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대체 무슨 임무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백상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임무는 나중에 알려줄 것이다.”
하기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더는 토 달지 마라. 조장에게 주어진 권리이니까. 아니면 조를 바꿔달라고 하던가.”
다른 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이제 와서 바꿔달라고 하나.
모우극은 불만스러웠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충분히 자둬라.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하기주가 말을 마치고 자기 잠자리로 갔다.
모우극이 하기주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다고 누가 겁을 먹을 줄 아나? 원래 천무행 나갈 때 잔뜩 겁을 준다더라.”
그러더니 무한을 흘겨보았다.
“못 맡겠다고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삼재검수 주제에 부조장이 말이 되나?”
백상인이 끼어들었다.
“조장이 이미 결정한 거야. 지금 이 순간부터 무한이 우리 부조장이야. 우극이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은 하극상이라고.”
“흥!”
모우극이 콧방귀를 끼고는 가버렸다.
백상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말했다.
“부조장이 이해해라.”
“뭘?”
“우극이는 집안에서 바라는 바가 크거든. 우극이뿐만 아니지. 남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게 천무관 애들이야.”
백상인이 소소를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소소도 이해할 걸?”
“지가 못난 거지.”
강소소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백상인이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한배를 탔잖아. 부조장이 서로 어울리도록 잘 이끌어줘.”
“너는 압박감 같은 거 없어?”
백상인도 장로가의 아들이다.
“나는 형제가 많아. 아홉이나 되는 집 막내거든. 집에서 별 기대 하지 않지.”
“막내라 더 예뻐하는 거 아냐?”
“형제가 아홉이면 그럴 겨를도 없어.”
백상인이 피식, 웃으며 말하고는 일어났다.
“나도 가서 자야겠다.”
뒷모습이 왠지 허전해 보였다.
‘쟤도 사연이 있나보군.’
아침부터 밤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모두가 경공의 대가가 되었을 무렵, 황량한 고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드디어 감숙이다.”
백상인이 감회에 젖어 한마디 했다.
하기주가 마을로 가더니 마장을 찾아갔다.
“변복을 하고 말을 구해야겠다. 돈들 가지고 있지?”
“천무행 노자를 받지 않았습니까?”
모우극이 하기주를 쳐다보았다.
돈 떼먹었냐는 눈빛이다.
“말값은 거기에 포함되어 않아. 싫으면 계속 경공을 펼칠까?”
드넓게 펼쳐진 황량한 고원을 보고 모두 고개를 저었다.
마장에서 각자 돈을 내어 자기 말을 샀다.
하기주는 마장을 나와 옷가게를 찾았다.
“옷도 갈아입는다. 당분간 천하방 소속이라는 걸 숨겨라.”
“왜 그래야 하는 건데요?”
모우극이 토를 달았다. 천하방 무복을 입고 당당히 질주하고 싶었던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러는 게 좋을 거다.”
“……?”
“천하방에게 쫓기는 흉악범이 여기 변방에 다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네놈이 천하방 소속이라는 걸 알면 당장 보복하려 들걸?”
“…….”
모우극은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말을 타고 가면서부터는 풍경을 볼 여유가 생겼다.
황량한 고원과 메마른 산들이 이룬 풍경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끝도 없이 이어지니 나중에는 심드렁해진다.
하기주는 이번에도 십여 장 거리 앞을 달렸다.
“이번 임무에 대해서 좀 아는 거 있어?”
백상인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강소소에게 물었다.
보름 동안 함께 야영지를 만들고 음식을 나눠 먹은 덕분에 조원들은 제법 가까워졌다.
강소소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모우극이 끼어들었다.
“감숙에 천하방 지부가 있지. 아마도 마천과 대치하는 상황을 둘러보고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걸 거야.”
“단지 그 이유로 이렇게 멀리까지 천무행을 나왔다고? 다른 임무가 있겠지.”
백상인이 말했다.
“너는 뭐 들은 거 없냐? 부조장이니 귀띔이라도 해줬을 것 아냐.”
모우극이 물었다.
무한은 고개를 저었다.
다만 이번 천무행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이제까지 천무행은 각 조별로 임무가 달랐는데 이번에는 모두 감숙으로 향했다.
‘적어도 이 많은 인원이 함께 해야 할 임무가 있다는 거지.’
천무행 인원의 무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천무관 문하생이 스물여덟 명.
거기에 인솔하는 조장이 일곱에다 수석교두가 행수를 맡았다.
행수 우문조는 천하방 백대고수에 속하고, 교두들도 초일류와 절정을 오가는 고수들이다.
천무관 문하생들의 실력도 가볍게 볼 게 아니다.
경험은 부족할지 몰라도 천하방 고위층 자제로 가전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당장 강호에 나와도 행세할 수 있는 실력들이다.
‘상당한 무력이 필요한 일. 그러나 무력대가 나설 수 없는 일. 그게 뭘까?’
머리를 굴려봤지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난주.
감숙의 한복판에 있는 도시다.
무한 일행은 밤이 이슥하여 성문 밖 객잔에 들었다. 천하방을 나온 뒤 처음으로 든 객잔이다.
하기주는 방을 셋 빌렸다.
자신이 하나, 강소소가 하나, 그리고 나머지 방 하나를 남자들 셋에게 배정하고는 말했다.
“푹 쉬어라. 내일 바로 감숙지부로 간다.”
감숙지부는 난주에서 다시 하루는 달려야 한다.
모우극이 말했다.
“서둘러 왔으니 며칠 머무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조는 반도 못 왔을 건데요.”
모두 하기주를 봤다.
낯선 고장에 왔으니 둘러보고 싶은 건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임무 중이다.”
하기주는 한마디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난주에서 며칠 머무를 줄 알았던 모우극이 불만을 터뜨렸다.
“뭐야? 난주 구경할 시간도 없는 거야?”
“일단 쉬자. 강행군하느라 많이 지쳤잖아.”
백상인이 말했다.
“조장이 좀 괴팍하긴 하지만,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왜 이래야 하냐고? 천무행이 뭐야? 강호 경험 쌓는 거잖아? 근데 달리기만 하다니.”
모우극이 투덜거렸다.
“넌 왜 매사에 불만이니?”
듣다 못해 강소소가 쏘아붙였다.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게 지겹지도 않니?”
갑작스런 강소소의 힐난에 모우극이 당황했다.
“뭐, 뭐라고…….”
“한심해. 정말 어리기라도 하면 봐줄 마음이라도 생기지.”
강소소가 쏘아붙이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모우극이 백상인을 보았다.
“쟤 왜 저러는 건데? 내가 뭘 어쨌다고?”
“잘 생각해봐라.”
백상인도 한마디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왜 나만 따돌리는 거야?”
무한도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돌아보니 모우극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울상을 짓는 것 같았다. 따돌림 당한다고 울려고 하다니.
‘여린 놈이었네.’
다음 날.
“점심 먹고 출발한다.”
하기주는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장이 조원을 내팽개치고…….”
모우극이 불평을 하다 말았다. 어제 강소소에게 핀잔을 받은 게 생각난 모양이다.
백상인이 말했다.
“부조장,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난주 구경하는 거 어때?”
“좋지.”
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모우극이 맞장구쳤다.
백상인이 강소소에게도 물었다.
“소소는?”
“가자.”
강소소도 흔쾌히 동의하자 무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주 도심은 복잡했다.
사람들부터 달랐다. 머리카락이 금색인 사람도 있었고, 이상한 복장으로 얼굴까지 가린 사람들도 있었다.
모우극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감숙지부가 여기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직도 더 가야 한다니.”
오랜만에 도시로 들어오니 살 것 같은 표정이다.
일행은 번화가로 들어섰다.
길 양편으로 주루와 객잔,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저긴 왠지 중원의 주루 같은 느낌인데? 저기 가서 점심 먹을까?”
모우극이 길 끝에 있는 주루를 가리키자 백상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건 주루가 아니고 기루잖아. 홍등이 걸려 있잖아.”
월야루.
그윽한 이름부터가 기루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저질!”
강소소가 경멸을 담은 시선으로 모우극을 노려보았다.
“아냐, 난 정말 주루인 줄 알았다고. 내가 천박한 기녀 따위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야!”
모우극의 목소리가 컸기에 지나던 이들이 돌아봤다.
“저기 반점이 있다. 저기 가서 점심이나 먹자.”
백상인이 월야루 앞에 있는 객잔을 가리켰다.
일행이 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모우극이 앞에서 오던 아이와 부딪혔다.
열서너 살은 되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부딪히자마자 나뒹굴었다.
“어구구.”
“뭐야? 얘 왜 이래?”
모우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백상인이 나서서 아이를 일으켰다.
아이는 백상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려다 비틀, 하더니 한손으로 모우극의 앞섶을 잡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
무한은 아이의 손이 옆에 있는 모우극의 품속을 들어갔다 나오는 걸 봤다.
제법 손이 빨랐으나 무공을 익힌 모우극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자식이?”
모우극이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뭐야? 이거 놔!”
아이가 잡힌 손목을 뿌리치려 하자 모우극이 팔에 힘을 주었다.
“관아로 가자. 너 같은 놈은 혼나봐야 돼.”
“그러지 마. 아직 애잖아.”
백상인이 만류했다.
‘이상한데?’
무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의 옷차림이 부랑아 같지 않았다.
꽤 값나가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전낭을 훔치지 않았다면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무공을 익힌 듯 손이 빨랐다. 다만 천무관 상방인 모우극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거 놔! 안 놔주면 죽을 줄 알아?”
“이놈이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모우극이 팔을 흔들자 아이가 고통스러워했다.
무한이 모우극의 팔을 잡았다.
“놔 줘. 전낭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됐잖아.”
모우극이 팔을 비틀어 무한의 손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꿈쩍도 앉았다.
모우극이 놀라고 당황해서 입을 딱, 벌렸다.
“어? 어어…….”
“파리 들어간다. 입 닫아.”
무한이 아이의 손을 빼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짓 마라.”
아이가 무한의 손을 탁, 쳤다.
“내가 애야? 왜 남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데?”
그러더니 달려가버렸다.
모우극이 투덜거렸다.
“저런 놈은 혼내야하는데.”
“가서 점심이나 먹자.”
일행은 월야루 맞은편 반점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지만 다행히 일층에 자리가 있었다.
잠시 후 나온 음식은 향신료 냄새가 강했다.
“서역 사람이 많아서 향신료를 듬뿍 쓰나봐.”
그동안 건량으로 세 끼를 때우다 시피한 일행이다. 낯선 음식이지만 맛있게 먹었다.
모우극이 먹다 말고 바깥을 쳐다봤다.
“저 녀석 뭐야? 왜 또 오는 건데?”
무한이 보니 소매치기를 했던 아이가 어떤 중년사내와 같이 반점으로 들어왔다.
“저놈들이에요.”
아이가 무한 일행을 가리켰다.
중년사내는 무척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전신에 감도는 기운이 매서웠다.
‘고수다.’
무한 일행은 경각심을 세우고 중년 사내를 지켜봤다.
중년사내가 다가와서 말했다.
“누가 강하보 소주를 욕보였느냐?”
“뭐라는 거야?”
모우극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누가 누구를 욕보였다는 거야?”
모우극만이 아니라 무한 등도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중년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네놈들이 감히 강하보 소주를 도둑놈 취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