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해가 기울어 갈 무렵.
“크어억!”
기어이 모우극이 게거품을 품고 엎어졌다.
“우극아!”
백상인이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헉헉거리는 모우극의 얼굴은 허옇게 질린 채였다.
백상인도 숨이 찬지 가슴이 쉼 없이 오르내렸다.
‘무리했지. 하루 온종일 달렸으니까.’
요산자에게 단련된 무한에게는 별 게 아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우극이 큰대자로 뻗었다.
“커흑! 나는 도저히 더 못 가! 이건 미친 짓이야. 누가 하루 종일 경공을 펼치냐고!”
모우극이 입가에 맺힌 허연 거품을 닦지도 않고 소리쳤다.
그때, 앞서 가던 하기주가 돌아왔다.
“뭐하는 거냐?
“헉! 헉! 교두! 이건 아니잖습니까? 하루 종일 달리기만 하다니.”
“교두라니? 여기 교두가 어디 있다는 거냐? 여기가 천무관인 줄 알아?”
하기주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천하방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임무를 띠고 강호행을 하는 천하방 무인이다. 조장의 명을 따르지 못하는 조원은 필요 없다. 돌아가라.”
모우극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무한과 강소소의 낙오를 걱정하더니 제가 가장 먼저 탈락하게 생겼다.
백상인이 나서서 대신 변명했다.
“우극이가 얼마 전 비무하다가 내상을 입어서 그렇습니다. 조장께서 양해를 좀 해주시면…….”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다 듣는군. 네놈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열어보고 싶구나.”
하기주가 백상인을 노려보더니 말했다.
“네가 부상당했으니 적에게 좀 쉬었다 쫓으라고 말할 것이냐? 그럼 적이 얼씨구나 좋다 하고 멈춰줄 것 같으냐?”
백상인은 괜히 나섰다 본전도 못 건지자 얼굴을 붉히고 물러섰다.
하기주가 모우극을 신랄하게 몰아쳤다.
“적과 싸우다보면 하루가 아니라 삼주야 내내 달려야 할 때도 있다. 고작 하루도 못 채우고 거꾸러지다니. 차라리 적에게 목을 내줘라. 그러면 아주 편히 쉴 수 있겠지.”
하기주는 온갖 험한 소리를 다 퍼부었다.
‘으음. 하 사숙이 원래 저렇게 까칠했구나.’
천무관 하방 시절 자신에게 냉랭하게 대하긴 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귀여워 한 걸 알고 있다.
“으으…….”
모우극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장로 모공연의 늦둥이로 태어나 귀염을 받고 자랐기에 이렇게 대놓고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다.
“일 각! 일 각을 주겠다. 그리고 바로 다시 떠날 것이다!”
모우극과 백상인이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일단 운기조식부터 해라.”
백상인이 모우극의 어깨를 토닥이며 자신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소소도 나무 아래 앉아서 운기조식을 했다.
무한은 굳이 운기조식을 할 필요가 없어 한쪽에 서서 근육을 풀었다.
운기조식보다 연근으로 단련된 근육을 풀어서 기운을 끌어내는 게 더 효과가 있었다.
“너는 왜 운기조식을 않는 거냐?”
하기주가 물었다.
“휴식을 취할 때는 충분히 내력을 보충해야 한다.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 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저야 내공이 쥐꼬리 만큼밖에 없는데 운기조식 하고 말 게 없죠. 그냥 근육을 푸는 게 낫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잘도 따라오더구나.”
하기주가 내숭 떨지 말라는 듯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으나 더는 따지지 않았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오조의 질주가 멈췄다.
하기주는 관도를 벗어나 야트막한 야산 기슭으로 올라갔다.
“각자 야영을 할 만한 곳을 찾아봐라. 이것도 실전의 일환이다. 쫓는 적이 있다고 가정하고 야영지를 골라야 한다.”
무한 등은 흩어졌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하기주가 백상인을 지목했다.
“네가 고른 곳부터 가보자.”
백상인이 고른 곳은 작고 아늑한 골짜기였다. 물을 구하기 쉽고 바람을 피하기 좋았다.
“여기는 습하다. 게다가 적이 입구를 막으면 넌 어디로 피할 생각이냐?”
백상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우극이 고른 곳은 사방이 훤히 보이는 언덕이었다.
“이 자리에 서면 적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죠.”
모우극이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최고점은 자기 몫이라는 얼굴이었다.
하기주가 코웃음을 쳤다.
“여기서 불을 피울 셈이냐? 십 리 밖의 적도 찾아올 만한 곳이군.”
하기주는 언덕 끝까지 올라가지도 않고 돌아섰다.
강소소가 자신이 선택한 곳을 보여주었다.
제법 너른 골짜기에 후미진 곳이었다. 뒤편 언덕에 오르면 다가오는 적을 감시할 수 있고, 조금만 내려가면 물을 구할 수 있었다.
다수의 적에게 몰리면 계곡 위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도주로도 있었다.
“제법 괜찮군.”
하기주가 끄덕이고는 무한에게 물었다.
“너는?”
무한은 강소소가 찾은 자리 건너편 작은 등성이로 올라갔다.
“여깁니다.”
웅덩이처럼 패여 있어 바람을 피하기는 좋았는데, 물을 구하려면 강소소가 있는 자리까지 내려와야 했다.
“왜 여기를 선택한 거냐?”
하기주가 물었다.
이유를 물으니 할 말이 없다.
요산자와 다니며 노숙만 하다 보니 이런 곳이 좋더라고 말할 수도 없고.
“바람을 피할 만한 곳을 찾다보니 여기가 적당한 것 같았습니다.”
대충 둘러대자 하기주가 나머지 조원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야영한다.”
조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을 구하려면 등성이 아래까지 내려갔다 와야 했기에 불편했다.
“네가 여기로 정했으니 물은 네가 떠와.”
모우극이 말했다.
“그러지 뭐.”
무한이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들고 내려갔다.
야영지 옆이 숲이라 나뭇가지를 구하기 쉬웠다.
조원들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서 각자 가지고 온 떡과 육포를 불에 구워 먹었다.
하기주가 육포를 씹으며 말했다.
“삼 일 후 너희들 가운데 한 명을 부조장으로 삼을 것이다. 같은 문하생이라도 부조장의 말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죠. 부조장이면 가산점이 있겠죠?”
모우극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당연히 제가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불침번은 모우극, 백상인, 강소소, 심무한 순이다.”
하기주는 불침번을 정해주고 약간 떨어진 바위 아래로 가더니 좌정했다.
“쳇, 피곤한데 불침번도 제일 먼저라니…….”
모우극이 구시렁거렸다.
‘저 녀석은 세상 모든 게 불만이군.’
불침번은 제일 먼저 서는 게 좋다.
강소소는 물끄러미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안 자?”
“연기가 위로 퍼지지 않고 아래로 흐르네?”
강소소가 중얼거리며 등성이 위를 바라봤다.
등성이 너머에서 바람이 내려오니 당연히 연기가 아래로 깔린다.
움푹 들어간 지형이라 잠잘 곳은 바람이 위로 지난다. 옆에 있는 숲도 바람을 막아주니 오히려 포근한 감마저 들었다.
강소소가 경사면 위쪽으로 갔다.
“여기서 물을 구하는 적을 감시할 수 있고.”
이제 보니 야영 자리를 분석하는 모양이다.
‘깊이 생각하고 이 자리를 선택한 게 아닌데. 머리가 너무 좋아도 문제구나.’
무한은 이내 모닥불 가에 담요를 깔고 누웠다.
누운 채로 경천승운공을 운기했다. 풍운조화공과 산수진결, 조화지도를 익힌 뒤로 굳이 정좌를 하지 않아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었다.
정좌를 하면 더 좋겠지만 수련하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내관반청의 호흡을 하며 기운을 퍼뜨리자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귀영이다.
무흔은 여전히 기운을 감지하기 어렵다. 임독맥이 타통하고, 천목투심술이 칠성에 달했는데도 은신을 알아내지 못하다니.
‘생각 이상의 고수. 진짜 정체가 뭘까?’
며칠 후.
잠들기 전에 하기주가 모두 모이라고 했다.
“부조장은 심무한이다.”
“뭐라고요? 삼재검수가 부조장이라니 말이 돼요?”
모우극이 대뜸 반발했다.
역시 재수 없는 놈이다. 사람이 앞에 있는데 대놓고 비하하는 별칭을 말하다니.
“부조장은 무공이 우선이어야죠. 경공 실력도 가장 처지는데 부조장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하기주가 인상을 썼다.
“그 삼재검을 내가 가르쳤거든? 너도 가르쳐주랴?”
여전히 수긍 못 한 표정인 모우극을 뒤로하고 백상인은 피식 웃으며 무한의 어깨를 툭, 쳤다.
“부조장, 잘 좀 봐줘.”
역시 무던한 놈이다.
‘욕심이 없는 놈이 제일 무섭다던데.’
강소소는 뒤로 돌아서더니 발 앞에 구르는 돌을 걷어찼다.
‘성깔도 참.’
강소소가 은근히 호승심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보란 듯이 돌까지 차다니.
모우극은 수긍하지 못하고 항의했다.
“아무리 직접 지도했다고 해도 그렇잖아요. 이건 승복할 수 없다고요. 편파적이라고요.”
하기주가 무한을 우대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최소한 비무라도 해야죠.”
무한은 부조장 같은 건 관심 없었다. 그런데 모우극이 하는 꼴을 보니 은근 부아가 났다.
“부조장은 뭘 하는 겁니까?”
“하는 일 없다. 내가 시키는 걸 조원에게 전달하면 돼. 내가 없을 경우 대신 인솔하고.”
“알겠습니다.”
무한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모우극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야, 네가 맡을 일이 아니라고! 부조장이 되려면 무공이 받쳐줘야 하는 거라니까?”
무한이 피식, 웃었다.
“무공? 삼재검을 나만큼 할 수 있는 사람 또 있나?”
“허…….”
모우극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하기주가 말했다.
“부조장은 조장이 뽑는 거다. 너 같으면 무공 순으로 하겠냐?”
“그럼 뭘 보고 뽑은 건데요?”
“쟤 머리 좋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문향전 상방이잖아. 너는 중방도 나이 차서 겨우 올라간 걸로 아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모우극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고작이라니? 문향전 상방이 고작이냐?”
아니다. 과시를 봐도 되는 실력이라고 했다.
강소소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도 문향전 상방인데요?”
“그래? 그럼 소소, 네가 해볼래?”
하기주의 말에 모우극이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죠.”
강소소가 모우극을 노려보았다.
“왜 나는 안 되는데? 내가 여자라서?”
“당연하지. 차라리 삼재검수가 낫지. 여자가 상관인 건 말이 안 되지.”
모우극의 말에 강소소가 휙,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조법.
‘귀영조?’
모우극이 고개를 젖혀 피했다.
“헉! 너, 지금 뭐한 거야?”
모우극이 벌떡 일어나며 강소소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파리 잡았거든? 웬 파리가 벌써부터 극성이지?”
강소소가 허공에서 뭔가를 잡는 시늉을 했다.
기습을 피한 걸 보니 모우극도 아주 맹탕은 아닌 모양이다.
강소소가 하기주에게 물었다.
“정말 제가 여자라서 그런 건가요?”
“너는 수긍할 줄 알았는데? 야영지 고를 때 이미 판가름 나지 않았나?”
“그건…….”
강소소가 항의하려다 입을 닫았다.
하기주가 말했다.
“이번 천무행은 만만치 않다. 무공만 믿고 까불다간 큰 코 다친다.”
모우극이 삐딱하게 받았다.
“에이. 또 겁주시네. 천무행을 나가면 으레 그렇게 겁준다는 걸 모를까봐요?”
“이 자식이, 며칠 같이 다녔다고 기어오르는 거냐?”
하기주의 목소리가 싸늘해지자 모우극이 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지금 서로를 한번 봐라.”
일행이 서로를 쳐다봤다.
“네 앞에 있는 동료 중 누군가는 이번 천무행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다 죽을 수도 있다.”
하기주의 말은 더없이 차가웠다.
반드시 그럴 것이라 여기는 듯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