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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30화 (30/250)

30화

강문평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월아가 강문평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누나에게 맡겨주렴. 이따가 놀러와.”

강문평이 모우극을 쏘아보고는 악 총관을 향해 달려갔다.

“가시지요.”

월아가 무한 일행을 월야루로 안내했다.

“이야. 화려하네.”

화려한 월야루 내부를 보면 확실히 이곳이 기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천하방 전각들은 무인 집단이니만큼 이런 화려함은 없었다.

월아가 주인 자리에 앉아 차를 냈다.

“천하방 분들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천하방이라고 콕 집어 말하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감숙지부로 가시나 보네요?”

천하방 지부도 알고 있다.

감숙지부가 여기서 부지런히 말을 달리면 하루 거리다. 가깝다 할 수는 없지만 멀다고도 할 수 없다.

“하하하. 감숙지부 사람들이 여기를 자주 찾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모우극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강소소가 말을 자르고 나섰다.

“여기는 단순한 기루가 아닌 모양이군요.”

말이 잘린 모우극이 머쓱하여 다시 입을 열려는데 백상인이 소매를 잡아 말렸다.

모우극의 주둥이가 또 무슨 재앙을 불러일으킬까 걱정되는 모양이다.

월아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기루가 별 게 있겠습니까? 여협께서는 기루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요?”

“아까 말이에요. 강하보란 곳이 이곳에서 위세를 떨치는 흑도방파 같던데 당신의 몇 마디 말에 그냥 물러났잖아요.”

“그건 강하보에서 우리 기루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매달 건네는 보호비가 꽤 되거든요.”

월아의 말에 강소소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한은 말없이 차만 마셨다.

모우극만 불만스러운 투로 차를 마셨다. 아주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서 지금 이 상황이 누군 때문에 일어난 건지 아니까 입을 닫은 것이다.

그때 하녀가 다가와 월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녀가 나가고, 월아가 무한에게 말했다.

“천하방에서 온 분들이 여럿인 모양이군요. 여러분들을 찾아왔다는데요.”

“다른 조가 온 거 아냐?”

모우극의 말에 백상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지금껏 제대로 쉬지 않고 경공으로 달려왔다. 다른 조가 벌써 따라왔을 리가 없었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기주가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일행을 만날 시간이 됐습니다. 이제 가야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모우극이 눈치 없이 말하는데 하기주가 들어섰다. 사람을 시켜 불렀는데 바로 나오지 않으니 기다리지 못하고 들어온 것이다.

“조장!”

모우극이 벌떡 일어났다.

하기주의 눈빛이 싸늘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냐?”

“이, 이분이 차를 내주신다 하여 마시는 중입니다.”

“한가하구나.”

하기주가 다탁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나와라.”

하기주는 더 말 섞기도 싫다는 듯 바로 뒤돌아나갔다.

무한이 월아에게 말했다.

“차는 잘 마셨습니다.”

찻값을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하기주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나?”

모우극 등이 후다닥 하기주를 따라 나갔다.

월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분이 대장인 모양이군요.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인데 어서 가시지요. 제가 초대했으니 찻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무한은 나오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월아가 자신과 일행을 불러들인 이유가 뭘까?

단지 강하보와 시비가 붙는 걸 말리기 위함이었을까?

그렇다면 굳이 차까지 대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월아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정말 차 대접이 다였을까.’

아무래도 이상했다.

일행은 하기주를 따라 객잔으로 돌아왔다.

하기주는 자기 방으로 모두를 불러들였다.

“네놈들이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여기가 천하방인 줄 아느냐? 반점에서 싸움을 벌여?”

하기주는 이미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하긴, 난주 한복판 반점에서 십여 명이 병장기를 들고 싸웠는데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모우극. 네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

모우극이 입을 열지 못했다.

백상인이 대신 변명했다.

“다행히 월야루에서 수습을 해줘서 별일 없이 끝났습니다.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차를 마셨고요.”

“한심한 놈. 월야루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기루가 못 갈 곳은 아니죠.”

모우극의 말에 하기주가 혀를 찼다.

“월야루는 난주의 흑도를 암중에서 관장하는 곳이다. 흑천의 흑월 산하라는 말이다.”

“예에?”

모우극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천하방과 흑천은 중원 곳곳에서 세력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정마대전 이후 천하방의 주적은 흑천이다.

흑천은 흑도의 여러 방파가 천하방처럼 연합한 방파다.

천하사패처럼 중심세력이 있는데 흑월(黑月)과 사천(邪天)이다.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디밀고도 용케도 무사히 나왔구나.”

‘역시.’

무한은 월야루가 흑천의 흑월 소속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난주를 떠난다. 월야루가 무슨 까닭으로 너희에게 관심을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맞습니다. 서둘러야 해요.”

모우극이 부랴부랴 짐을 챙기며 무한 등을 재촉했다.

“뭐해! 흑천 흑월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고! 너희도 어서 챙겨. 빨리 가자.”

***

메마른 산과 고원을 달렸다.

하룻밤 야숙을 하고 다음 날 오시 즈음 주천현에 당도했다.

일행은 현에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시 반나절 달리자 나지막한 산과 산 사이에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보였다.

성벽은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여기는 왜 이래?”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은 제 구실을 하기 힘들어 보였다.

성벽 안쪽에 흙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한가운데 삼 장 높이의 내성이 보였다.

흙으로 쌓았지만 내성의 벽은 단단해 보였다. 외성은 무너지고 내성만 제대로 남은 모양이다.

내성으로 들어가는 반월형 석문에 현판이 붙어 있다.

천하제일방 감숙지부.

바람에 씻긴 현판은 글씨를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낡았다.

문을 지키는 이조차 없었다.

“들어가자.”

말에서 내린 하기주가 먼저 들어갔다.

“여기 감숙지부 맞는 건가?”

모우극이 중얼거렸다.

내성은 좁았다.

너른 마당이 있고 맞은편에 커다란 대청이 있었다.

양옆에 늘어선 건물들은 창고나 식당 같았는데 하나같이 낡고 허름했다.

대전 계단이나 양옆 건물에 몇 사람이 앉거나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몇몇이 이쪽을 바라봤다.

‘으음… 정말 여기가 천하방 감숙지부인가?’

무한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모습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어딘가 모르게 패잔병 같은 분위기였다.

천하방 무복은 입은 이는 물론 비표를 단 이도 없었다. 대부분 짐승 가죽을 대충 둘러 입었다.

다 떨어진 넝마 같은 차림으로 술병을 껴안고 자는 이도 있었다.

마당 화로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커다란 솥이 걸려 있었다.

“여기가 천하방 지부란 말이야? 마적 소굴 아니야?”

모우극이 불안한 듯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모우극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뭐냐? 너희들은?”

대전 계단에 걸터앉아 커다란 칼을 숫돌에 갈고 있던 거구의 장한이 이쪽을 흘깃 보고는 물었다.

장한은 넝마 같은 털옷을 입고 있었는데 딱 보기에 마적 두목 같았다.

하기주가 장한을 향해 포권을 했다.

“천하방 천무관 문하생들이 천무행을 하는 중이오. 오조 인솔조장 하기주라고 하오.”

“천무행? 그게 뭔데?”

써억써억.

장한이 되묻는 소리가 칼 가는 소리와 섞여 들렸다.

“지부장은 어디 계십니까?”

“지부장? 여기는 지부장이 공석이야. 멸마대주께서 대리하고 있지.”

장한이 내성 망루를 향해 소리쳤다.

“야, 대주 어디 계시냐?

“나가셨는데?”

망루에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오더니 대답했다.

‘누군가 경계를 서기는 하는구나?’

그들이 들어오는데도 저지하지 않은 걸 보면 자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덥수룩한 머리가 부스스하다.

장한이 하기주에게 말했다.

“들었지?”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든가.”

장한은 다시 칼을 갈았다.

써억써억.

하기주가 대전 계단을 가리켰다.

“저쪽 계단에 앉아서 기다려라.”

하기주의 말에 무한 일행은 대전 계단에 줄줄이 앉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이쪽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길이 따가웠다.

써억써억.

칼 가는 소리가 조용한 내성에 울려 퍼졌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침묵만 흘렀다. 솥에서 뭔가 끓는 소리만 칼 가는 소리에 섞여 들렸다.

한참 동안 칼을 갈던 장한이 멈췄다. 날이 갈린 상태를 확인하고는 가죽으로 만든 도집에 집어넣었다.

수염이 텁수룩한 장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천하방에서 왔다는 거지? 그런데 왜 무복에 표식이 없지? 비표가 바뀌었나?”

“천무관은 수련생들이라 천하방 표식이 없소. 증명서는 행수가 오면 보여줄 것이오.”

“아니, 있으면 곤란해서 물어 본거야. 여기서 천하방 표식 달고 다니다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네? 왜요?”

장한의 말에 놀란 모우극이 되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니 극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물어본 모양이다.

장한이 얼이 나간 듯한 모우극을 보고는 흘흘, 거리며 웃었다.

“여기 마천 놈들은 천하방도들 사냥하는 데 맛이 들린 놈들이거든. 야밤에 몰래 와서 머리를 따가지. 네놈 목은 얇아서 바로 썰리겠군.”

“마, 마천라고요?”

장한이 마천라는 말에 기겁하는 모우극을 보고는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 얘 좀 봐라. 오줌 지릴 것 같은데?”

“부대주, 적당히 하자고요. 애 놀라잖아요.”

누군가 소리쳤다.

거구의 장한이 멸마대 부대주인 모양이다.

벙어리들인 줄 알았더니 한번 입이 터지자 내성이 떠들썩해졌다.

“얘들아, 걱정 마라. 여기 마천 놈들은 없단다.”

“대신 마적떼가 있지. 마천 놈들보다 더 독한 놈들이라고.”

“그렇긴 하지. 사람 목에 밧줄을 걸고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는 놈들이잖아? 마주치면 그냥 자결하는 게 나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자들이 죄다 한마디씩 하였다.

모우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를 본 부대주가 껄껄, 웃었다.

“이거 완전 핏덩어리잖아?”

사내들도 일제히 웃을 터뜨렸다.

“하하. 다리 떠는 것 좀 봐라.”

“저놈 신입으로 오면 사흘을 못가 죽는다에 은자 한 냥 건다!”

사내들의 놀림에 모우극은 더욱 위축되어 울상을 지었다.

“모우극! 하찮은 마적떼가 그리 두렵나? 정신 차려라!”

하기주가 일침을 놓자 그제야 모우극이 정신을 차렸다.

명색이 천하방 장로가 출신인데.

“제, 제가 언제 두렵다고 했나요. 마적떼 따위가 뭐 겁나겠어요.”

모우극이 간신히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때.

끼아악.

허공에서 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성벽 망루에 있던 이가 외쳤다.

“대주 오신다!”

잠시 후 멀리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

“적을 달고 오는 것 같다!”

망루에 있던 자가 다시 소리쳤다.

쉬이익.

갑자기 모래바람이라도 인 듯했다.

공기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어? 어?”

모우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이들이 벼락같이 일어나 성문을 향해 튀어나갔다.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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