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우천각 뒤 연무장에서 경천심결을 운용하며 심의삼재검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천천히 기감이 확장되며 문득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강유의 말에 따르면 감시하는 존재는 둘.
하나는 강유가 보낸 암중호위.
다른 하나는 도천부에서 보낸 이목.
강유가 보낸 자는 일부러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무한은 항상 감시인의 눈길을 느끼며 살았다.
그 기운이 느껴지는 시간대는 아침과 저녁이다. 마치 이제 출근하였고, 또 이만 간다고 알리기라도 하듯 기운을 보내왔다.
그런데 지금 무한이 느끼는 기운은 그자의 것이 아니었다.
‘암중호위가 아니다!’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자와 약간 다른 기운이다.
무한이 느낀 기운은 우천각 담 너머 마른 수풀 사이에 은신하고 있었다.
무한이 기운이 감지된 곳을 응시하자, 나무들 사이로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겨울이라 나뭇잎도 없는데 용케도 잘도 숨어 있었다.
성 밖 마을로 나가는 척하며 봤던 왜소한 체구의 사내였다.
내심 뿌듯했다.
은신한 감시인을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낸 것이다.
‘암중호위의 기척은 잡히지 않아.’
그건 암중호위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이다.
무한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날 밤.
도천부의 이목이 사라지자 암중호위의 기운이 다가왔다.
무한은 뜰로 나가 기운이 오는 곳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기운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지더니 사라졌다.
‘아직 가지 않았어.’
무한은 천목투심술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기운을 감지하고자 했다.
내관반청의 깊은 호흡까지 들어갔으나 암중호위의 기운은 느낄 수가 없었다.
‘엄청난 은신술의 고수구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무한은 암중호위가 기운을 드러내면 나가서 주시했다.
그러면 암중호위가 기운을 감췄다.
하지만 무한은 상관없었다.
도천부의 이목이 사라지고 약 반시진 후에 암중호위의 기운이 사라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암중호위가 있을 만한 곳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그러기를 보름 정도 지났을까.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무한의 앞에 흑의를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기다란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는 서른 중반가량으로 얼굴이 무척 희었다.
얼음처럼 싸늘한 표정의 사내가 물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뭔가?”
사내는 무한이 밤마다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무한이 천천히 읍을 하였다.
“그간 저를 지켜주셨으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대가를 받고 한 일이다.”
무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대가?
이런 고수는 얼마나 받아야 어린아이의 암중호위를 할까?
강유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대가를 이제부터 제가 지불해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말을 들었음에도 사내는 표정 하나 바뀜 없이 무한을 보았다.
“…….”
침묵이 흘렀다.
무한의 말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가.
이제 자신의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무한과 사내는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월 은자 닷 냥이다.”
그리고 사내가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땅속으로 꺼져버린 듯했다.
‘은자 닷 냥?’
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은자 닷 냥이라고?’
저만한 은신술의 고수가 지난 육 년간 자신을 암중호위한 대가가 월 은자 닷 냥이라니…….
무한의 얼굴에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
강유를 찾아갔다.
“맞다. 은자 닷 냥씩 주었다. 그 정도 능력은 있는 자다. 무엇보다 성실함이 있으니 믿을 만한 자다.”
강유의 말에 무한은 다시 한 번 의문이 일었다.
‘강 숙부는 암중호위의 진정한 능력을 알고 있는 걸까?’
암중호위의 능력은 도천부의 이목을 훨씬 뛰어넘는다.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걸보면 섬뜩할 정도다.
그가 죽일 작정으로 누군가를 노린다면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 능력 있는 분을 붙여주셨으니 숙부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가 월봉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암중호위가 말을 했는지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네 사람이 필요할 나이구나. 그렇게 해라.”
강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러나 곧이어 무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 다른 의중이 있는 자다. 일부러 너에게 접근하였으니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강유의 전음.
무한은 고개를 숙여 찻잔을 들며 놀란 기색을 감추었다.
‘강 숙부는 그자의 능력을 알고 있어. 그리고 그자는 지금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거야.’
강유가 화제를 돌렸다.
“보름 후 경천무궤를 돌려줄 것이다. 준비하고 있거라.”
말을 하는 강유의 안색이 침중했다.
늘 무심했던 얼굴에 마치 죽음을 돌려준다는 안타까움이 스쳤다.
그 순간 무한은 강유가 자신의 편이라는 걸 확신했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숙부께서 조카를 대신하여 무거운 짐을 맡으셨음을 압니다. 감사드립니다.”
열여섯이 되면서 무한은 한층 성숙해졌다.
본래 성품이 따듯하고 유쾌한 무한이었으나 한꺼번에 부모와 할아버지를 잃고, 지난 육 년간 홀로 지내다시피하며 어린아이답지 않은 진중함을 갖췄다.
검천부의 생활은 사실 유폐나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은 한 아이의 천성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강유는 무한의 담담한 얼굴로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겨낼 수 있을지도.’
자신의 무심한 표정과 달리 무한은 늘 담담하다. 그러나 속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강유는 작년 대화를 떠올렸다.
무인의 길을 포기하라고 했을 때, 무한이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는 알아들었을 것이라 여겼는데, 이후 천무관에서 더 열심히 삼재검을 익히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역시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라는 걸까?’
문득 자신의 의형 심군하가 떠올랐다.
‘형님, 아들이 가시밭길을 가고자 하는군요…….’
강유가 손을 젓자 무한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방을 나왔다.
다음 날.
검천부 우천각 뒤편 전각에 사람이 하나 들었다.
그동안 무한을 지켜왔던 암중호위.
“무흔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찾아온 무한에게 이름을 밝혔다.
“불편한 건 없습니까?”
무한은 유아에게 암중호위가 머물 거처를 준비하라고 했다.
“없다.”
무한이 무흔을 주시하며 말했다.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정원에 나온 무한이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귀영은 귀식대법 수준으로 호흡을 감춰야 했다.
한참 후 무한이 우천각으로 들어가자 수풀 뒤에 숨어 있던 귀영이 몸을 빼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갑자기 노려보고 지랄이야.”
귀영이 우천각을 노려보았다.
지난번 성문에서 무한과 조우한 뒤 내내 찜찜했다.
‘내 은신을 알아차린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공도 없는 놈이 어떻게 자신의 은신을 알아차리겠나.
‘그놈이 일러줬을지도 몰라.’
자신처럼 무한을 감시하던 기천부 놈.
귀영은 그자의 존재를 알고는 있으나 어디에 은신하고 있는지 느낄 수 없었다. 자신보다 윗줄이 고수인 것이다.
그런 놈이 검천부로 거처를 옮겼다. 이는 저놈이 자신처럼 감시자가 아니라 암중호위였다는 뜻이다.
그놈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굳이 찾아가서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러니 무한이 아는 것도 당연하리라.
‘정말 이 짓을 그만둘 때가 됐구나.’
이미 가진 전표를 은자로 바꾸고 있는 중이다. 성 밖 마을에서 무한에게 들킨 이후 도주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그의 정신은 붕괴 직전이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육 년! 무려 육 년이라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 귀영은 술 한 잔 마음 편히 마셔본 적이 드물었다.
무엇보다 무한의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에 일찌감치 질려버렸다.
하지만 어설프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귀영은 임무를 마치면 고강후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고강후는 위선군자다. 겉으로는 대인배처럼 굴지만 하는 행동은 모든 걸 의심하고 암중에서 수작을 꾸미는 소인배다.
애초에 도천부 수족이 아닌 외부에서 자신을 뽑은 게 살인멸구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귀영이 어둠을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지켜보는 걸 네가 알고, 네가 알고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지. 무한, 저놈도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하니 이제 이 사실을 모르는 건 고강후뿐이군.’
귀영은 잠시 어둠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슬며시 검천부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고강후에게 정기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귀영이 도천부로 접어드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누구냐!”
도천부 경계를 맡고 있는 무사 다.
“아, 나요, 나. 서창지기.”
“귀 씨로군. 이 밤중에 왜 돌아다니는 거지?”
“내전 심부름 다녀오는 길이요.”
귀영이 귀찮다는 듯 패를 보여주었다.
무사가 패를 확인하고 길을 비켜주었다.
잠시 후, 고강후의 집무실로 들어간 귀영이 그간의 상황을 보고했다.
고강후도 매번 같은 보고를 듣는 게 지겨운지 건성으로 들었다. 그러고는 끝내 화를 냈다.
“대체 매번 보고가 어쩌면 이리 한결 같은 거냐?”
“그놈이 하는 짓이 그거밖에 없습니다. 먹고, 천무관 가고, 책 읽고, 자는 게 다입니다.”
“사람이 어찌 일 년 내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이야? 그것도 어린아이가? 네가 어디 가서 놀다 와서 대충 보고하는 것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보고 들은 대로 보고한 것뿐입니다.”
귀영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으음…….”
고강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태도가 갈수록 불손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쓸모없는 놈. 그간 들인 돈이 아까울 지경이군. 조만간 처리해버려야겠다.’
고강후가 귀영을 죽일 마음을 품었다.
‘이 새끼가……?’
귀영은 정신적으로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고강후가 살심을 품었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제거하려고? 내가 그렇게 쉽게 죽어줄 것 같으냐?’
그렇지 않아도 도주할 마음이 굴뚝같았던 귀영은 바로 결심을 굳혔다.
천만금을 줘도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도주하기로 작정하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귀영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은자는 충분하고.’
나머지 전표는 고강후가 추적을 하지 못할 만큼 멀리 달아나서 바꾸면 된다.
‘흔적을 지우는 데 사흘!’
앞으로 사흘이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청산한다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니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일단 환심을 사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제가 다른 수를 내보겠습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귀영이 수상했지만 고강후는 내색을 않고 손을 저었다.
“그래라. 다음번에는 좀 더 다른 걸 가져와야 할 것이다.”
다음 날.
귀영은 새벽 일찍 늘 넘나드는 검천부 담장 밑으로 갔다.
앞으로 며칠만 이 짓을 더하면 된다니 마음이 가벼웠다.
훌쩍, 몸을 날려 담장을 넘었다.
“……!”
귀영은 담을 넘어 착지하는 순간 누군가 있음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인 귀영이 도를 뽑으려는 순간.
그의 목에 검이 드리워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뽑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머리도 쳐들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