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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9화 (29/250)

29화

“뭔가 잘못 아셨군요. 저 아이가 전낭을 훔치려 해서 막았을 뿐인데, 오히려 거꾸로 거짓말한 모양이네요.”

백상인이 나서자 중년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이의 말만 믿고 왔다가 어찌된 일인지 알아챈 모양이다.

중년사내가 돌아보자 아이가 흥분하여 떠들었다.

“저놈들이 누명을 씌운 거라고요. 행색을 봐요. 마적의 간자가 틀림없다고요.”

중년사내가 다시 무한 일행을 봤다.

무한 등이 오랫동안 달려오느라 행색이 볼품없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맑게 생긴 마적들을 본 적이 없었다.

중년사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자세한 건 강하보에 가서 가려보자. 따라와라.”

그럴 수는 없었다. 하기주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무한이 일어나 예를 취했다.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가 네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거지?”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협박했잖아!”

“뭐라고 협박했는데?”

아이가 눈알을 굴리다 말했다.

“강하보 따위는 단숨에 쓸어버릴 거라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라고!”

이런 뻔뻔한 꼬마가 있나.

그러나 무한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일행은 난주가 처음이야. 강하보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뭐?”

아이가 말문이 막혔다.

“강하보는 감숙에서 알아주는 문파라고! 근데 모른다고?”

말하다 말고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봐요. 강하보를 우습게 여기잖아요!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요.”

중년사내가 아이의 억지를 듣고는 인상을 썼다.

“일단 가서 이야기하자. 별일은 없을 게다.”

아이에게 소주라고 부른 걸로 보아 체면을 세워줘야 하는 모양이다.

물론 무한은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슬쩍 천목투심술을 발휘하여 보니 중년사내는 딱히 적대적이지 않았다.

아직 미완의 술수라 정확하다고 할 수 없지만, 표정이나 기운으로 봐서는 그랬다.

그때 모우극이 툭, 튀어나왔다.

“어디를 가자는 거야? 우린 그럴 시간이 없다고.”

그러자 중년사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보아하니 외지에서 온 애송이들 같은데, 타지에 가면 그곳의 법도를 따르라고 어른들이 일러주지 않더냐?”

싸늘한 목소리에 대번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무한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모우극, 이놈은 정말 골칫거리구나.’

반점에 꽤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느새 다 빠져나갔다.

무한은 강하보가 흑도 문파라고 생각했다. 흑도가 아니라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풀까 생각하는데 다시 모우극이 앞으로 나섰다.

“강하방이 제법 세가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천하방과 견줄 수 있단 말인가?”

모우극이 천하방의 위세를 내세우려 했으나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었다.

“천하방?”

중년사내가 흠칫, 하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곤 대소를 터뜨렸다.

“천하방 졸개들이었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냥 보내줄 수 없지.”

중년사내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문으로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들어왔다.

“어, 어?”

모우극이 당황해하였다.

천하방이라고 밝히면 물러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백상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백주대낮에 도심 한복판에서 싸우자는 겁니까?”

“역시 애송이들이 맞군. 싸움은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하는 법이란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따랐으면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년 사내의 전신에서 싸늘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기세로 제압하려는 것인데 으스스한 살기까지 느껴졌다.

무한의 안색이 굳었다.

흑의인들은 별 게 아닌데 중년 사내는 고수였다.

다그락, 다그락.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슬쩍 보니, 모우극이 다리를 떠는 바람에 허리춤에 찬 옥패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중년사내가 비웃었다.

“그리 심약해서 검이라도 뽑을 수 있겠냐?”

모우극이 심성이 여리다는 건 알았지만, 이리 겁이 많을 줄은 몰랐다.

무한이 중년사내를 향해 말했다.

“검이 뽑히면 피를 보겠지요. 어린애의 말 한마디에 사람이 다치는 건 정말 어이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너희는 주둥아리로 싸우느냐?”

“싸우기 전에 이치를 말씀드린 겁니다.”

“네가 강하보 소주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선을 넘었다.”

처음에는 적의가 없었던 중년사내도 이제는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게 느껴진다.

‘천목투심술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엄마 말이 맞았네.’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은 되지만, 해결하는 건 역시나 사람의 몫이다.

중년사내가 손을 들었다.

흑의인들이 일제히 도를 뽑았다.

챙!

강소소와 백상인, 모우극도 검을 뽑았다.

반점 안은 순식간에 검광과 도광이 번뜩였다.

“쳐라!”

순식간에 흑의인들이 덮쳐왔다.

무한 일행도 검을 뽑았다.

채챙!

챙!

예상대로 흑의인들은 별 게 아니었다.

백상인이나 모우극, 강소소 모두 천하방 유수의 문파 출신. 흑의인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치고 빠졌다.

모우극 등이 경험이 많았다면 아마 벌써 몇몇은 피를 뿌리고 쓰러졌을 것이다.

무한은 달려드는 흑의인의 검을 쳐내며 중년사내를 살폈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무한 등이 싸우는 걸 보고 있었다.

‘우리 실력을 가늠하고 있구나.’

중년사내는 바로 판단을 한 듯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백상인을 향해 권을 질렀다. 허리춤의 칼은 뽑지도 않았다.

백상인이 검을 비틀어 중년사내의 권을 쳐내려 했다.

그러자 사내가 주먹을 감아 백상인의 검면을 쳤다.

터엉.

내기가 실렸는지 백상인의 검이 휙, 옆으로 밀렸다. 그러자 중년사내의 왼손이 백상인의 옆구리로 밀고 들어왔다.

“헉!”

백상인이 놀라 빠지려 하자 중년사내는 오히려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위기의 순간 무한의 검이 쉭, 하고 날아들었다.

“흥!”

중년사내가 코웃음을 치고 무한의 검면을 쳐내려 하다, 정색을 하고 몸을 돌려 뒤로 빠졌다.

무한의 검에 실린 경력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것이다.

“제법이구나!”

그사이 백상인은 다른 흑의인의 공격을 맞받아치며 거리를 벌렸다.

싸움은 중년사내와 무한이 대결하는 형국이 됐다.

스르릉!

중년사내는 도를 뽑자마자 무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쉬익!

무한은 바로 옆으로 빠지며 일수오검을 날렸다.

파파팍!

중년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단순하지만 무척이나 빠른 쾌검.

거기에 실린 묵중한 경력.

애송이가 분명한데 왠지 맞받아치기 꺼림칙했다. 오랜 경험이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중년사내가 도를 뒤집으며 몸을 돌렸다.

두 번째 물러난 셈이다.

동시에 그의 미간 고랑이 더 깊어졌다.

애송이를 상대로 두 번이나 물러나다니.

쉬쉬쉭!

중년사내가 갑자기 도를 사정없이 휘저었다.

폭풍 같은 도광이 번뜩이며 무한을 향해 몰려왔다.

“조심해!”

마침 흑의인 하나를 밀어낸 백상인이 이를 보고 놀라 소리쳤다.

무한은 순간 경천승운공을 운기했다.

경천심결로 다져진 전신의 기운이 단전을 거쳐 검으로 이어졌다.

쉬시식!

무한의 검이 가볍게 움직였다.

여전히 일수오검이었으나 역심의삼재검의 변초를 섞었다.

검광이 밀려드는 도광과 부딪혔다.

채챙! 챙!

놀랍게도 무한의 내공은 중년사내에게 밀리지 않았다. 중년사내의 놀라움이 더 커졌다.

강하보 총관으로 난주 일대의 고수로 불리는 그가 애송이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다니.

그가 어금니를 쿡, 깨물고 공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어디선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놀랍게도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는 혼전의 와중인 반점 내부에 울려 퍼졌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반점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더니 길 건너 월야루의 대문이 열리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나왔다.

“악 총관. 잠시만 손을 멈추시죠.”

면사여인이 월야루 앞에서 이쪽을 바라봤다.

순간 악 총관이라 불린 중년사내가 손을 들었다. 흑의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한바탕 격전이 일었으나 아직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흑의인들은 무공이 부족했고, 백상인 등은 경험이 모자랐다.

“월아 누나!”

아이가 반색하며 달려갔다.

면사여인이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네가 또 사고를 쳤나보구나.”

“사고라니? 무슨 소리예요?”

“악 총관을 곤란하게 만들었잖니.”

“아니야, 저놈이 월야루를 욕했다고. 그래서 혼내주는 거야.”

아이가 모우극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우극이 황당해하였다.

“내가 언제?”

아이가 모우극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까 그랬잖아! 사내자식이 한 입으로 두 말 해? 천박한 기녀라고 했잖아? 역시 정파 놈들은 위선자라니까.”

무한은 모우극이 월야루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했다.

어이가 없었다.

모우극이 무심코 한 말에 죽고 죽이는 싸움까지 벌어졌다.

강호에서의 시비가 어찌 빚어질지 알 수가 없다더니, 황당한 일이었다.

“그, 그건…….”

모우극도 찔리는 게 있으니 말을 더듬었다.

월아라는 여인이 길을 건너 반점으로 다가왔다.

“천박한 기녀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어…… 그게, 그게 아니라…….”

모우극이 더듬자 무한이 나서서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서 세상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른답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을 무시한 건 정말 잘못한 일이지요.”

무한의 말에 모우극이 입을 딱, 벌렸다.

편을 드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월아가 무한의 말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기녀와 같이 약한 사람을 무심코 비하하는 걸 보니 어떤 인간인지 알 것 같군요.”

“함께 있다고 다 같은 사람은 아니랍니다.”

무한의 말에 월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더니 중년사내를 향해 말했다.

“악 총관?”

“말씀하시오.”

“문평이 월하루를 생각하여 벌어진 일 같으니 제가 처리하게 해주시겠어요?”

강하보 소주가 문평인 모양이다.

악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무한은 내심 놀랐다.

흑도방파의 총관이 기루에서 나온 여인에게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다니.

월아가 무한을 향해 말했다.

“천박한 기녀가 차를 한 잔 대접하고자 하는데, 월야루에 오실 수 있겠습니까?”

무한이 잠시 생각했다.

월아라는 여인이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천목투심술로 느끼고 있다.

‘방금 천목투심술 때문에 낭패를 볼 뻔 했는데,’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실수를 마음에 두지 않으신다면, 당연히 가야지요. 다만 일정이 있어서 오래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한의 말에 월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무한이 바로 악 총관을 향해 포권했다.

“제가 강호 경험이 없어 귀보의 소주를 가벼이 여기는 실언을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이의 실수나 제 실수나 매한가지인 듯합니다. 강호 선배로 너그러이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무한이 솔직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자 악 총관도 굳은 얼굴이 풀렸다.

서로 칼까지 뽑았으니 월아의 한마디에 물러나는 것이 마뜩지 않았던 참이다.

그런데 무한이 시원하게 체면을 세워주자 악 총관이 껄껄, 웃었다.

“그 정도를 실수라고 할 건 없지. 어린 친구가 보기와는 다르군.”

그러더니 흑의인들을 향해 말했다.

“물러나라.”

흑의인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악 총관이 점소이를 불러 은자 몇 냥을 던졌다.

“기물이 부서진 값이다.”

악 총관이 무한을 보고 말했다.

“강호에 나도는 말 중에 친구를 가려 사귀라는 말이 있지.”

악 총관의 시선이 뻘쭘하게 서 있는 모우극을 향했다.

“주둥이가 재앙인 놈이야. 혓바닥을 놀릴 때마다 화를 부르는 놈은 멀리하는 게 좋을 걸세.”

모우극의 얼굴이 시뻘게졌으나 악 총관은 흥, 하고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객잔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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