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무한은 그동안 꾸몄던 정원으로 갔다.
꽁꽁 얼어붙은 정원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목령산인이 조성한 후원과 달리 눈앞의 정원은 냉기만 흐른다.
무한은 정자에 앉아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망아지경에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정경은 겨울이지만 머릿속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가 흘러갔다.
‘봄날의 정원.’
겨울 정원에서 봄날의 모습이 보였다.
훈풍에 호응하여 새싹이 돋고 자라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왔다.
이어서 천지에 화기가 가득한 여름, 무성한 초목이 뿜어내는 왕성한 생명의 힘이 느껴졌다.
이윽고 열매가 성숙함과 동시에 다음을 위한 가을의 시간이 흐르고.
눈앞의 겨울 정원이 되었다.
‘봄바람이 불면 이 정원에 다시 꽃이 피고 나무가 새잎을 내겠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을 본체라 할 수 있을까?’
‘이대로가 온전한 거야.’
‘온전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수없는 물음이 머릿속에 올라왔다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한은 불현듯 정자에서 일어나 삽을 들고 언 땅을 팠다.
한겨울이라 나무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파서 옮겼는지 어떤 꽃이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훤했다.
꽃들이 있던 자리를 옮기고 나무를 옮겼다.
마지막으로 목령산인이 어루만지던 배롱나무를 옮겨 심자 목령산인이 나타났다.
목령산인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무한에게 물었다.
“이게 너의 정원이냐?”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겨울 정원이었건만 따듯한 온기가 흘렀다.
강건한 골기가 흐르는 목령산인의 후원과는 차이가 있었다.
목령산인이 정원을 거닐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쓸 만해. 제법이야. 조화의 도를 몇 달 만에 깨치다니.”
목령산인이 무한을 보았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인다.
“너, 내 제자 하지 않을래?”
“예? 지금도 사부라고 부르는데요?”
“그게 아니고. 나의 도를 전수받으란 말이다.”
“도를 전수받으라고요?”
“버러지들이 꿈틀거리는 인간세를 벗어나 신선에 드는 길이지.”
문득 요산자가 자신더러 도기(道器)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 무인이 될 건데요?”
“악귀의 길을 걷겠다는 말이냐?”
목령산인이 인상을 썼다.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도를 닦자꾸나. 내가 보기에 너는 틀림없이 선경에 들 것이다.”
“전 인간세상에서 할 일이 있어서요.”
목령산인이 버럭, 화를 냈다.
“안 돼! 너는 이미 내 제자다.”
이런 억지를.
“네놈 일 마칠 때까지 내가 기다리마.”
“예?”
“내가 머무는 전각이 풍운벽력수보다 못하다. 잠시라면 몰라도 오래 머물러야 한다면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좋은 곳으로 바꿔라.”
그렇게 목령산인도 검천부 후원에 눌러 붙었다.
***
검천전 지하 연공실.
무한은 경천십이식 도해 앞에 서서 진검을 들었다.
정원 가꾸기에 매달리느라 검식 수련은 오랜만이다.
쉬쉬식!
검식을 펼치자 단전이 반응하며 내기가 경맥을 타고 흘렀다.
경맥에서 기운이 발휘되며 검세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
그동안 이어지지 않던 초식이 불완전하게나마 연결되었다.
‘내공이 관건이었어.’
단전이 형성되고 환골탈태를 한 이후 경천승운공을 통해 운기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단전과 경맥을 의식하자 곧바로 단전에서 뻗은 내기가 경맥에 꽉 찬다.
비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평가해주는 사람도 없으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남들보다 빠르다는 건 알고 있다.
검세를 취하자 내기가 받쳐주고, 내기를 바탕으로 검세가 이어진다.
내기와 검식이 서로를 이끌어지고 지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검세가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은 내공이 모자라는구나.’
경천십이식은 이름 그대로 모두 열두 식이다.
전반사식은 그런대로 펼칠 수 있었는데, 중반사식으로 넘어가면서 내기가 딸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부드럽지만 강력한 검이었다.
‘경천십이식을 펼칠 수 있다!’
경천십이식은 심의삼재검과 달리 실전검법이다.
진정한 검의 길로 들어선 셈이었다.
심의삼재검으로 쌓은 기초 동작을 바탕으로 경천십이식의 검세를 이어가니 지하 연공실 가득 검광이 번뜩였다.
환골탈태 후 얻은 또 하나의 성과는 천목혈이 열려 천목투심술이 칠성으로 올라간 것이다.
천목투심술은 눈빛과 표정의 변화,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기공이다.
기본적으로 관찰을 중요시하는데, 천목혈이 열리면 관찰로 얻은 정보가 영감으로 화한다.
눈앞의 상대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조변석개하는 것이라 읽어낸다 해도 돌연 변심할 수 있으니 천목투심술이 꼭 들어맞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게는 정말 필요한 술수야.’
지난 팔 년 간 검천부와 천무관 몇몇 외에는 거의 고립된 채 살아온 무한이다.
사람과 부대낀 경험이 적은 만큼, 천목투심술의 성취가 높아지면 사람을 응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천목투심공이라 할 만함에도 술(術)이라 붙인 건, 뚜렷한 수련법이 있는 게 아니라 경험을 통해 쌓아가는 술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반복적으로 꾸준히 수련을 하여 정확도를 높이는 게 중요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천목투심술로 상대의 생각을 읽어낸 후 본인에게 확인하는 건데, 이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술수를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가끔 유아를 상대로 넌지시 천목투심술을 연습해봤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아는 무한에게 생각나는 대로, 있는 그대로를 다 말하니 천목투심술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도 무한은 운기조식을 할 때면 천목혈을 통해 영감을 확산하는 수련을 잊지 않았다.
***
아침식사를 하는데 천무관에서 사람이 왔다.
“이게 뭡니까?”
서찰의 내용을 읽고 물었다.
“천무행을 모르십니까?”
천무관에서 온 사람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그러고는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천무행(天武行).
천무관 수련생은 열여덟 살이 되면 출관하는데, 출관하기 전 반년 동안 강호행을 하는 걸 말한다.
천무행이 생긴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천무관을 마치면 명실공히 무림인으로 대접을 받는다. 대부분 천하방 고위직 자제들이니 곧바로 일반 무인은 꿈도 못 꾸는 직책을 맡는다.
그런데 임무를 맡아 강호행을 나간 이들이 어이없이 죽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강적을 만나 실력이 부족해서 죽는 건 무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강호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삼류 흑도의 수법에 당해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에 천무행이라는 이름으로 출관 전에 강호행을 다녀오는 과정이 생겼다.
천무행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천무관 교두와 함께 강호를 다니며 경험을 쌓는 것이다.
그냥 강호를 떠도는 게 아니라 자그마한 임무를 하나 맡는다. 그 임무를 처리할 때 기여한 공적을 따져 천무관 출관 때 성적으로 처리한다.
천무관에서 온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열흘 뒤에 출행하니 준비를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무한은 천무행을 준비하라는 서찰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천무행? 세상으로 나간다는 말이지?’
다음 날.
무한은 산도를 찾아갔다.
다음 사부가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누군가 왔는데 자신이 천무행을 떠나 없다면 곤란하지 않겠나.
산도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창밖의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없다.”
누가 또 오느냐고 묻자 산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예?”
“풍운조화공, 산수진결, 조화지도 그리고 지화령석을 통한 환골탈태까지. 과하다고 생각지 않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놀랐다. 네 할아비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저 괴짜들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범인을 벗어나 선도의 길을 걷는 대단한 분들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할아비를 잘 둔 덕분이지.”
산도의 말에 무한은 조금 민망했다.
스스로 이룬 바가 아니었으니까.
“너는 이제 무의 길에 한 발 내디딘 셈이다. 도의 길이나 무의 길이나 홀로 가는 길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턴 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죠.”
무한이 바로 대답하자 산도가 피식, 웃었다.
“그게 그리 쉬운 줄 아느냐?”
“해봐야죠.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무행을 다녀오겠다고 하자 산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한가하게 밖을 돌아다닐 때가 아니다. 경천십이식을 익혀야지.”
“천무관을 정식으로 출관해야 합니다.”
“그까짓 게 뭐라고.”
산도에게는 천무관이 아니라 천하방도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은 천하방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천무행에 불참하여 천무관 정식 출관의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너는 이제야 무공에 입문한 셈이다. 경천십이식이 제아무리 신공이라고 하더라도, 네 경지로는 고수를 만나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왜 여기에 처박혀 있는지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냐?”
역시 그랬구나.
할아버지가 초빙한 사부들은 무한이 홀로 설 때까지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안다면 하루라도 빨리 사람 구실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것도 할아버지와의 약속입니까?”
“잘 아는구나. 그런데 네가 밖으로 나가면 내가 따라가야 하지 않겠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천무관 문하생이면 모두가 하는 일인데요. 교두들이 따라가니 별 위험한 일도 아닙니다.”
“으음. 그렇다면야. 내가 나이가 들어 삭신이 쑤시니 어디 돌아다니기도 힘들구나.”
“편히 쉬고 계시죠.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가만. 기다려봐라.”
산도가 오른손가락으로 역산(易算)을 짚었다.
한참 뭔가를 셈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무한을 쳐다보고 말했다.
“심양조가 저들을 데려온 건 무공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예?”
“죽음을 앞두고 손자가 어떤 인간이 될지 걱정했을 것이다. 네가 겪은 일은 경우에 따라서는 살귀가 된다 해도 무방하지 않느냐?”
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양조는 네가 무인의 길을 가면서 정심(正心)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저들의 도를 전하게 한 것이지.”
순간 무한은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기인들을 통해 경천승운공에 대한 깨달음의 단초와 함께 인성을 잃지 않을 부동심(不動心)을 전한 것이다.
복수에 사로잡혀 정도를 벗어날까 염려한 할아버지의 마음에 울컥했다.
무한이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무한이 꾸벅, 예를 취하고 돌아갔다.
산도가 물끄러미 무한이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뒤에서 침음성이 들렸다.
“으음. 저놈이 세상 욕심에 물들면 곤란한데.”
요산자였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어서 언제 나타났는지 목령산인이 한마디 했다.
“네놈의 도는 아직도 반편이냐? 사람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야지. 그리고 눈독 들이지 마라. 저놈은 내 제자가 될 것이다.”
“무슨 소리!”
요산자가 발끈했다.
“저놈은 산천도(山川道)에 딱 어울리는 놈이라고!”
“흥, 그깟 반편짜리 도를 누가 닦는다는 말이냐. 나의 조화지도야말로 궁극의 도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자 산도가 혀를 찼다.
“쯧, 이놈들아. 시끄럽다. 가서 싸워라.”
산도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