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잠시 후.
무한은 솥에서 나와 화정노에게 큰절을 하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과분한 성취를 얻었습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연기화신의 경지를 순식간에 돌파하게 된 것은 화정노의 솥 덕분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갑자의 고련으로도 얻지 못할 성과였다.
무한은 자신이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할아버지 심양조만이 이런 안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꾸준한 수련으로 경천승운공을 숙달하면 된다.
화정노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내가 말했지? 불은 신비한 것이라고. 너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야.”
일어나는데 옷이 부스러기가 되어 떨어졌다.
“뭐냐? 그 흉측한 물건은?”
화정노가 무한의 아랫도리를 보고 놀렸다.
무한은 재빨리 연공실에 비치해둔 무복을 입고 돌아왔다.
화정노가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가 오래전에 네 할아버지한테 진 빚이 있었지.”
화정노가 손을 꼽아 뭔가를 계산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쓴 지화령석(地火靈石)은 그 빚을 상쇄하고도 훨씬 더 들어갔다. 그러니 나는 그 빚을 제할 때까지 여기 눌러 앉아서 호의호식해야겠다.”
무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풍운벽력수와 요산자처럼 화정노 역시 검천부에 머무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무한은 그들이 정말 갈 데가 없거나 호의호식을 하기 위해 검천부에 머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얼마든지 머무셔도 됩니다.”
무한은 밖으로 나오다 멈칫하더니 멍하니 섰다.
연공실에 들어갔을 때는 봄이었는데 지금은 녹음이 한창이다. 정원에 꽃이 만발하고 나무마다 잎이 무성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어리둥절해하는데 유아가 울며불며 달려왔다.
“아이고. 부주! 살아계셨군요!”
그러다 놀란 눈으로 무한을 보았다.
“아니, 한 달도 넘게 굶었는데 왜 이렇게 피부가 매끈한 거죠?”
유아가 무한의 볼을 잡아 당겼다.
“피부도 탱탱해지고.”
“유아도 굶어볼래? 살도 빠지고 좋을 텐데.”
“미쳤어요? 차라리 죽고 말지.”
유아가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풍운벽력수와 요산자를 찾아 안부를 묻고 화정노의 거처로 향했다.
화정노가 머무는 전각에 이르렀을 때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없다니까!”
화정노 목소리였다.
“그 많은 지화령석을 다 썼다는 말이냐? 거짓말 마라.”
바싹 마른 목소리가 다그쳤다.
“몇 번을 말해야 되냐고. 다 썼어. 없다고!”
전각으로 들어서니 화정노와 고목처럼 바짝 마른 노인이 대치하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무한이 화정노를 보고 말했다.
화정노가 무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이 다 먹어 버렸다고.”
마른 노인이 무한을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 환골탈태했네?”
처음 보는 노인이 보자마자 환골탈태한 걸 알아차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이 다가와 무한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럴 수가. 나는 심양조가 이놈을 태워 없애버리려고 한 줄 알았는데.”
“그가 자신의 손자를 태워버릴 생각이면 왜 굳이 우리를 불러 이 고생을 하게 했겠어. 그냥 죽을 때 순장해달라고 하면 됐지. 당신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쯧.”
화정노가 타박했다.
마른 노인이 털썩,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지화령석을 다 쓰다니. 그 많은 걸.”
노인이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화정노를 노려봤다.
“수작 부린 거 아냐?”
“무슨 소리! 지화환골탈태(地火換骨奪胎)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했으니, 당신은 내게 죽령수(竹靈樹)를 줘야 할 게요.”
“그, 그건…….”
“한입으로 두말하면 등선하기 어렵지.”
“으으…….”
마른 노인이 비틀거리며 문을 나갔다.
‘이상한 분이네. 언제 검천부에 들어왔지?’
화정노가 다가와 말했다.
“저 사람한테는 배우지 마라.”
“예?”
“자기가 무슨 조물주라도 된 양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군다고. 그런데 막상 하는 걸 보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사기꾼이지.”
화정노가 바짝 마른 노인 험담을 늘어놓았다.
무한은 바짝 마른 노인이 네 번째 사부라는 걸 깨달았다.
“저분 존함이 어찌 되시는데요?”
“흥. 목령산인(木靈散人)이라나 뭐라나. 알 것 없어. 사기꾼이라니까. 봐라, 나랑 내기해놓고 졌는데 죽령수도 안 주고 가버렸잖아.”
화정노가 투덜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목령산인?’
며칠 뒤.
“나는 목령산인이라고 한다.”
“심무한입니다.”
눈이 퀭해 보이는 목령산인은 특이하게도 허리춤에 삽을 차고 있었다.
“네가 바람과 구름을 알고, 산과 물을 알고, 불을 안다 해도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목령산인의 말투는 무척이나 거만했다.
무한이 앞서 배운 것들을 단번에 깎아내렸다.
무한은 속으로 웃었다.
별원의 기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다.
“의미가 있어야지, 의미가!”
목령산인이 목청을 높였다.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면 흙이나 물, 불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냐.”
무한은 목령산인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꼭 눈으로 보여줘야 알아듣지.”
목령산인이 후원으로 갔다.
“봐라. 이 어지러운 정원에서 대체 무슨 생명이 자라겠느냐?”
“예?”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무한의 속을 들여다본 듯 목령산인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보고도 모른단 말이냐? 저 꽃, 이 나무, 저 풀들이 서로 어우러진다고 생각하느냐?”
무한이 보기에는 잘 가꿔진 정원이다.
“아둔한 놈이군.”
목령산인이 혀를 차더니 허리춤의 삽을 들고는 정원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꽃과 풀들을 다시 배치하고 심지어 나무를 뿌리째 뽑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었다.
‘……?’
‘……!’
목령산인이 재배치한 정원은 묘하게도 생기가 가득했다.
꽃과 나무 열매의 향이 조화를 이뤘고 색들이 서로 어울려 기운을 생성했다.
기운 또한 순수하여 이 정원에서 수련을 하면 그 효과가 배가 될 것 같았다.
“놀라워요. 완전 다른 정원이 되었네요?”
“이제 알겠느냐? 조화를 이룬다는 게 뭔지?”
목령산인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조화(調和)의 도를 깨친 나야말로 진정한 도에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이제 이 정원은 천지자연의 기가 조화된 궁극의 자리를 이뤘다.”
목령산인은 무한이 연신 감탄 하면서 존경의 눈빛으로 보자 거만함이 극에 달했다.
“우주만물은 순환한다. 그 모든 이치가 나무 한 그루에도 들어 있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하나의 우주다. 그 우주를 운행하는 이치. 그걸 조화라고 한다.”
목령산인이 무한을 데리고 내원 정원으로 갔다.
“이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정원을 궁극의 자리로 만들어 봐라.”
목령산인은 삽을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
무한은 손에 들린 삽을 내려다봤다.
“어쩌라는 거야?”
난감했다.
한창 여름이다.
이때 꽃이나 나무를 파서 옮기면 열에 아홉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목령산인이 직접 한 걸 봤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조화의 도?’
방금 보기는 했지만 목령산인은 정원을 어떻게 가꿔야 하는지 한마디도 일러주지 않았다.
‘정말 사기꾼인가?’
화정노의 말이 생각났다.
‘정원 가꾸기가 무공과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할아버지의 안배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산도가 찾아오고 뒤이어 풍운벽력수와 요산자, 화정노가 찾아온 순서도 우연이 아니다.
산도는 가장 먼저 왔지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풍운벽력수가 찾아올 것이란 말만 했다.
‘풍운조화공, 산수진결 그리고 지화령석을 통한 환골탈태…….’
경천승운공을 이해하고 성취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조화의 도를 깨쳐야 한다.’
무한은 목령산인이 조성한 후원으로 갔다.
‘아!’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조화가 꽃이나 나무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건 개개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지. 꽃이 피고 지는 시기도 기간도 서로 다르고, 그에 따라 기운의 변화도 달라진다. 목령산인은 개개의 기운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서로 상생하도록 한 걸 거야.’
짐작이 갔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다.
‘우선은 각각의 기운을 살펴야겠다.’
무한은 정자에 온종일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습관처럼 경천승운공 구결을 외는데 단전에 기운이 쌓이는 속도와 양이 확실히 달랐다.
‘이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게 아닐까?’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자연의 이치라는 게 뭐지? 내가 아는 게 온전한 자연의 이치일까?’
경천승운공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스스로 그러하기에 자연(自然)이다. 스스로 그러함에 굴레가 있던가?」
그날부터 무한은 내원 정원에 온종일 머물렀다.
정자에서 자고 먹으며 정원을 가꿨다.
“아니, 봄도 아닌데 웬 정원 공사? 멀쩡한 나무는 왜 옮겨요?”
철도 아닌데 정원을 다시 꾸미자 유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때 밥 먹고 자면서 하니 크게 탓하지 않았다.
꽃과 풀을 이리저리 다시 배치하는데, 그 와중에 꽃이 시들고 나무가 말라죽었다.
“쯧쯧. 꽃 하나가 생명이거늘! 네 멋대로 이리저리 옮겨 심다니. 그러고도 꽃이 살기를 바라는 거냐?”
목령산인이 왔다가 죽은 꽃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러면서 아담한 배롱나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나무는 어떻게 자랄 것 같으냐?”
목령산인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나무가 앞으로 살 자리를 만들어 줘야할 게 아니냐. 물만 준다고 절로 자라는 게 아니다.”
“……!”
“이 나무는 이 자리에 선 것으로 크기와 모양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흙과 물 그리고 바람과 해, 주위에 간섭을 하는 나무들의 영향을 어떻게 받을지 생각해봐라.”
목령산인이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이 나무는 왜 이런 형태로 자랐을까? 같은 꽃인데 왜 망울 맺히는 수가 다르고 크기와 색이 다를까?’
누가 들으면 정말 한심한 질문일 것이나 무한은 진지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급해졌다.
‘곧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올 텐데.’
꽃과 풀이 스러지고 나무가 잎을 떨구는 계절이 오면 정원을 꾸밀 수가 없다.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다.
기어이 낙엽이 떨어지고 정원이 스산해지던 날.
참담한 마음으로 정원을 바라보다 목령산인이 조성한 후원으로 갔다.
“아!”
놀라웠다.
꽃이 시들고 나무가 잎을 떨군 건 같았으나 정원은 여전히 생기를 품고 있었다.
오히려 더 강건한 기운이 어린 듯했다.
그건.
골기(骨氣)였다.
“겨울이라고 생명이 사라진 게 아니지.”
언제 왔는지 목령산인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무한이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겨울 정원을 꾸미는 것도 참 흥미로운 일이야.”
툭 던지듯 뱉고는 사라졌다.
비록 색을 잃었으나 기운은 더욱 강하게 맺힌 후원을 보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기운이 아무리 변화해도 본질은 변함이 없지.’
경천승운공을 익히며 얻은 용과 체의 이치가 단초였다.
‘조화의 도는 보이는 것들의 조화가 아니야. 본질과 관련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