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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3화 (23/250)

23화

놀라서 절로 눈을 떴다.

눈앞의 솥에서는 뭔지 모를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위를 보니 아직 밤이다. 저녁을 먹지 않았건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해볼까?’

다시 운기조식에 들어가려는데 화정노가 들어왔다.

“수련도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요?”

화정노가 클클, 웃었다.

“네가 수련에 든 지 사흘이 지났단 말이다.”

“예?”

화정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연공실에서 나오자 유아가 난리 쳤다.

“대체 몇 끼나 거르신 거예요? 먹고 살아야 수련도 할 게 아니에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밥 먹는 내내 유아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며칠 뒤 화정노가 다시 왔다.

“연공실로 가자.”

다시 솥이 걸리고 화정노가 시꺼먼 돌에 불을 붙이고는 물을 부었다.

무한은 솥 앞에 앉아 경천승운공을 운기했다. 솥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곧 무아지경에 들었다.

한줄기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며 의식이 깨어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솥 앞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는 자신이 보였다.

‘어찌된 거지?’

마치 의식과 몸이 나뉜 듯했다.

‘헉? 주화입마?’

아닌데?

가만 보니 몸 안에서 단전을 관조하는 한줄기 의식이 따로 있다.

‘의식이 나뉜 건가?’

희한한 일이었다.

몸 안의 의식도 자신이고 몸 밖의 의식도 자신이다.

시간이 멈춘 듯했으나 소리는 들렸다. 바깥에서 말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저러다 굶어 죽는 거 아니에요?”

유아의 험악한 목소리.

“걱정 마라.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까.”

왠지 주눅 든 것 같은 화정노의 대답.

“그러니까 솥에다 미약을 넣은 거 아니냐고요!”

“떽!”

화정노의 역정.

“이 무식한 계집애가 감히 신공을 방해하다니!”

서슬 퍼런 화정노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지지 않는 유아.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데 신공을 익히면 뭐 해요. 죽고 말 건데.”

“계집애야 모르면 가만있어라?”

“뭐라고요? 제 나이가 몇인데 계집애라니! 이 늙은이가!”

유아가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네가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저놈은 지금 밥보다 몸에 더 좋은 영약을 처먹고 있다고. 네가 방해하면 신공이 깨진다니까.”

자칫 화가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유아의 목소리가 누그러진다.

“암튼 혹시라도 부주께서 잘못되면 당신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는 거예욧!”

과격한 유아.

세상이 정지된 듯했으나 단전의 기운은 계속 쌓여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는데 지루하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이다.

이윽고 솥을 지피던 불이 사그라들자 눈을 떴다.

‘진기가 운용된다!’

단전에서 진기가 흘러나와 전신 십이정경과 팔대기맥으로 뻗어나갔다.

그 힘은 경천심결을 통해 온몸에 밴 기와 또 달랐다.

우주와 단전이 연결되고, 그 기운이 기맥을 타고 몸 밖으로 분출하는 것만 같았다.

‘이게 진기라는 거로구나.’

무한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기 길을 찾아가듯 흐르는 진기.

단전에 의식을 두자 절로 기운이 일어났다.

무한은 자신이 연정화기를 이뤘음을 깨달았다.

솥 안의 향기가 큰 도움을 주었지만, 앞서 경천심결로 바탕이 다져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풍운조화공과 요산자의 산수진결(山水眞訣)도 한몫했다.

호흡과 육신의 기를 조화시킨 것은 풍운조화공이었다.

요산자의 산수진결을 바탕으로 단전의 형을 잡았고, 화정노의 솥 덕분에 바로 연정화기의 단계를 이뤄낸 것이다.

‘할아버지…….’

무한은 찾아온 기인들이 할아버지 심양조의 치밀한 안배에 따른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무한이 눈을 떴다.

시꺼먼 돌은 하얀 가루가 되어 있었다.

“불이 얼마나 위대한지 좀 깨달았나?”

언제 왔는지 화정노가 물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화정노가 기쁜 듯 코까지 벌름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솥에 뭐가 들어 있었습니까? 정말 좋은 향기가 나던데요.”

“아무것도 없다.”

화정노가 솥뚜껑을 열었다.

물은 수증기로 다 날아가고 솥 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신기하여 살펴봤다.

정말 물만 끓였던 듯 뭐가 탄 흔적도 없었다.

‘솥이 아니라면 저 검은 돌에서 난 것일까?’

무한이 검은 돌이 타고 남은 하얀 가루를 만져봤다.

“지화령석(地火靈石)이라고 한다. 정말 귀한 거지.”

화정노의 얼굴에는 아깝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무한이 연공실에서 나오자 잔뜩 성난 유아가 보였다.

“드디어 나오시는군요. 이제는 놀랍지도 않네요.”

유아의 잔소리 신공도 나날이 일취월장하였다.

“죽으려고 작정하셨군요. 열흘! 무려 열흘을 굶다니.”

‘열흘이 지났다고?’

무한도 놀라며 말했다.

“몰랐어. 어쨌거나 나를 걱정해주는 건 유아밖에 없네?”

“지금 농담이 나와요?”

“근데 배도 안 고파.”

“그러니까 이상한 거죠.”

유아가 인상을 쓰며 무한을 노려보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부주 맞아요?”

유아가 무한의 얼굴을 만졌다.

“왜 그러는데?”

“귀여운 맛은 어디로 가고 이상한 애늙은이가 된 거죠?”

“뭐?”

“가서 보라고요! 열흘이나 굶으니 이렇게 되지.”

무한은 방으로 가서 동경을 봤다.

확실히 얼굴이 달라졌다.

열흘을 굶었으니 바싹 말랐는데 어딘가 모르게 어른스러워 진 것 같았다.

“아무튼 수련도 좋지만 식사는 꼬박 챙겨야죠. 어서 밥 먹으러 가요.”

유아가 잡아끌었다.

며칠 후 다시 화정노가 찾아왔다.

화정노는 이전처럼 시꺼먼 돌 위에 솥을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불의 위대함을 알았으니 좀 더 지켜보며 불이 지닌 뜻을 알아내봐라.”

화정노가 역시 알 수 없는 한마디만 남기고는 가버렸다.

‘이번에는 며칠이나 갈까?’

이제까지 두 차례나 솥 앞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동안 배가 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았다.

열흘이라는 시간도 순간이었다. 잠시 운기했다고 여겼을 뿐이다.

솥 앞에 정좌하고 앉았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솥 안에서 다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이번에는 눈을 반개하고 무아지경에 들어갔다.

단전에서 기운이 소용돌이치더니 서서히 흘러나왔다.

기운은 독맥을 타고 오르다 백회에서 머뭇거리더니 미간에서 멈췄다.

미간 사이가 빡빡하게 차올랐다.

또 하나의 기운이 임맥을 거슬러 올랐다.

묵직하게 치밀어 오르던 기운은 가슴의 옥당혈에서 멈췄다.

‘이게 중주(中珠)와 상주(上珠)로구나.’

무의식중에도 중주와 상주의 실체를 느꼈다.

하주(下珠) 단전이 연정화기의 그릇이라면, 중주 옥당은 연기화신의 그릇이었다.

미간 사이 상주를 빡빡하게 채운 기운과 중주 옥당의 기운이 서로를 응시했다.

두 기운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고 한동안 서로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대로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천목혈이 찌릿하더니 의식이 분리됐다.

‘아니다. 분리가 아니라 확장이야.’

무한은 의식이 분리되어 몸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확장되는 현상임을 깨달았다.

무한의 의식이 연공실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까지 느낄 수 있었다.

유아는 아침저녁으로 와서 연공실을 들여다봤다.

화정노가 와서 불을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불이 꺼지려 하자 화정노가 인상을 썼다.

“이거 참, 이러다 지화령석을 다 쓰겠네.”

화정노는 투덜거리며 시꺼먼 돌을 더 붓고 솥에 물도 채웠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유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계셔야 되는 건데요?”

화정노가 웃으며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집애야, 걱정할 것 없다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 주고 싶어도 줄 게 없다고. 너는 내 끼니나 잘 챙겨라.”

화정노가 연공실을 걸어 잠그고, 그 앞에 앉아서 지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또 하루, 하루…….

이제 시간의 흐름도 무의미해졌다.

모든 것이 정지된 어느 순간.

‘……!’

미간과 옥당에 웅크리고 있던 기운이 요동쳤다.

미간의 기운이 내려오려 했다.

의식적으로 미간의 기운을 잡았다.

임독양맥 타통.

이는 무인으로서 중요한 순간이다. 평생을 수련해도 타통의 기회조차 얻기 힘든 기연이다.

임독양맥 타통에도 방법이 있다.

옥당의 기운이 차서, 치고 올라가 미간에서 합일을 해야 비로소 진통(眞通)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미간의 기운이 내려와 옥당에서 합일한다면, 경천십이식을 대성하기는 어려워진다.

옥당의 기운에 집중했다.

단전으로부터 솟아온 기운이 옥당에 쌓여갔다.

어느 순간, 옥당이 뻐근하게 부풀어 올랐다.

눈앞에 하얀 구름이 펼쳐졌다.

구름 위에는 전각이 있었다.

전각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무한은 문으로 들어갔다.

환한 빛이 가득한 세상!

상하좌우, 온통 하얀 빛이 그득했다.

어느 순간.

가슴 속 전각 안에 기운이 가득 차더니 급격히 요동을 쳤다.

쾅!

옥당의 전각이 들어찬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

호흡은 면면부절이 아니라 거의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이어졌다.

전신에 기운이 가득 차는 걸 느꼈다.

이제까지 연근, 연골, 연혈로 이룬 기운과 달랐다. 마치 세상과 하나가 된 듯한 기운이었다.

‘연기화신?’

기운이 한껏 부풀자 무한은 육신이 하나의 얄팍한 껍질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런 느낌도 잠시.

육신과 바깥의 경계가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방으로 퍼졌던 기운이 중단전 옥당을 중심으로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응집하더니 주먹 만한 구슬이 됐다.

구슬은 처음에는 무채색이었는데 점차 빛을 발하더니, 어느 순간.

쾅!

엄청난 빛을 발하며 터졌다.

순간 기운이 치솟아 미간 사이에 있는 상주 인당으로 밀려들었다.

옥당에서 올라온 기운이 인당의 기운과 충돌했다.

다시 한 번 몸속에서 폭음이 일었다.

쾅!

머릿속이 터져나갈 것 같은 굉음에 무한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순간 화정노의 솥에서 풍기는 향기가 느껴지며 간신히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잡아챘다.

시간이 잠시 멈추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한이 눈을 떴다.

“이제야 깨어났구나!”

화정노가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다가오던 화정노는 갑자기 인상을 쓰며 코를 틀어막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어서 씻어라.”

정신이 돌아왔다.

어디선가 시큼한 악취가 풍겼다.

“이게 무슨 냄새죠?”

“네 몸에서 나는 냄새잖아!”

“어째서 이런 악취가?”

무한이 황당해 하며 일어나다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는 걸 느꼈다.

오랜 시간 좌정해서 몸이 굳어있을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화정노가 가까이 오지도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기다려봐라.”

화정노가 어느새 물이 달아 텅 빈 솥에 물을 가득 부었다.

뜨겁게 달궈졌던 솥에 물이 들어가자 순식간에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들어가!”

“예?”

“솥에 들어가라고!”

솥이 크기는 했지만 무한이 들어가면 꽉 찬다.

물도 제법 뜨거울 거 같은데…….

“이놈이? 말을 안 듣네?”

화정노가 냅다 무한을 들어 솥에 우겨넣었다.

피시식!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화정노가 솥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머리에 부었다.

“아!”

뜨거운 물속이었건만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화정노가 솥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퍼부을 때마다 그윽한 향기가 풍겼다.

무한은 엄청난 기연을 얻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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