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남루한 차림의 도인이 봇짐을 메고 왔다.
꾀죄죄한 도포에서 땟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누가 보면 거렁뱅이라고 했을 것이다.
생김새도 비쩍 마르고 염소수염도 볼품이 없었다.
무한은 그가 풍운벽력수처럼 뭔가를 가르쳐주러 왔음을 알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도인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예의가 참 바르구나. 나는 요산자(樂山子)라고 한다. 산이 물을 내보내고, 물이 산을 경계 짓는 이치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무한은 산과 물의 이치가 무공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했다.
요산자가 하늘을 가리켰다가 땅을 가리켰다.
“하늘에 풍운이 있다면 아래로는 흙과 물이 있지. 흙이 만물을 기를 수 있는 것은 물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과 물의 조화를 깨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단다.”
“풍수지리를 배우는 거로군요.”
요산자가 클클, 웃었다.
“그런 잡학을 감히 나의 대도(大道)와 비교하다니. 네가 심양조의 후인이 아니었다면 당장 땅속에 묻어버렸을 것이다.”
요산자는 말이 좀 험했다.
“뭐 하느냐? 짐을 꾸리지 않고.”
“짐이라니요?”
“산과 강을 보려면 바깥으로 가야지.”
“예?”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한은 천하방에 온 뒤 사실 유폐 아닌 유폐를 당해왔다.
게다가 경천무궤를 받은 뒤로는 검천부 밖을 구경도 못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간다니.
검천부 밖을 나갈 땐 호위를 대동하라던 강유의 당부가 떠올랐지만, 무슨 상관이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무한이 봇짐을 꾸려오자 요산자는 곧바로 천하방을 나섰다.
요산자는 천하방을 나오자마자 산기슭으로 향했다.
“길은 이쪽인데요?”
“길이라니? 무슨 길 말이냐?”
“저쪽이 마을로 가는 길입니다.”
“저건 사람의 길 아니냐? 우리는 산의 길, 물의 길로 간다.”
“산의 길이요?”
“사람에게만 길이 있는 줄 알았느냐? 산도 뻗어가는 줄기가 있고 물도 가는 길이 있다.”
그러면서 요산자는 길도 없는 산으로 올라갔다.
재빨리 뒤따랐다.
요산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법을 익히지 않은 무한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휙.
요산자가 다시 나타났다.
“왜 안 오는 거냐?”
“예?”
“따라오지 않고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열심히 따라가는데요?”
요산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너 혹시 신법을 모르는 거 아니냐?”
“아직 익히지 않았습니다만.”
“어허. 네 나이가 몇인데? 검천부 후계자라며? 그런데 아직 신법을 익히지 않았다고?”
“삼재보법은 익혔습니다.”
“삼재보법?”
요산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익힐까요?”
무한은 수많은 무공서를 섭렵했다. 그중에는 경신법에 대한 공부도 있다.
“아는 경신법은 있고?”
“추풍신법, 부운보, 천리무종…….”
아는 경신법을 줄줄 외웠다.
나름 강호에서 알아주는 경신법들이다.
물론 익힌 바는 없다.
“그런 허접한 것들을 어디다 쓰려고?”
요산자는 혀를 차더니 경신법 구결을 알려주었다.
무한은 집중하여 들었다. 요산자는 풍운벽력수보다 말투가 느긋하여 외우기 쉬웠다.
요산자가 구결을 두 번 들려주고 세 번째 반복하려는데 무한이 말했다.
“이제 외웠습니다. 다시 들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외웠다고?”
“예.”
요산자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궁금한 건 없고?”
“예.”
“머리는 제법이로군. 허나 구결을 외웠다고 깨친 건 아니니까. 오늘은 천천히 가자. 가면서 구결대로 신법을 펼쳐야 한다.”
요산자가 앞서서 산으로 올라가면서 자세나 보폭, 기운을 쓰는 법을 일러주었다.
‘이거 재밌네?’
무한은 요산자가 일러준 방식대로 자세를 잡고 구결대로 기운을 운용하며 뒤따랐다.
구결은 내공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무한은 단전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대신 나름대로 해석하여 경천심결을 통해 전신에 배인 기운을 운용했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몸을 날릴 수 있었다.
두어 시진이 흐른 뒤에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산을 오르는데도 미끄러지듯 나아갈 수 있었다.
마치 바람을 잔뜩 받은 배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듯 자연스러웠다.
‘놀라운 신법이구나.’
한참 앞서가던 요산자가 문득 멈추더니 뒤돌아보았다.
무한이 바로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라?”
“예?”
“어떻게 따라 왔지?”
“무슨 말씀이신지?”
요산자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무심코 자기 속도대로 가다가 따라오지 못할 줄 알고 멈춘 모양이다.
“너 신법을 알고 있었던 거 아냐?”
“오늘 처음 배웠는데요?”
“그런데 나를 따라붙었다는 거냐?”
“워낙 자세히 가르쳐주셔서 바로 익힐 수 있었지요.”
“으음. 따라와봐라.”
요산자가 걸음을 더 빨리했다.
무한은 뒤쫓아 가느라 전력을 다해야 했다.
어쨌든 놓치지 않았다.
무한이 계속 따라붙자 요산자가 홱 돌아서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아닌데. 이럴 수가 없는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경신법은 단순한 신법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터득한 거라고.”
“그런가요?”
“내공이 아니라 산천의 정기를 끌어들여 쓰는 신법이지.”
그래서 달려도 지치지 않고 내력 소모도 적었구나.
“그런데 내가 어떻게 바로 터득할 수 있는 거냐고. 이치를 안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닌데…….”
요산자가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무래도 무한이 경신법을 익힌 게 믿기지 않는 듯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또 물었다.
“정말 경신법을 몰랐던 것이냐?”
“네.”
“흥!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잘하지 않느냐?”
“그야 이 경신법이 대단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이 대단한 경신법을 이리 쉽게 따라하다니.”
무슨 말인지 잠시 헛갈렸다.
요지는 자신의 경신법이 대단한 거고, 그러니까 쉽게 익힐 수 없는 거라는 이야기다.
‘자기 자랑이 심하구나.’
사실 익히지 않았을 뿐이지 무한이 지닌 무학 지식만큼은 남 못지않았다.
그 때문에 요산자가 일러준 경신법이 무서에서 본 것과 여러 가지로 달랐음에도 그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요산자의 경신법은 경천심결과 궤를 같이 했다.
경천심결은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다. 주위의 기운과 호응하는데 이는 결국 산천의 정기나 마찬가지다.
“내공도 없다며?”
“예. 하지만 이 신법은 산천의 기운을 끌어 쓰니 상관없잖아요.”
“마중물이라는 게 있다. 산천의 정기를 끌어오기 위해 약간의 내공을 써야 하지.”
“내공심법은 익히지 않았지만 호흡은 오랫동안 했지요.”
“호흡?”
무한이 경천심결과 내관반청의 호흡에 대해 말해주었다.
“호오. 그랬군.”
요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전신을 단전 그릇으로 삼는다? 과연 검신다운 생각이군. 말년에 뭔가 얻었다더니 이거였구나.”
“네? 전신이 단전 그릇이라고요?”
“그게 아니면 뭐겠냐?”
요산자가 말했다.
“단전이란 게 별 거냐? 기운을 쌓는 곳이 단전이다. 하단전에 쌓는 건 가장 효용이 높기 때문이지. 그런데 너는 무식하게 온몸에 쌓아온 거란 말이다.”
“아…….”
“당장 쓸 수 있는 효용은 낮지만 이루고 나면 얻는 결과는 크겠지. 하지만 육십 년을 수련해도 무공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만큼 강한 내공을 쌓기는 힘들 텐데?”
요산자가 무한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전에 내공은 없지만 전신 근육과 뼈, 피에 기운이 가득했다.
“특이한 내공을 익힌 모양이로군. 단전 내공이 없으니 네놈도 그걸 모르는 것 같고.”
“……?”
무한은 전신에 쌓인 기운을 내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경천심결로 쌓은 기운이 내공이라면 경천승운공이 왜 따로 있는 거지?
“말했잖느냐? 전신에 기운을 쌓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단전에 내공을 쌓아야 효과적으로 운용을 할 수 있단 말이다. 경천심결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거지.”
요산자가 설명하다 말고 아, 하더니 인상을 쫙 썼다.
“검신, 이 인간이…… 이제 보니 내 경신법을 이렇게 써먹었구나. 그래놓고 한마디도 언질도 없었다니.”
“……?”
“마중물!”
순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약간의 내기를 마중물 삼아 산천의 기운을 끌어 쓰듯 전신의 기운을 단전이 끌어들여 사용한다면?
무한은 경천심결과 경천승운공의 역할을 깨달았다.
경천승운공은 보통 사람이 대성을 하려면 일갑자 이상 수련을 해야 한다.
말이 일갑자이지 육십 년이다. 제대로 쓰려면 이빨 빠진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쓸 수 있는 공법이다.
이를 보완하는 게 경천심결이다.
경천심결은 연근, 연골, 연혈을 통해 육신을 기화(氣化)하는 작용을 한다.
경천승운공은 이렇게 전신에 밴 기운을 끌어들여 연정(練精), 연기(練氣), 연신(練神)을 이루어가는 수련법이었다.
‘그래서였구나.’
할아버지가 왜 자신이 가장 나중에 깨친 경천심결부터 익히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경천승운공으로 연신을 이뤄내기까지는 수십 년 지난한 세월이 필요하지만, 경천심결로 기반을 다진 무한은 이를 앞당길 수 있었다.
“그렇군요.”
스승의 지도라는 건 다된 밥을 먹는 것 같았다.
“깨우침 감사합니다.”
“에잉. 네가 예의가 바르니 참는다만, 네 할아비 같이 남의 무공을 막 가져다 쓰고 그럼 안 된다. 알았느냐”
“예.”
무한은 하루 만에 제법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한걸음에 수 장씩 미끄러지듯 가니 신이 났다.
“이 경신법은 이름이 뭡니까?”
“이름 없다.”
요산자는 산과 물의 흐름에서 이치를 얻어 경신법을 창안했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렇게 대단한데 이름이 없다고요? 제가 붙여볼까요?”
요산자가 걸음을 멈추고 멀리 있는 산을 가리켰다.
“저 산이 무슨 산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저 산은 우두산(牛頭山)이다.”
정말 소의 머리 같았다.
“그렇군요.”
“소머리처럼 보이느냐?”
“네.”
“잘못 보았다. 사실 저 산은 와호산(臥虎山)이다.”
“…….”
“다시 보거라.”
요산자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하라는 대로 다시 살펴보니 정말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정말 제가 잘못 보았군요.”
“이리 순진한 놈이 있나.”
“네?”
“저 산이 무슨 산인지 나도 모른다. 그냥 붙여본 것뿐이다. 그런데 너는 내가 소머리 같다고 하면 소머리로 보고, 누워 있는 호랑이 같다고 하니 호랑이를 그리며 본 것이다.”
“…….”
“경신법에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을 벗어나지 못할 게 아니냐. 너라면 이렇게 대단한 경신법을 이름에 가두고 싶겠냐?”
‘이름에 갇힌다고?’
내심 깨닫는 바가 있었다.
요산자의 말에는 도의 이치가 들어 있었다.
요산자가 산 아래를 보다가 혀를 찼다.
“저놈들은 왜 저리 죽자고 쫓아오는 거냐? 네 호위냐?”
무한이 요산자의 시선을 따라 산 밑을 봤지만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짚이는 바가 있었다.
무흔과 귀영.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쫓아오는 모양이다.
“으음…… 저런 놈들을 달고 다닐 수야 없지.”
요산자가 눈빛에 장난기가 스쳤다.
“지금부터 저놈들을 떼놓을 때까지 달린다.”
그러더니 휙, 하고 앞서 나갔다.
순식간에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으아…….’
무한은, 죽자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