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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9화 (19/250)

19화

고성후는 동생의 말을 가만 듣다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셋째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모두가 탐내는 물건이니 만큼 어린 조카가 그걸 지킬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돌려 말했지만 암묵적으로 고동후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고강후가 클클, 웃었다.

“너희 속셈이 참 시꺼멓구나. 어린 조카의 무공을 빼앗겠다? 그걸 아버님이나 숙부가 두고 볼 것 같으냐?”

“장로전 중지를 모으면 되지요! 뺏겠다는 게 아닙니다. 만현각에 보관하자는 거지요.”

“허튼소리 마라!”

고동후의 말에 고강후가 탁자를 쾅, 쳤다.

“그리한다면 세상이 모두 일어나서 우리를 손가락질 할 것이다. 경천무궤에는 관심을 꺼라. 아니, 내가 굳이 이런 말할 필요도 없지…….”

“…….”

“산도가 검천부에 머무른다고 했다. 그가 있는 한 아무도 비급을 건들 수 없다.”

“그 늙은 도인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가 그리 대단한 고수요?”

“그가 지닌 능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아버님도 모른다.”

“그런 고수가 왜 검천부 객경 노릇을 한다는 말입니까?”

고동후가 투덜거리는데 고성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강호에 그런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검신이 그에게 후사를 부탁한 게 맞는 겁니까?”

마치 협잡꾼에게 넘어간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빛을 띠었다.

두 아우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고강후가 코웃음을 쳤다.

“흥! 너희가 걱정할 것 없다. 이미 오래전 선도(仙道)에 뜻을 두고 속세를 떠난 사람이다. 이제 와서 검신의 유전을 노리겠느냐?”

“으음…….”

고동후가 침음성을 흘렸다.

구릿빛 다부진 얼굴을 지닌 고동후는 누가 봐도 탐욕스러워 보였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강후가 고동후를 향해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잘못하다가 도천부의 명예에 실금이라도 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고강후는 장자로서의 위엄을 한껏 세웠다.

고성후와 고동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같은 시각.

무한은 강유와 검천전 빈청에 앉아 차를 마셨다.

“열여덟까지는 내가 후견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천무궤를 넘겨 준 강유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홀가분해 보였다.

강유가 조용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네 할아버지의 안배가 정말 신묘하지 않느냐? 산도라니…… 그분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단한 분인가 봅니다.”

산도는 검천부 후원 대나무밭에 있는 모옥이 마음에 든다고 차지하였다.

무한이 불편함 없이 모시라고 해서 유아가 하인들과 함께 주위를 단장하는 중이다.

강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부를 측량할 길이 없다는 분이야.”

“……?”

“그런 분이 계신데 어째서 할아버지가 천하제일인이 되셨을까요?”

강유가 무한을 물끄러미 봤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예.”

“무공만 높다고 천하제일인이 될 수는 없다.”

“…….”

“검신 어르신은 단지 강해서 천하제일인이라 불린 게 아니었다. 문무 양면에 뛰어났지. 무엇보다…….”

강유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천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 콧대 높은 구파일방이 머리를 숙였지.”

천하를 생각하는 마음?

“산도 어르신의 뜻은 속세가 아니라 도에 있지. 천하가 어찌되든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이다. 검신의 청이 아니었다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모실 수가 없는 분이다.”

“아…….”

“천하제일인은 천하를 품을 가슴이 있어야 한다.”

강유가 자신이 생각하는 천하제일인을 설파했다.

“천하에 고수는 많다. 그리고 한 유파의 정점에 있어 서로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도 한둘이 아니다.”

“…….”

“하지만 그 누구도 천하제일인이라는 별호를 받은 이는 없다.”

강유의 말을 들으니 새삼 할아버지가 위대하게 다가왔다.

“만인의 추앙을 받는다는 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보다 어렵다.”

강유가 이리 말을 길게 한 것은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다.

무한은 강유의 말을 듣다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강유는 결코 만현각주로 여생을 보낼 서생이 아니었다.

‘이 사람도 뭔가 감춰둔 꿍꿍이가 있구나.’

도천부의 위세에 눌려 목숨을 보전하고자 숨죽이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강유는 무심한 표정 그대로 말했다.

“천무관은 휴관 신청하거라.”

“예?”

“경천무궤를 받았으니 수련해야 할 게 아니냐.”

“그래도 됩니까?”

“그래야 한다. 경천십이식을 익힐 때까지 검천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마라.”

강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말했잖느냐? 네 할아버지의 유전을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검천부에 있어도 안전한 건 아니죠.”

“산도가 검천부에 있는 한 넘볼 놈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신검대와 무적대가 돌아왔잖느냐? 그들이 경계를 선다면 검천부는 철벽으로 두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었는지 사족을 덧붙였다.

“혹 검천부 밖을 나갈 때는 반드시 담 대주나 공 대주를 동반해라.”

무한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강유는 자신을 아직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다.

“왜 대답이 없지?”

“알겠습니다.”

무한은 강유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공손하게 대답했다.

불쌍한 후견인.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구나.

하기는 천하제일인의 유전을 보관하고 있었으니 온 세상이 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무한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뭐냐?”

“제가 검천부에서만 지내다보니 천하방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무림이란 곳은 더더욱 그렇고요.”

강유는 눈치가 빨랐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가며 말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무공이나 익혀라. 그런 건 나중에 알아도 된다.”

그러더니 휭하니 가버렸다.

여전히 까칠한 후견인이다.

홀로 남은 무한은 경천십이식 비급을 들어 펼쳤다.

툭!

첫 장을 넘기자 한 통의 서찰이 꽂혀 있다가 떨어졌다.

재빨리 주워서 봉투를 열고 서신을 펼쳐 보았다.

할아버지가 남긴 것이다.

「네가 이 글을 읽는다면 열여섯이 되었겠구나.」

죽음을 앞두고 적었을 텐데 심양조의 문장은 담백했다.

경천심결을 완벽하게 체득한 뒤 경천승운공을 익히라는 당부와 하기주에게 경천십이식 비급을 전하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역시 할아버지는 하 사숙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어.’

치밀한 심양조다.

다음 날.

무한은 하기주와 왕선유를 검천부로 초청했다.

개인사정으로 당분간 휴관을 해야 하니 그동안 지도해준 학사와 교두에게 차를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불렀다.

왕선유는 아쉬워하였다.

“이제 과시를 볼 정도로 키워놓았는데 그만두다니……”

“그만두는 게 아닙니다. 잠시 휴관하는 것이죠.”

“배움에는 때가 있는데… 지금 한창 중요한 나이인데 그만두니 너무 아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모신 겁니다. 천무관으로 가지는 못하지만 가끔 오셔서 지도해주시지요.”

고급 차의 향기를 코로 맡던 왕선유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와야지.”

이렇게 좋은 차를 마실 수 있다면 언제든 달려올 왕선유다.

무한이 하기주에게도 부탁했다.

“강유 숙부께서 앞으로 검천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틈틈이 오셔서 지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지.”

하기주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무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며칠 후 하기주가 찾아왔다.

무한은 서신과 경천십이식을 보여주었다.

“사부께서 정말 나를 잊지 않았구나!”

하기주가 서신을 읽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심양조를 의심하여 방황했던 자신이 너무 한심했던 것이다.

하기주가 경천십이식 비급을 앞에 두고 구배지례를 올렸다.

“사숙이 생겨서 저도 좋습니다.”

무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기주가 심양조를 방주가 아니라 사부라 불렀으니 정식 제자가 된 셈이다.

하기주는 경천십이식을 흔쾌히 건넨 무한에게 감복했다.

천하제일검법이라는 무공을 이렇게 선뜻 내줄 사람이 또 있을까?

“당분간…… 남들에게는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

무한도 그럴 생각이었다.

감춰둔 패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언젠가는 공석에서도 사숙이라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기주가 경천십이식을 익히면 대외적으로 밝히겠다는 뜻이다.

하기주는 가슴이 먹먹하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놈이 정말…….’

***

며칠 후.

산도가 무한을 불렀다.

대나무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니 작은 모옥이 보였다. 원래 숲지기가 쓰던 것인데 산도는 그 자리를 고집했다.

무한이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는 외풍이 드는 모옥을 둘러봤다.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아직 바람이 차니 전각으로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흘흘. 답답한 전각보다 시원한 모옥이 훨씬 낫다. 걱정할 것 없다.”

산도가 무한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근골은 제법 단단하군.”

심의삼재검으로 단련된 무한의 근골은 단단하면서도 유연했다.

산도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며칠 안에 어떤 놈이 너를 찾아갈 게다.”

“예? 누가 또 오십니까?”

“응, 아주 무식하게 생긴 놈이지.”

“무슨 일로 오시는 건지요?”

“뭐긴 뭐겠어? 너에게 가르칠 게 있어서 오는 거지.”

“저를요?”

“이상한 잡술을 가르칠 거다. 그럭저럭 쓸 만하니 배워두거라.”

산도는 귀찮은 듯 가보라고 손짓을 하였다.

무한은 궁금했으나 더 묻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날 가르치러 온다고? 뭘?’

산도의 말은 곧 잊어버렸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지 않나.

이제 경천승운공을 얻었으니 내공을 얻는 데 매진해야 한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내공심법인가.

무한은 우천각에서 온종일 경천승운공을 읽고 그 뜻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경천승운공의 내용은 자연의 이치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이상해. 이게 정말 내공심법이라고?’

응기와 축기, 운기 과정을 일러주는 일반 내공심법서와 너무나 달랐다.

답답해진 나머지 우천각 뒤 연무장으로 나가 검을 휘둘렀다.

심의삼재검을 펼치고 있노라면 잡념이 사라지니까.

신검대와 무적대가 돌아온 뒤 검천부의 경계는 단단해졌다.

이제 검천부 안에서는 마음 놓고 무공을 펼쳐도 된다.

퍼퍽!

무한이 전력을 다하자 목인형이 여지없이 부서졌다.

“으음. 철인형을 가져다 놔야 하나?”

중얼거리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

연무장 입구에 눈이 부리부리한 노인이 서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고놈, 눈치 하나는 빠르군. 어디 가서 뒤통수 맞지는 않겠어.”

노인이 중얼거렸다.

산발한 머리가 사방으로 쫙쫙 뻗은 게 특이한 노인이었다.

“누구신데요?”

“나는 풍운벽력수(風雲霹靂手)라고 한다. 네 할아버지에게 갚을 빚이 있어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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