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건물 밖 흙집에서도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손에 검과 칼을 들고 있다.
방금 전 패잔병 같은 기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매서운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누가 지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잠깐 사이에 수십 명이 바깥 성벽에 섰다.
성벽 뒤로 매복이 숨고, 화살을 든 몇몇이 대궁을 놓고 화살을 집어 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살벌해지자 모우극이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하기주가 내성 밖으로 나가 바깥 성벽 위로 올라갔다.
무한도 뒤따라갔다.
황토고원 저 멀리 먼지구름이 잔뜩 피어올랐다.
한 사람이 말을 달리고, 그 뒤로 수십 명이 따라 오고 있었다.
앞서 달리는 이의 기마술이 무척 뛰어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쪽에서 수십 명이 달려 나가자 쫓아오던 무리들이 멈췄다.
그러자 도주하던 이가 말을 멈추고 뒤돌아서 소리쳤다.
“야, 이 자식들아. 여기까지 와보라고!”
저쪽에서도 뭐라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쪽에서 수십 명이 나오는 걸 보고 다가오지는 않았다.
잠시 후 쫓기던 사람이 성벽 가까이 달려왔다.
잿빛 늑대 가죽을 두르고 늑대 털로 만든 모자를 쓴 서른 중반 가량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허리에는 휘어진 도를 찼다.
“어, 마중 나왔냐? 안 그래도 되는데.”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거요?”
부대주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거 안 보여?”
사내가 말 등에 찬 커다란 푸대자루를 툭툭, 쳤다.
“와아!”
푸대자루를 본 이들이 환호를 질렀다.
“술이다!”
“크흐흐.”
푸대자루에 담긴 게 술인 듯했는데 어떤 이는 벌써 침을 흘리고 있었다.
부대주가 푸대자루를 받아들며 말했다.
“본방에서 손님이 왔소. 천무행이라나 뭐라나.”
“천무행? 그게 뭔데?”
사내가 말에서 훌쩍 내리며 물었다.
그사이 성벽에서 내려온 하기주가 앞으로 나가 말했다.
“천무관 교두 하기주라고 합니다. 천무관 문하생들이 천무행을 왔습니다. 며칠 후 행수와 나머지 일행이 도착할 겁니다.”
사내는 말 옆구리 매단 물주머니를 풀어 들고는 벌컥 들이마셨다.
“퉤!”
물로 입을 헹군 사내가 인상을 쓰더니 뒤를 돌아봤다.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쫓아오던 무리가 아직도 서 있었다.
사내가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야, 오늘은 이만 가라. 손님이 있어서 접대하기가 어렵다! 다음에 보자고!”
무리들은 성채까지 오지는 못하고 욕을 한바탕해댔다.
“자식들! 간은 작아가지고.”
사내가 킬킬 웃으며 한마디 하고는 무한 등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수련생들이 왜 전장에 오고 그래? 귀한 집 자식들 같은데 이 험지에 뭐 볼 게 있다고.”
사내는 대답도 듣지 않고 말 엉덩이에 매달린 가죽주머니를 풀었다.
“신참 소식은 없고 수련생을 보내다니. 대체 뭔 생각인 거야?”
사내가 말 엉덩이를 치자 말이 알아서 마구간으로 갔다.
“따라와라.”
사내가 가죽주머니를 들고 가며 말했다.
“나는 멸마대주 고벽후다. 감숙지부장도 대리하고 있지. 아무튼 고원에 온 걸 환영한다.”
고벽후가 걸어가며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본방에서 손님이 왔다. 양 몇 마리 잡아라.”
그러고는 누군가를 찾았다.
“장초, 장초는 어디 갔어?”
“예! 갑니다, 가요.”
흙집에서 한 사람이 바지춤을 잡고 나왔다.
“이 자식이 아직 해도 안 저물었는데 벌써……!”
“크크. 신혼이잖수. 봐주쇼.”
고벽후가 손에 든 가죽주머니를 던졌다.
장초가 받으려다 바지가 흘러내리자 황급히 다시 바지를 추켜잡느라 가죽주머니를 놓쳤다.
가죽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며 빡빡 깎은 대머리 하나가 굴러 나왔다.
“커흑!”
모우극이 자기 목이라도 잘린 듯 헛숨을 들이켰다.
백상인과 강소소도 인상을 찌푸렸다.
무한도 마찬가지로 눈살을 찌푸렸다. 잘린 사람 머리를 보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가끔 천하방 처형장에 잘린 머리가 걸린 경우가 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보기는 처음이다.
고벽후가 인상을 썼다.
“야, 조심해. 그놈 얼굴 나가면 포상금 날아가는 수가 있다고.”
“아, 죄송.”
“발 빠른 애 시켜서 난주로 보내. 포상금 확실히 챙기고.”
‘포상금?’
무한이 잘린 대머리를 봤다.
범죄자인가?
장초가 나뒹군 대머리를 집어 들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잘린 목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를 본 강소소가 뒤로 돌아서 욱욱, 거렸다.
“여, 여, 여기 마적 소굴이지? 맞지?”
모우극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며 백상인에게 속삭였다.
“아닐걸? 저기 봐. 감숙지부 맞잖아.”
백상인이 요새 정문에 달린 천하제일방 감숙지부 현판을 가리켰다.
“마적이 점령한 걸 거야. 확실해.”
모우극의 손은 검자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 교두라고 하셨소?”
“천무행에서는 조장입니다.”
“천무행이 뭔지 얘기나 들어봅시다.”
고벽후는 대청 옆에 있는 흙집으로 하기주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사이 대전 앞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한쪽에서 양을 몇 마리를 굽고 다른 한쪽에는 술통을 쌓아놓고 먹고 마셨다.
아직 익지도 않은 고기를 손으로 쭉 찢어 게걸스럽게 먹는 이도 있었다.
“짐승들 같아.”
모우극이 백상인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부대주가 손짓을 했다.
“이리들 와. 먼 길 오느라 고생했는데 배는 채워야지.”
무한이 다가가니 부대주가 칼로 크게 한 토막 베어 접시에 담아 주었다.
벌건 핏물이 배어나왔다.
“약간 핏기가 있을 때 더 맛있는 거야.”
무한이 한 입 먹었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그걸 먹냐?”
모우극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맛있는데?”
백상인도 접시에 고기 한 토막을 담아 뜯자 모우극도 한 점 잘라 먹었다.
“그게 뭐냐. 제대로 좀 먹어봐.”
눈 하나가 없어 검은 안대를 찬 사내가 양 뒷다리 하나를 쭉 찢어 무한 일행 앞에 놓았다.
대충 익혀서 핏기가 뚝뚝 흐르는 양다리를 보고 강소소는 다시 토할 뻔했다.
“크하하. 오상, 꼬마 아가씨를 놀리면 안 되지.”
사내들이 왁, 하고 웃었다.
“흥!”
강소소가 발끈하여 양다리를 걷어찼다.
아, 성깔 있는 강소소.
퍽!
양다리가 화로에 떨어졌다. 지글지글 고기가 타올랐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뭐야, 아까운 고기 다 태우잖아.”
고기를 굽던 사내가 달려와 양다리를 꺼내 꼬치에 꿰어 화로에 걸었다.
“이봐, 애송이들. 성의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외눈박이 오상이 한쪽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백상인이 벌떡 일어나 사방으로 포권을 하며 말했다.
“하하하. 형님들, 우리가 날고기는 익숙지 않아서 좀 더 구워 먹으려 한 것뿐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남의 호의를 발로 걷어차다니.”
“하하하. 저 계집애 엉덩이도 한번 걷어차라고.”
강소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발끈하여 나서려는 걸 무한이 막았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하였다.
“천하방 멸마대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습니다. 서북 변방에서 마천과 싸우는 영웅들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 멸마대의 모습은 제 생각과 사뭇 다르군요.”
“뭐야? 저놈은?”
“왜 저렇게 진지한 건데?”
사내들이 비아냥거렸다.
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마적떼와 다를 바 없어 보여 무척 놀라고 있습니다.”
“뭐? 마적떼?”
“어린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군.”
여기저기서 화를 벌컥 냈으나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사람을 겉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만, 여러 선배의 행색이 제게는 그리 보입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 생각이 깊지 못하니 정말 궁금합니다. 왜 이리 야만스럽게 행동하시는 건지요?”
예의를 갖춰 말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니 거친 사내들도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도 잠시 이내 여기저기서 화난 목소리가 쏟아졌다.
“저놈 뭐야? 입에 기름이라도 두른 거야. 말솜씨가 번지르르한데?”
“그러게 말야. 애야, 늙은이야?”
“야만스럽다고? 이리 와봐라. 왜 그런지 가르쳐주마.”
그때 한쪽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하. 그 녀석, 주둥아리가 꽤나 맵군. 관직으로 나가지 그랬냐?”
고벽후가 하기주와 같이 오고 있었다.
“뭐해? 다들 앉아. 술이나 마셔.”
“이 애송이가 우리를 욕했는데 같이 앉아서 마시자고요?”
일어섰던 사내 하나가 무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 천지분간 못 하는 애송이들하고 뭔 말을 섞겠다는 거야? 저놈 말 못 들었냐? 아무것도 모르니 가르쳐달라지 않냐. 누가 좀 가르쳐줘라.”
고벽후가 양다리 하나를 쭉 찢어 베어 물더니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외눈박이 오상이 말했다.
“애송아. 귀를 잘 씻고 들어라. 여기는 버려진 땅이다. 버려진 당에서 버려진 인간이 제멋대로 사는데 누가 뭐라겠느냐?”
“버려진 땅이라니요?”
진심 궁금하여 물었다.
“중원 무림도 천하방도 그리고 마천도 돌보지 않는 땅이라 그 말이다.”
오상이 말하다 말고 술을 벌컥, 마셨다.
퍽!
양 뼈다귀가 날아와 오상의 이마에 격중했다.
“누구야?”
오상이 벌떡 일어났다.
고벽후가 양 갈비를 쭉 잡아 찢으며 말했다.
“나다!”
“아니 왜…….”
“애들에게 친절하게 일러주라 했지, 개뼈다귀 같은 소리를 하라고 했냐? 네놈들 꼴이 지저분한 걸 왜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거야.”
오상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이리 와봐라.”
고벽후가 무한 등을 불렀다.
“여긴 물이 부족하다. 그래서 씻지를 못해서 저래. 네가 이해하라고.”
고벽후가 자신의 등을 북적북적 긁었다.
“그러고 보니 씻은 지 석 달이 넘었군.”
그 소리에 강소소가 울상을 지었다.
“으하하!”
그 모습을 본 사내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고벽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왔으면 신고식을 해야지. 내가 명색이 감숙지부장인데 말야.”
하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숙지부장이자 멸마대주시다. 인사드려라.”
백상인이 먼저 일어났다.
“천무관도 백상인입니다.”
“모우극이라 합니다.”
“강소소입니다.”
“심무한입니다.”
고벽후가 일행을 훑어보다가 무한에게서 멈췄다. 한참을 뚫어져라 보더니 말했다.
“천하방에는 남다른 심 씨가 있지.”
고벽후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다.
“내가 아는 심 씨 맞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무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취했다.
고벽후가 몸을 일으키더니 뜻밖에도 포권으로 답례를 하였다.
“이런, 검천부주셨군. 멸마대주 고벽후네.”
무한은 검천부의 주인이지만 지금은 천무관 문하생 신분이다.
고벽후가 무한을 유심히 살피곤 말했다.
“한 가지 충고를 하지. 여기서는 누가 묻더라도 검천부를 들먹이지 말게.”
그러더니 하기주를 향해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미쳤군. 검천부주를 이곳으로 보내다니.”
고벽후는 멸마대원들에게도 일렀다.
“너희들도 절대로 입도 뻥긋하지 마라. 검천부주는 여기 없는 거다.”
멸마대원들도 무슨 소리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무한을 봤다.
눈빛들이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