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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6화 (26/250)

26화

천무관 대연무장.

천무행을 떠나는 문하생들이 모두 모였다. 오늘은 천무행 조를 편성하는 날이다.

지난 이 년 간 휴관을 했기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새로웠다.

무한은 천무관을 다닐 때 문향전 상방과 무화전 하방을 다녔다. 그랬기에 문과 무를 함께 배운 사람은 형소가 유일했다.

“이제 와?”

형소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

형소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않았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나보다. 형소가 이럴 때는 말 없이 같이 있어 줘야 한다.

잠시 후 형소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가지 말래.”

“왜?”

“내가 무공을 익혀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시거든.”

고개를 숙인 형소가 발로 땅바닥을 툭툭 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아버지는 천하방 고수인데 왜 무공을 익히지 말라는 거지?”

“나, 나는…….”

형소의 눈이 우울하게 처졌다.

“무공 체질이 아니거든.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어. 아버지가 가르치는데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어. 어느 순간 아버지가 포기하더라고.”

“…….”

“오기가 생겨서 천무관에 입관했지. 근데 아버지는 그것도 못마땅해 하거든.”

“무공을 익히는 게 어때서?”

“우리가 배운 게 뭐야.”

“심의삼재검.”

“우리를 삼재검수라고 부르잖아. 그게 아버지 귀에 들어갔나봐. 집안 망신시킨다며, 그만두라고 난리 치셨어. 정식 출관할 필요도 없대.”

“…….”

천무행을 하지 않으면 출관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냥 수료생이 될 뿐이다. 출관과 수료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형소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나는 갈 거야. 가서 보란 듯이 천무관을 출관할 거야.”

그때, 교두들이 나왔다.

“모두 모여라.”

수석교두 우문조가 모두를 불렀다.

“이번 천무행은 네 사람씩 모두 열 개 조로 편성한다. 호명되는 사람은 조별로 배정된 방으로 가라. 인솔 교두가 임무를 설명해 줄 것이다.”

차례로 조 배정이 되었다.

형소는 일조에 편성됐다.

“심무한! 오조!”

무한이 오조가 모이는 방으로 갔다.

“너, 오조냐?”

방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문하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마가 넓고 하관이 좁아 옹색하게 생겼는데, 입고 있는 옷차림은 값비싸 보였다.

“쳇! 하필이면 삼재검수야.”

그러자 옆에 있던 문하생이 말했다.

“어차피 중방의 실력은 거기서 거기잖아. 우리 둘이 잘 하면 돼.”

두 사람은 무화전 상방이었다.

나중에 말한 문하생이 먼저 알은체했다.

“나는 백상인이라고 한다.”

“심무한이야.”

“네가 심무한이라는 건 알아. 검천부의 주인을 모를 수 없잖아? 잘해 보자.”

백상인이 불만을 터뜨린 문하생을 가리켰다.

“이 친구는 모우극이야.”

모우극이 삐딱한 시선으로 무한을 보며 말했다.

“네가 삼재검수에 어울리지 않게 신분이 대단한 건 알지.”

무한이 모우극을 봤다.

좋은 집안에서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 속에서 자란 기색이 역력하다.

“나나 상인이는 장로가 출신이야. 그러니까 검천부를 내세워 거들먹거릴 생각은 마라. 실력도 없는 놈들이 그러는 건 딱 질색이니까.”

무한은 대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무시하고 자리에 앉는데 갈의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강소소, 너도 오조냐? 우리 조는 정말 화려하군. 천하사패가 둘이나 오다니.”

백상인이 반가워하였다.

‘소소?’

강소소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어서 말 붙이기가 쉽지 않은데 백상인은 넉살이 좋았다.

“잘해보자.”

강소소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모우극은 강소소도 탐탁지 않은 듯 퉁명스레 말했다.

“천무행 결과가 출관 성적에 반영되는 건 알지? 개인 평가도 하지만 조별로도 평가가 이뤄져. 만일 우리 조가 상위에 오르지 못하면 가만 안 둘 거야.”

강소소가 모우극을 봤다.

“뭘 그렇게 봐. 내가 틀린 말 했어?”

“너나 잘해.”

“뭐?”

무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잘했어. 소소.’

그때, 방문이 다시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하기주였다.

“……?”

그가 조원들을 훑어보고 말했다.

“내가 너희를 인솔할 조장이다. 모두 자리에 앉아.”

모우극은 정말 낯빛이 좋지 않았다.

‘아하, 인솔교두마저 중방 교두라서 불만이라는 거냐?’

모우극은 정말 천무관 출관 성적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조원이나 인솔교두가 시원찮다고 생각하곤 성질내는 것이다.

하기주는 그런 무한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천무행 목적지는 감숙이다.”

“감숙이요?”

모우극이 불만스런 어조로 되물었다.

하기주가 모우극을 쏘아봤다.

“이제부터 내가 말할 때 끊지 마라. 두 번 설명하지 않는다.”

싸늘한 어조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모두 입을 꾹 닫았다.

“천무행치고는 거리가 먼 셈이다. 그런 만큼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하기주가 경고했다.

“감숙은 변방이라 마적떼와 범죄자가 들끓는 곳이다. 무엇보다 마천과 접경을 이룬 지역이지.”

“……!”

“왜? 겁나나? 겁나면 빠져도 된다. 천무관을 수료만 해도 네놈들은 요직을 맡을 수 있는 배경이 있지 않나?”

“…….”

“…….”

“…….”

“질문 있나?”

“다른 조는 어디로 갑니까?”

모우극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묻자 하기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불만 가질 것 없다. 이번 천무행은 모든 조가 감숙으로 간다.”

“예?”

백상인은 의외라는 듯 되물었으나 모우극은 어깨를 으쓱, 하곤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다행이죠. 근데 조에서 낙오자가 생기면 어찌 되는 겁니까?”

모우극이 무한과 강소소를 슬쩍 보았다.

“조별 평가에서 최하점을 받겠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심드렁한 눈빛으로 하기주가 말하자 모우극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이다. 각자 짐 잘 챙기도록.”

하기주가 나가자 모우극이 뭐라뭐라 떠들었고, 백상인이 대꾸하였다.

무한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딴 생각 중이었다.

‘감숙! 아버지가 실종된 곳!’

팔 년여 전.

아버지 심군하는 감숙에서 실종됐고, 그의 부러진 검만 돌아왔다.

‘불망객이라고 했지.’

나중에 불망객이 아버지를 찾아간 것만 확인됐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싸웠던 흔적도 발견됐다.

현장을 조사한 고수는 두 사람이 동귀어진 한 것으로 추정했다.

언젠가 가야 할 곳인데 이렇게 바로 가게 될 줄이야.

‘아버지의 자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무한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하기주가 무한을 따로 불렀다.

잔뜩 표정이 굳었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번 천무행은 군사부 작전의 일환이다.”

“군사부 작전이라면…….”

이제까지 천무행은 천무관에서 주관했는데 이번에는 군사부가 지휘한다는 뜻이다.

“마천과 접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천무행과는 확연히 다르지.”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까?”

하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예가 없었다. 그런데 군사부 총군사 손우자는 도천부 고강후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 그렇다면 도천부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닐까?”

하기주가 뭘 염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조심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기주도 도천부를 증오하고 있었다.

하가보 일가가 몰살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던 당시 작전을 주관한 것이 도천부 고강후였기 때문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새벽에 모인 인원은 어제보다 몇 사람 줄었다.

형소가 다가와 속삭였다.

“그거 알아? 몇 명이 핑계를 대고 빠졌어.”

그러고 보니 대파나 세가에서 온 문하생들은 모두 빠졌다.

“그게 왜?”

“이번 천무행은 단순한 강호행이 아니래. 무척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분위기가 좋지 않아.”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부분 문하생들은 강호행을 앞두고 설레는지 동료들과 희희낙락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니 저러는 거지.”

“그런데 천무행을 빠져도 되나?”

“집안 배경 믿고 그러는 거지. 사실, 너도 굳이 천무관을 정식 출관할 필요 없잖아. 게다가 무관 중방이니 좋은 성적도 아니고.”

하긴 그렇다.

검천부주가 천무관 출관증을 빌미로 천하방에서 직책을 얻을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번 천무행은 아버지가 실종된 감숙으로 간다.

반드시 가야 한다.

잠시 뒤, 천무행을 이끌 무화전 수석교두 우문조가 단상에 올랐다.

“이제부터 나를 행수라 불러라. 인솔교두는 조장이라 부른다. 빠진 인원이 있어서 조 편성을 다시 한다.”

열 개 조가 일곱 조로 줄어들었다. 열두 명이나 빠진 것이다.

떠나기에 앞서 우문조가 한 마디 덧붙였다.

“강호는 천무관이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챙겨야 한다.”

***

“따라와라.”

하기주는 성 밖 마을을 벗어나자 곧바로 경공을 펼쳤다. 그는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거리를 벌렸다.

“뭐야? 왜 달리는 건데?”

모우극이 투덜거리자 백상인이 말했다.

“경공을 시험하는 거겠지.”

모두 하기주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무한은 솔직히 놀랐다.

심의삼재검만 가르치기에 자기도 모르게 하기주의 무공 또한 그저 그럴 것이라 착각했나 보다.

‘내가 사숙을 잘 모르고 있었네.’

하기주는 집안의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수련을 하는 자다.

원래 지닌 무공이 뛰어난 편이었기에 천무관 교관이 될 수 있었다.

거기에 경천심결과 경천십이식까지 받았다.

무한이 검천부에서 수련한 지난 이 년 사이 하기주도 적잖은 성취를 거뒀다.

강소소는 말없이 하기주를 뒤따라 몸을 날렸다.

“뭐해, 어서 가지 않고.”

백상인이 소리치곤 뒤를 잇자 삐죽거리던 모우극도 마지못해 움직였다.

이어 무한도 신법을 펼쳤다.

하기주는 늘 십 장 앞으로 달렸다.

무한은 요산자의 신법을 펼치며 어렵지 않게 뒤를 따랐다. 요산자의 신법은 내공을 크게 소모하지 않으면서도 무척이나 빨랐다.

요산자를 따라 몇 달이나 산과 강을 따라 달렸다. 이 정도는 그냥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행을 따라잡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다 떨치고 홀로 앞서 갈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삼재검수잖아? 삼재검수답게 뛰어주지.’

무한은 가장 뒤에 처져서 달렸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 모우극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저 녀석, 오래 버티지 못하겠네.’

강소소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는데도 무척이나 빨랐다.

‘천기자 할아버지의 신법이 귀영천리라고 했지? 역시 뛰어나구나.’

기천부의 귀영대는 뛰어난 신법 덕분에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나 있다.

백상인은 의외로 숨소리가 고르고 속도도 일정했다. 신법이 대단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내공이 제법 깊은 듯했다.

‘천무관 무화전 상방이면 강호에 나가 고수 소리를 듣는다더니.’

무한이 뒤에서 조원들을 살피는데 마침 뒤를 돌아보던 백상인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나?’

백상인이 눈짓으로 묻는 듯하자 무한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동료를 챙기는 마음도 있고…… 괜찮은 친구네.’

모우극을 빼면 마음에 드는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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