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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2화 (22/250)

22화

둘째 날.

요산자가 뒤를 보더니 말했다.

“한 놈 떨어졌네?”

귀영이 먼저 떨어져 나갔다.

무흔은 이레째 되어서야 떨굴 수 있었다.

지독한 자였다.

무한은 무흔을 떨치려다 심장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이후에도 요산자는 무한을 데리고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녔다. 가다가 밤이 되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잤다.

대개 야영을 하면 맹수를 쫓기 위해 불을 피우는데 요산자는 그러지도 않았다.

음식을 할 필요도 없었다. 생쌀을 씹거나 구근을 날로 먹었다.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으으.”

처음에는 생쌀이나 나무뿌리를 씹는 게 고역이었다.

사람의 입맛이라는 게 묘해서 며칠 지나니 나무뿌리도 달착지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동안 다니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많이 산을 탔는데 그동안 마을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없는 세상을 떠도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요. 마을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당연하지.”

요산자가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 말했다.

“사람은 사람의 길을 쫓아 산다. 산은 산의 길이 있을 뿐이지.”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인적도 길도 없는 산을 탄다는 뜻으로만 이해했다.

요산자는 가끔 멈춰서 산세를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와!”

높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무한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발아래 크고 작은 산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넓었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고 호연지기가 밀려들었다.

“대체 이 산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생각해봐라. 저 산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았다.

산들이 이어지는데 일정한 방향이 있는 듯했다.

“저쪽에서 큰 힘이 땅을 밀고와 산을 만든 것 같군요.”

“그 힘은 어디서 온 것 같으냐?”

“…….”

“이 세상에는 기운이 가득하다. 그 기운이 밀고 당기면서 편평한 땅이 솟아 산이 되고, 그 산이 다시 가라앉아 평지가 되기도 한다.”

요산자의 설명은 알 듯 모를 듯 했다. 다만 경천승운공에서 말하는 자연의 이치와 아주 비슷했다.

“형태라는 건 안에 품고 있는 힘의 외형이다. 산의 형태를 잘 관찰하면 그 안의 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있지.”

요산자가 들려주는 자연의 이치를 바탕으로 경천승운공의 구결을 해석하니 쉽게 풀려간다.

“으흐흐.”

“왜 웃으시는 건데요?”

“네가 땅의 흐름을 몸으로 깨달았으니 이제 화식(火食)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네?”

“너 때문에 나까지 생식을 하느라 고역이었잖느냐? 생각보다 땅의 기운을 빨리 깨쳐서 다행이지 뭐냐?”

알고 보니 요산자는 무척이나 미식가였다.

산의 짐승이나 계곡의 물고기를 귀신같이 잡아 요리를 하였다.

“흐아. 정말 맛있는데요?”

“당연히 맛있지! 이게 다 산의 정기가 녹아 있는 요리란 말이다.”

요산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은근 뻐겼다.

“산에 사는 동물도 그 산의 기운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아느냐?”

“예?”

“이 산의 기운은 별로다. 그러니 이 토끼고기도 맛이 없는 것이고.”

영험한 산에 약초가 많이 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동물의 고기 맛까지 달라진다는 건 처음 들었다.

“산의 기운에 따라 물의 기운이 다르고, 물의 기운에 따라 그 물을 먹고 사는 것들의 기운도 다르지.”

요산자에 의하면 대지의 기운은 한 덩어리이나, 그 안에 여러 갈래의 결이 있다.

그리고 그 결을 구분하는 것은 물이었다.

요산자의 말을 듣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무척 멀리 왔는데 그동안 한 번도 강을 건너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은 그렇다 치고 물을 건너지 않다니.

그야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이제까지 물을 건너본 적이 없어요.”

“왜? 물을 따라 가고 싶냐? 그러면 그렇게 하자.”

그날로 요산자는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은 평지로 내려가며 천을 이뤘다.

개천 옆에 마을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마을을 지나니 자기도 모르게 흘깃거렸다.

딱!

뒤통수에 요산자의 딱밤이 작렬하였다.

“한눈팔지 마라.”

개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을 이뤘다. 강을 따라가다 보니 마을이 수도 없이 나왔다.

하지만 요산자는 마을에서 묵지 않았다. 강가에서 자고 물고기를 잡아 끼니를 때웠다.

그럼에도 무한은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산천을 가까이 할수록 경천승운공에 대한 이해가 절로 깊어졌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안배는 정말 신묘하구나.’

풍운벽력수나 요산자를 보낸 할아버지가 놀라울 뿐이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데 요산자가 빤히 보다가 물었다.

“물고기만 며칠째 먹는데 질리지도 않냐?”

요산자가 아무리 양념을 잘해도 물고기는 물고기다. 굽거나 탕을 끓이거나 매번 비슷하다.

무한이 물고기의 살을 바르며 대답했다.

“질리지요.”

“그런데 왜 마을에 가서 따듯한 밥을 먹자는 말을 하지 않는 건데?”

“지금 수련 중이잖아요.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게다가 사부도 그러시잖아요.”

무한은 언제부터인가 요산자를 사부라고 불렀다.

산도나 풍운벽력수와 다르게 요산자는 그리 부르는 걸 막지 않았다.

요산자가 흥미롭다는 듯 무한을 보며 말했다.

“너도 참 지루한 놈이다. 열여섯이면 한창 혈기왕성하고 호기심 많을 나이인데.”

“사부와 이렇게 다니는 게 좋아요.”

진심이었다.

지난 육 년간 천하방 검천부에서 갇혀 살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세상에 나와 자유롭게 돌아다닐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언제든 묻고 답을 들을 수 있는 요산자가 옆에 있다.

풍운벽력수와 달리 요산자는 말이 많아 좋았다.

천하방에서는 유아와 형소를 제외하면 이야기 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산에 오르면 천하가 다 내 것 같아요. 그리고 강을 따라가면 풍광이 수시로 바뀌고요.”

요산자의 표정이 묘해지더니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너, 내게 도를 배우는 게 어떠냐?”

“저는 갈 길이 있어요.”

“뭔데?”

“무인의 길이요.”

요산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끔찍한 길을 뭐 하러?”

“할 게 있거든요.”

“뭔데?”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천하방을 해체한다는 뜬금없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으음. 네놈이 사부를 기망하려는 것이냐?”

산천을 떠도는 동안 요산자와 친해져서 이제는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그럴 리가요.”

산과 들, 강을 지나며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무한은 점차 자연에 녹아들었다.

흙이 되고 강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경신공부는 나날이 발전하여 이제는 요산자에 뒤처지지 않았다.

어느 날 요산자가 말했다.

“이 산만 넘으면 천하방이다. 나의 대도를 바로 깨우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다만 천지자연이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느꼈으면 그것으로 감지덕지해라.”

그렇게 산 따라 물 따라 돌고 돌아 천하방 뒷산으로 왔다.

“아니, 이게 무슨 꼴이래요?”

유아가 상거지가 된 무한을 보고는 기겁을 하였다.

봇짐을 벗어 건네자 유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받아들었다.

“옷이고 봇짐이고 대체 왜 이래요. 흙에서 뒹굴다 오신 거예요?”

“그런 셈이야.”

“예?”

“여기는 별일 없었어?”

“형소 공자가 몇 번 찾아왔을 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요산자도 검천부에 머물렀다.

“너를 가르치느라 산속에서 고생했으니 당분간 쉬어야겠다. 제일 좋은 전각을 다오.”

***

“나와 봐라.”

아침부터 누가 부르기에 나가보니 등에 사람 몸통만한 솥을 맨 사람이 서 있었다.

세 발이 달린 솥은 뭘로 만들었는지 아주 시꺼멨다.

손에는 커다란 부대자루를 들고 있었다.

“화정노(火鼎奴)다.”

스스로를 노예라고 하다니 정말 기이한 자였다.

깡마른 몸에 화상 자국이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눈썹과 수염조차 없어서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화정노의 눈빛은 불꽃처럼 번뜩였다.

“불이란 건 정말 순수한 것이다. 불을 안다는 것은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

“여기 연공실 없냐?”

“왜 없겠어요?”

검천부에 수도 없이 많은 곳이 연공실이다. 무한은 아버지가 쓰던 검각 연공실로 안내했다.

화정노가 등에 맨 솥을 내려놓고, 부대자루를 풀러 시꺼먼 돌들을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 아까운 걸…….”

화정노는 시꺼먼 돌을 무척 조심스레 다뤘다.

무한은 화정노가 하는 걸 잠자코 지켜봤다.

화정노가 시꺼먼 돌 위에 솥을 올려놓고 물을 부었다. 그러고는 화섭자를 꺼내 돌에 불을 붙였다.

“오오!”

돌에 불이 붙다니 놀라웠다.

무한이 놀라자 화정노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불은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성질을 바꿔준다. 성질이 바뀐다는 건 그 안의 기운도 바뀐다는 것이다. 신기하지?”

할아버지가 보낸 기인들은 대체로 자부심이 충만하여 뻐기는 걸 좋아했다.

“성질이 바뀐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예?”

화정노가 묻는 의도를 몰라 되물었다.

“꽤 영민하다고 들었는데 아닌가보군.”

화정노가 약간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불에 의해 모든 건 새롭게 태어난다. 환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이 앞에 앉아 운기조식하면서 그게 무슨 뜻인지 곰곰 생각해봐라.”

그러고는 그냥 가버렸다.

무한은 잠시 멍했다.

잠시 후.

‘이 냄새는 뭐지?’

뭐가 담겨 있는지 모르지만 향긋한 냄새가 솥에서 풍겨 나왔다.

‘물만 부었는데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솥 안이 궁금했다.

하지만 주인의 허락 없이 솥을 열어볼 수는 없었다.

무한은 솥 앞에 앉아 운기조식하였다.

요산자를 따라 산천을 떠돌 때도 끊임없이 경천승운공을 연구했다.

그게 습관이 되어 이제는 좌정하고 호흡을 하면 무의식적으로 경천승운공을 떠올렸다.

경천승운공의 구결을 천천히 떠올리며 의미를 새기는데 어느 순간 단전이 꿈틀거렸다.

‘……!’

화정노의 솥 안에서 풍기는 향기에 기운이 반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향은 뭔데 단전을 자극하는 거지?’

콧속으로 들어오는 알 수 없는 향기에 기가 모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물이 끓으며 솥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무심하게 수증기를 바라보다 문득 연정의 의미가 다가왔다.

‘솥 안의 물이 화기에 의해 달궈지며 기화하고 있다!’

그 이치는 연정화기(練精化氣)의 원리 그대로였다.

무한은 단전을 솥이라고 상상했다.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와 연근, 연골, 연혈에서 배어나온 기가 단전으로 흘러와 어우러지더니 뜨겁게 달아올랐다.

‘으음.’

무아지경에 들어 계속하여 조식을 하였다.

어느 순간.

관원과 기해가 꿈틀거리더니 기운이 흘러나왔다.

두 기운은 서서히 태극의 원리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기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석문(石門) 혈이 서서히 열렸다.

기운이 석문혈로 흘러들어가자 절로 경천승운공의 구결이 떠올랐다.

「기해의 바다가 넘치면 석문이 열린다. 그 너머에 무궁한 공간에서 진기를 얻는다.」

석문으로 쓸려 들어가는 기운에 의식을 실었다.

“……!”

석문 안은 텅 빈 우주 그 자체였다.

무한은 망연자실 끝이 없는 어둠 속으로 기운이 흘러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텅 빈 암흑의 공간으로 느꼈던 단전이 실제로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음이 느껴졌다.

순간 단전이 폭발하듯 팽창했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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