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머리 바로 위에서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
이어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수고가 많네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심무한?’
역시나 무한이 천천히 다가왔다.
고개 숙인 귀영의 눈에 무한의 신발이 들어왔다.
“도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일어나라.”
목에 닿은 검이 살짝 파고들었다.
귀영은 시키는 대로 도 자루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일어났다.
“…….”
무한이 귀영 앞에 서서 잠시 보다 몸을 돌렸다.
“따라가라.”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영은 검을 목에 붙인 채 무한을 따라갔다.
감옥으로 갈 줄 알았는데 무한은 검천부의 객청으로 갔다.
무한이 하인에게 일렀다.
“식사 가져오세요.”
무한이 의자에 앉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귀영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목에 검이 붙어 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밥은 먹고 다니나 모르겠군요.”
무한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굶으면 되겠어요?”
“왜 이러시는 건지…요?”
귀영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당장 죽일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회유하려고 하겠지.’
그런데 무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귀영의 생각과 달랐다.
“저세상 가는 길이 얼마나 멀지 알 수가 없잖아요.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죠.”
무한이 담담하게 웃었다.
“우리, 꽤 오랜 인연이잖아요?”
소름이 끼쳤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 닭다리 하나는 뜯는다.
귀영은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떠나기로 결심하자마자 걸리다니.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다.
귀영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냥 죽여라.”
무한이 시선을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밥이나 드세요. 한 끼는 먹여 보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하인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음식을 본 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말린 전복에 해삼? 저렇게 큰 생선도 있었나?’
귀영이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솟는다.
무한이 목이 기다란 술병을 땄다.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이게 무슨 술이지?’
꼴깍.
어이없게도 귀영은 침을 삼켰다.
무한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다른 잔에 술을 따라 내밀었다.
귀영이 받아 들이켰다. 어차피 죽을 거 먹고 마시고 죽자는 심정이었다.
“크억!”
목에 불이 붙었다.
“두강주라고 하죠.”
무한이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한 잔은 아쉬워서 저세상 가다말고 돌아올지 모르니까.”
무한이 다시 술을 따랐다.
“석 잔은 들고 가셔야지.”
귀영은 자신의 잔을 내려다 봤다.
두 번째 잔이다.
손이 떨렸다.
“음식도 먹어가며 마시는 게 좋을 겁니다.”
또박또박 존대를 하면서도 무한은 여지를 주지 않았다.
“목에 검을 대고 있으니 술이 목에 걸리는 것 같소.”
“아, 그런가요?”
무한이 손짓하자 무흔이 검을 거뒀다.
“나는 차라리 목에 댄 칼이 낫던데. 등 뒤에 있는 검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더 신경이 쓰이지 않을까요?”
무한의 말에 귀영이 돌아보려 했다.
“돌아보면 죽는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
말 그대로 실행할 놈이다.
‘아, 씨발.’
귀영은 뒷목이 따가웠다.
뒤에 있는 놈의 검이 목을 겨누고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무한의 말대로 이게 더한 고통이었다.
“말도 없이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염려 말고 마음껏 드시죠.”
무한이 선심 쓰듯 말했다.
‘이 악독한 놈!’
사람을 조롱한다.
‘이놈이 이렇게 악랄한 놈이었단 말인가? 그동안 내가 뭘 본 거지?’
육 년 동안 무한을 지켜본 귀영이다.
그가 보기에 무한은 어리숙한 놈이다. 하란다고 삼 년을 꼬박 사당을 지키고, 삼 년 동안 삼재검만 휘두른, 지루하고 덜떨어진 면이 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자신을 감춘 독한 놈이었다.
귀영은 자신의 눈을 파고 싶었다.
무한이 이런 놈인 줄 알았으면 진작 그만 뒀을 것이다.
귀영은 음식을 먹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아무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어떻게든 틈을 내서 달아나야 해.’
귀영은 최대한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속으로 도주할 궁리를 하였다.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음식을 다 비웠다.
무한이 마지막 술을 따라주었다.
쪼르륵.
귀영의 귀에 술잔이 채워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드시죠?”
귀영이 술을 쳐다봤다.
이걸 마시고 나면 저승길로 떠나야 한다.
귀영은 지나온 생이 억울했다.
특히 지난 육 년.
무한을 감시하며 허송세월을 한 나날을 생각하면 이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고강후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크흠.”
귀영이 술잔을 노려보다 헛기침을 하고 무한을 보았다.
“나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십시오.”
“복수?”
“내 인생을 망친 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누가 인생을 망쳤다는 겁니까?”
“고강후!”
귀영의 말에 무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라니.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귀영은 무한이 고강후라는 말을 듣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자 가슴이 더 떨렸다.
‘고강후가 보냈다는 사실도 알 고 있었구나. 아, 정말 음흉한 놈이다.’
귀영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나를 믿고 있으니 가까이 가서 기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대력신도라고 부르죠. 내공이 얼마나 두터운지 일도에 산 하나를 쓸어버린다는데? 당신의 재주로는 어림없을 겁니다.”
“나는 원래 자객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잠시의 틈만 있다면 놓치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이제 거짓말까지 하는군요. 사실 자신 없잖아요? 그래서 도주할 준비를 하는 것 같던데. 이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이나 하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고 숙부가 죽는 걸 원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위선자입니다. 겉으로는 조카처럼 위한다고 하고, 뒤로는 호시탐탐 검신의 유전을 노리고 있단 말입니다.”
“설마 고 숙부가 그럴 리가요.”
“사실입니다. 그는 정말 간악한 자입니다. 모두 속고 있는 것이죠.”
“…….”
무한의 시선이 뒤에 있는 무흔을 향했다.
무흔이 품에서 서류를 꺼내 읽었다.
“장영귀. 강초현 출신.”
귀영은 얼이 빠졌다.
자신의 고향을 어찌 알았을까?
“은신술과 무영도를 익힌 후 스물에 흑천에 투신. 흑천 암살대에서 수련을 거친 후 암왕귀령도법을 전수받고 도천부 서창지기로 잠입.”
‘가만, 뭐? 흑천?’
넋을 놓고 있던 귀영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립니까? 흐, 흑천이라니! 흑천이 왜 여기서 나오는 겁니까?”
무흔이 말했다.
“고강후 서재에 있던 네 이력이다.”
“내가 흑천의 암살자라고?”
귀영은 고강후에 대한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고강후, 이 새끼가?’
고강후가 이제껏 자신을 버리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완벽하게 출신성분을 조작해 두었으니 그냥 죽이기 아까웠던 것이다.
“이런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까?”
“조작입니다! 조작된 거라고요!”
귀영이 입에 거품을 물며 부인했다.
무한이 서랍을 열더니 뭔가를 꺼냈다.
눈에 익었다.
‘내 전낭?’
귀영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정상적으로 이 많은 돈을 얻긴 어렵겠죠.”
귀영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 달에 은자 두 냥. 거기다 시시때때로 받은 격려금. 그리고 가끔 도천부 서창 물건을 빼돌려 얻은 돈까지.
적지 않은 돈이다.
게다가 그는 무한을 감시하느라 돈을 쓸 새가 없었다. 전장에 맡겨 이자 놀이를 했더니 꽤 큰 금액이 됐다.
“어떻게 이걸…….”
귀영은 거의 온종일 무한을 감시해야 하니 집이 따로 필요 없었다. 대신 천하방 성 밖 마을 한적한 흉가를 은신처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무한이 그걸 어찌 알았을까.
이제 귀영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동안 수입이 괜찮았던 모양이군요. 이건 마지막 음식을 대접한 값이라 여기겠습니다. 저승길에 이 세상의 돈은 필요 없잖아요?”
무한이 담담하게 말하니 더 섬뜩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이력은 전부 조작된 겁니다! 저는 흑천의 암살자가 아닙니다!”
그때 뒤에서 무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다. 흑천에서 알았다면 분노했을 것이다. 너 같은 놈을 흑천의 암살자라 불렀다는 것 자체를 치욕으로 여겼을 거야.”
무흔의 말은 어조가 평탄하여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더욱 섬뜩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력과 상관없이 당신은 나를 감시해왔지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아, 아니…….”
아는 게 많다니.
‘뭘 한 게 있어야 아는 게 있지! 맨날 삼재검 수련만 한 주제에!’
귀영은 기가 막혔다.
“그동안 나를 감시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한이 마지막 인사를 했다.
무흔의 무심한 어조가 들려왔다.
“흔적 없이 묻어버릴까요? 아니면, 경고의 의미로 목을 걸어둘까요?”
무한이 전낭을 챙기고 일어나며 무흔에게 말했다.
“묻어버리죠.”
귀영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자, 잠깐만!”
귀영이 후다닥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철푸덕.
오체투지를 하더니 울먹였다.
“그저 감시만 했을 뿐입니다. 죽을죄까지는 아니잖습니까? 아니,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부주의 충견이 되겠습니다.”
귀영이 있는 말 없는 말 다 쏟아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육 년이라는 세월…….”
“네. 맞습니다. 무려 육 년입니다. 그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이였던가요?”
“앞으로 그렇게 될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귀영은 눈물 콧물까지 쏟아냈다.
“대단한 연기력이네요. 이목이 아니라 연극을 했으면 대성했겠어요.”
“연극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심장을 꺼내 보여 달라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귀영이 아차 했다.
“심장은……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귀영은 무한에게 농락당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사정했다.
무한이 잠시 침묵하다 무흔에게 말했다.
“이 사람을 뒤따라온 자는 누구죠?”
“도천부 동복이라는 자입니다. 고강후가 은밀한 일을 할 때 쓰는 칼로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귀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알고 보니 고강후가 은밀히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나 보다. 이래저래 죽는 건 매한가지 신세였던 것이다.
무한이 빤히 귀영을 주시했다.
귀영은 심장이 타들어가고 간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무한이 입을 열었다.
“살 길을 열어드릴까요?”
귀가 번쩍 뜨였다.
***
다음 날 아침 무한은 고강후를 찾아갔다.
“네가 그동안 검천부에 틀어박혀 명절인사조차 없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냐?”
갑작스런 무한의 방문에 고강후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부족한 제가 천무관 수련을 따라가다 보니 여간 벅찬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숙부의 은혜를 알고 감격한 나머지 감사드리고자 왔습니다.”
무한이 뒤를 보자 귀영이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저 녀석이? 기어이 발각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