취를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버지가 마천을 몰아냈다고?’

아버지는 일 년에 두어 차례 집에 돌아올 때마다 서역의 신기한 물건을 가져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면 회문로 아이들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때 무한도 상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진정한 신분이 밝혀지고, 무한은 그 뒤를 이어 여기에 있다.

감개무량했다.

동시에 퍼뜩 떠오르는 별호.

‘불망객!’

아버지는 불망객과 생사결을 벌인 후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라면 아버지와 불망객의 일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

무한이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고벽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무한, 머리를 단단히 챙겨야 할 거야.”

고벽후는 술병을 들어 벌컥,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서 벌어지는 싸움은 집단전이 대부분이다. 무인 대 무인의 싸움 같은 건 잊어버려라. 눈앞의 상대만 보다간 뒤에서 날아오는 칼에 끽 소리도 못하고 가는 수가 있다. 그러면 염왕 앞에 가서 누가 죽였는지 고할 수도 없다.”

무한이 말없이 들었다.

“내 뒤를 지켜주는 동료가 있다면 그를 네 몸처럼 여겨야 할 거야.”

무한뿐만 아니라 모우극과 백상인, 강소소까지 눈빛을 반짝이며 고벽후의 말을 들었다.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뒤에서 기습이라도 해야 한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천하방은 정파입니다.”

모우극이 말하자 고벽후가 코웃음을 쳤다.

“정파?”

고벽후가 가소롭다는 듯 크게 웃었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무한이 말했다.

“멸마대는 천하방 규율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것 같군요?”

천무관에서 들은 천하방 무인의 도리랄까?

그런 게 있다.

협의를 행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한다는 게 대략의 요지다.

고벽후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상대가 무인이라면 무인으로 대하고, 마천이라면 마천으로 대한다. 마적이면 마적만큼만 대우하면 된다.”

상대에 따라 달리 대하란 말이다.

“그래도 천하방 무인으로서 지켜야 할 자세는 지켜야죠.”

모우극이 툭 튀어 나와 대꾸했다. 겁은 제일 많은 놈이 입을 놀리는 건 제일 빠르다.

“그러다 죽던가.”

고벽후가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술을 들이켰다.

“죽고 싶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다.”

모우극이 머쓱해하였다.

“여기서 규율 따지다가 죽은 놈이 한둘이 아니지. 아까 말했지? 이 땅은 우리와 마천도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외눈박이 오상이 한심하다는 듯 모우극에게 말했다.

“공존하는 곳이라고요?”

“몰랐나. 여기부터 이백 리까지는 천하방과 마천의 공유지다. 이 안에서는 최대 무력대 일백 명까지만 주둔하기로 약속하였지.”

“공유지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서로 칼을 겨누지 않고 공존하는 땅이란 뜻이다. 서로 적대시하지 않기로 했지.”

“아! 일종의 평화협정을 맺은 땅이로군요.”

모우극이 아는 척했다.

여기서 마천도를 만나 죽을 일은 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오상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말야…….”

오상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몰래 잡아다 죽이고…… 묻어버리면 누가 알겠냐?”

“헉!”

모우극이 숨을 들이켰다.

“대주가 지부장이 되기 전까지 일 년에 두셋씩 지부장이 갈렸을 걸?”

“크크크. 오죽하면 죽이고 싶은 놈이 있으면 감숙지부장으로 보내라는 소문이 돌았겠어.”

언제 왔는지 처음 일행을 맞아주었던 거구의 장한이 말을 받았다.

“아무튼 반갑군. 검천부주라니. 천하방에 들어온 이래 내가 만난 최고위층이로군. 나는 멸마대 부대주 연추산이라고 한다.”

“크크크. 나는 장초다. 멀쩡한 무인들을 보니 기분이 새롭군. 나도 너희 같은 시절이 있었지. 나는 진무관 출신이다.”

장초는 괴이한 웃음을 자주 흘렸다.

진무관 역시 천하방의 무관으로 명문에 속한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명문 무관 출신은 대개 좋은 보직을 받아 방내에서 지내는 게 보통이다.

장초가 또다시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내가 말야. 한 성질하거든. 상관이라는 놈이 뒷돈을 너무 밝혀. 그래서 돈 대신 칼을 배때기에 찔러줬지.”

장초는 비쩍 말랐는데 희번덕거리는 눈이 확실히 성깔이 있어 보였다.

“이놈 성깔이 그래도 많이 누그러들었지. 여자를 만났거든.”

외눈박이 오상이 킬킬거렸다.

“멸마대 홍일점이 오는군. 장초, 오늘 너는 술 마시기는 튼 것 같다.”

돌아보니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오고 있었다.

여자 치고 체구가 좀 있어 보였는데 질끈 묶은 머리를 뒤로 늘어뜨렸다.

“홍염이 장초와 혼인을 한 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지.”

오상이 중얼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붉은 옷의 여자를 홍염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홍염이 장초 옆에 앉더니 술잔을 내밀었다.

“재들이야? 천무관 애송이들?”

홍염은 여인임에도 입이 거칠었다.

장초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어린애들이라고 무시하지 마. 천하방 고위층 자제들이시니까 언제든 우리 상관으로 올 수 있다고.”

“흥! 이 버려진 땅에 오면 떨거지지. 안 그래?”

“크크크. 지금 서방님을 떨거지라고 한 거냐?”

“솔직히 그렇지.”

홍염이 술을 벌컥, 마셨다.

“크크크. 우리 마누라는 술도 잘 마셔.”

무한이 오상에게 물었다.

“멸마대원은 여기 있는 분들이 다 입니까?”

“응? 그렇지. 마흔하나. 다 죽고 대주까지 해서 마흔하나 남았지.”

장초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 이상하게 충원돼도 얼마가지 않아 마흔하나만 남지.”

“그건 네놈들 모가지가 질겨서 그런 거야.”

“백전노장이라고 말해줄래?”

“시끄러. 너희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다 대주 덕분이라는 거 몰라?”

홍염이 소리쳤다.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의 매! 그가 있는 한 멸마대는 영원할 거야. 자, 그를 위해 건배하자고.”

홍염이 고벽후 쪽을 보며 술잔을 들었다.

‘여장부가 따로 없구나. 그런데 철혈의 매라니?’

고벽후를 보았다.

그의 별호인 모양이다.

멸마대원들이 시끌벅적 떠들며 술을 마시는 동안 밤이 깊었다.

고벽후가 일어나며 말했다.

“적당히 마셔라! 경계 서는 놈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고벽후는 무한 일행을 자신의 거처 바로 옆에 배정했다.

***

지평선 멀리서 붉은 빛이 퍼지더니 불덩이 같은 해가 떠올랐다.

밤새 차갑게 식었던 땅에 햇볕이 비치며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광활한 대지를 보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요산자와 산천을 다니며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여기는 마치 용의 등과 같은 땅이네.’

거친 대지를 보며 든 생각이다.

그동안 서둘러 달려오느라 그간 수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한은 심의삼재검으로 몸을 풀었다.

보는 눈이 있으니 경천십이식을 수련할 수가 없었다.

한창 검을 휘두르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검을 멈추고 돌아보니 고벽후가 서서 보고 있었다.

무한이 수련을 검을 내리자 고벽후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군.”

고벽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예?”

“오래전에도 본 적이 있지.”

“뭘 말입니까?”

“그 이상한 검법으로 몸을 푸는 무인.”

‘아버지를 말하는 거로구나.’

무한은 굳이 묻지 않았다.

“따라와라.”

고벽후가 무한을 데리고 성벽으로 올라갔다.

해가 솟으며 메마른 대지가 달아올랐다.

“여기를 흔히 버려진 땅이라고 하지. 하지만 중원 그 어디보다도 많은 돈이 흐르는 곳이다.”

고벽후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 길로 수많은 상단이 오간다. 저기 봐라.”

정말 저 멀리 이 새벽에 지나는 행렬이 있다. 상단인 듯 짐수레가 가득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풍요로운 땅 같이 보이기도 하네요.”

고벽후가 씨익, 웃었다.

“통통한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도 꽤 많아. 상단을 노리는 마적떼가 한둘이 아니지.”

어제 고벽후를 쫓아오던 이들이 생각났다.

마적떼였을까.

“게다가 여러 종족이 살고 있기에 싸움이 끊이지 않아. 이 땅은 조정이나 마천, 천하방 모두가 가장 원하면서도 가장 골치가 아픈 곳이지.”

“그래서 버려진 땅이라고 하는군요.”

“십여 년 전만 해도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

“……?”

“이 땅에 희망을 심어준 이가 있었거든. 그가 있을 때 마적은 숨 죽이고 마천 또한 날뛰지 못했지. 상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문물은 번창했었다. 그는 이 땅의 패자였다.”

고벽후의 눈빛이 과거 어느 날을 더듬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아침 해가 들었다. 각진 턱과 굵은 콧대, 짙은 눈썹이 빛났다.

짙은 눈썹 아래서 예리한 안광이 흘러나왔는데 마치 높은 하늘에서 먹이를 찾는 매와 같이 날카로웠다.

‘철혈의 매.’

무한은 왜 그를 철혈의 매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철혈의 매라고 불렀지.”

“……?”

아침 햇살에 물든 고벽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대주가 철혈의 매가 아니었나요?”

“나?”

고벽후가 하하, 웃더니 말했다.

“애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긴 하지. 좋게 말해서 이대 철혈의 매라고나 할까?”

고벽후가 말을 마치고 성벽을 내려갔다. 뭐가 그리 좋은지 가면서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

“모두 모여라!”

하기주가 무한 등을 불러 모았다.

“나머지 조들이 오려면 스무 날은 지나야 할 게다. 그동안 이곳에 적응하며 수련을 한다.”

하기주의 말마따나 장기간 여행으로 모두 지친 상태였다.

“따라와라.”

하기주가 흙집이 있는 곳으로 갔다.

“비어 있는 흙집을 하나씩 골라 들어가라. 죽도록 수련해야 할 것이다. 마적과 싸우려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