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여기 서가에 꽂힐 만한 무서를 입수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럴 것이다.
여기 서가에 꽂힐 만한 무서를 입수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쉽다.
삼층에 꽂힐 만한 무공은 신공절학은 아니더라도 이름난 무공들이다. 그런 비급을 발견했다면 은밀하게 홀로 익히려 들지 천하방에 상납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삼층에 있는 무공서들은 천하방이 멸문시킨 방파의 서고에서 가져온 것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다는 비급들이었다.
말하자면 공식적으로 천하방이 접수했기에 아무도 건드릴 수 없어서 만현각으로 들어온 것들이다.
무한은 무공서가 있는 서가를 돌아봤다.
몇몇은 이름난 절기들로, 세상에 나가면 파란을 일으킬 만한 비급들이었다.
‘이건 마공이잖아?’
삼층 서고의 비급은 대부분 마공이나 사공들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했다. 천하방이 공격하여 멸문시킬 정도라면 아무래도 흑도나 마도 방파였을 테니까.
결국 도움이 될 만한 무공은 없었다.
그날 밤.
지하 연공실로 들어가서 경천십이식 도해 앞에 섰다.
이상하다고 해서 수련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조심스레 경천심결을 운용하며 삼재검법을 펼쳤다.
지난 삼 년 간 수없이 휘둘러온 검법이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장부의 떨림까지 감지하며 천천히 목검을 휘둘렀다.
어느 순간 다시 혈관이 뜨거워졌다. 마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
즉시 멈추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방금 생긴 현상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기가 혈맥으로 흘러들어가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화기가 넘치면 미칠 수도 있다는데…….’
그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무한은 지하 연공실 옆 석실로 건너갔다.
석실 한쪽 서가에 몇 권의 무서가 있었다.
- 이 무서들은 세상에 나가면 안 된다.
할아버지가 신신당부한 무서들이다.
무한은 무서 한 권을 집어 들곤 잠시 망설였다.
‘괜찮을까?’
모든 내공은 각기 독특한 축기와 운기법, 발경법이 있다. 어떤 내공은 읽는 것만으로도 구결이 되어 암암리에 몸에 밴다.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먼저 눈에 띄는 건 두 권이었다.
그 가운데 한 권은 책을 뜯었다가 다시 만든 듯했다. 표지조차 없어 제목도 알 수가 없었다.
‘으음.’
내용은 마공의 느낌이 물씬 났다. 피로 쓴 듯 붉은 글씨부터 살기가 넘쳤다.
‘이건 아닌 거 같아.’
읽다 말고 한옆에 치워두고서 다른 책자를 보았다. 양피지로 된 책자로, 무척 오래된 듯했다.
황정기공(黃正奇功).
책자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갔다.
황정기공은 도가의 양생결과 비슷했다.
평범한 사람이 익히면 무병장수를 할 것이요, 오의를 제대로 깨우치면 신도(神道)에 들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자세하게 읽어나갔으나 몸에서 일어난 현상을 이해할 단서는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무서도 살펴봤으나 혈관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언급한 내용은 없었다.
‘끄응.’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워하는 무한의 시선에 밀쳐두었던 제목 없는 무공서가 걸렸다.
‘제목도 없으니 무명공이라고 해야겠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무명공을 펼쳤다.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던 어느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
「…연근(練筋), 연골(練骨), 연혈(練血)을 통해 수라의 육신을 이루고 연정(練精), 연기(練氣), 연신(練神)으로 수라의 정신에 닿는다…」
‘이거였어.’
대개의 내공서는 정기신 삼단전을 수련하고 운기하는 법을 담고 있다.
근육과 뼈 그리고 피를 단련시킨다는 말은 이 책이 처음이다.
가슴이 뛰었다.
‘피가 끓어오르고 혈관이 타들어가는 느낌은 연혈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걸 거야.’
무명공에 따르면, 자신은 경천심결을 통해 연근과 연골의 단계를 지나 연혈의 단계로 들어간 것이었다.
‘으음… 그럼 계속 수련해도 되는 걸까?’
확실하지 않았고, 단지 추측만으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생각이 틀려 자칫 심각한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 주화입마로 미칠지도 모른다.
무한은 무명공을 끝까지 읽었다.
아쉽게도 연혈에 관한 내용은 더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수라의 기운을 쓰는 법에 대한 것이었다. 무명공을 바탕으로 한 무공은 무척 잔인하고 광폭했다.
‘원래 명칭이 있었을 거야. 그런데 내용이 너무 잔인하니까 후세에 전해지는 걸 원치 않아서 훼손했겠지. 누군가 이를 얻어 다시 엮기는 했지만, 표지를 붙이지 않은 건 마공서이기 때문이었을 거야.’
무한은 마공을 익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검법 부분을 읽을 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말았다.
무명공의 검법은 이상하게도 경천십이식의 묘리와 닿아 있는 듯했다.
‘설마 경천십이식이 여기서 나온 건 아니겠지.’
무한이 책자를 덮었다.
‘연혈이라면 피를 단련시킨다는 거잖아. 그전에 연근과 연골의 단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봐야겠다.’
지하 연무장으로 돌아온 무한은 심의삼재검 일수오검을 천천히 펼치며 경천심결을 운용했다.
검세보다는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가 근육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집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경천심결도 일종의 내공이구나.’
호흡을 고르게 하는 걸 조식이라고 한다.
꾸준히 조식을 하면 기운이 느껴진다. 전신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무시하고 단전을 응시하면 어느 순간 아랫배 단전에 들어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응기 수련이라 한다.
단전을 느낀 후 계속 조식 수련을 하면 점차 기운이 단단히 뭉친다.
이를 축기 수련이라 하는데, 계속 축기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단전이 형성되고 기운이 뻗어나가려는 느낌을 받는다.
단전의 기운이 넘쳐나 경맥을 따라 뻗어나가면 그때부터 운기 수련에 들어간다.
과정은 간단하지만 응기와 축기, 운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십 년 이상의 조식 수련이 필요하다.
운기를 한다고 해서 바로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십이정경과 팔대기맥을 비롯하여 필요한 경락을 뚫고 다듬어, 기가 원활하게 유통할 수 있기까지 꾸준히 운기조식을 해야 한다.
그 과정이 또 십 년 가까이 걸린다.
적어도 이십 년을 꾸준히 운기조식을 해야 내공이 형성되는 것이다.
내공을 발경하는 것 또한 지난한 수련이 필요하다.
단전에 쌓인 기를 일정한 경락을 통해 발경하면 뇌전처럼 기가 흘러 상대를 친다.
이럴 경우 상대는 외상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다.
전신 경락에 손상을 입게 되는데, 흔히 내상을 입었다고 표현한다.
그렇기에 명문대파는 내가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성취는 더디지만 일단 이루면 비약적으로 무공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내력과 내공은 다르다.
외공을 익힌 무인도 근육의 힘만 쓰는 게 아니다. 꾸준히 외공 수련을 하면 근골에 내기가 배고, 병장기를 휘두르거나 권을 내지를 때 내기가 더해진다.
이를 내력이라 한다.
내공은 그것과 차원이 다른 힘이다.
각 문파마다 내공심법과 발경법이 다른 것은 추구하는 기운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운은 기본적으로 오장육부와 연결된 경락에서 비롯된다. 오장육부는 각기 오행과 음양의 기운과 상응한다.
단전의 기운을 오장육부의 기운과 화합하여 독특한 기를 형성하는 게 내가공부의 핵심이다.
‘경천심결은 단전을 형성하는 대신 전신에 축기를 하는 거야.’
그런 점에서 내력과 비슷하다.
다만 일정 경지에 이르면 기를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아마도 경천심공이 열쇠겠지.’
무한은 할아버지 심양조의 무공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난 삼 년, 심의삼재검과 경천심결을 수련한 과정을 곰곰 되짚어 봤다.
‘경천심결을 통해 근육의 축기가 완성되면 자연 뼈와 골수로 넘어가는 거고.’
처음 몸에 집중하였을 때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가 근육에 스며드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이후 별 느낌이 없어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았다.
근육과 달리 뼈와 골수는 아무런 느낌이 없어 축기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근육과 뼈의 축기가 이제 끝났다는 건가?’
무한은 심의삼재검을 멈추고는 그 자리에 좌정한 후 경천심결을 운용했다.
동작을 멈추니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의 움직임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가 근육과 뼈, 골수에 가득 찬 느낌도 잠시, 어느 순간 서서히 피가 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피가 끓어오르는 건 아닐 거야. 그렇다면 바로 죽었겠지. 기감이 분명해.’
무한의 머릿속에는 익히지는 못했지만 담고 있는 무공 지식은 적지 않았다.
확신을 가지고 계속하여 경천심결을 운용했다.
피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혈맥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떨치고 계속하여 경천심결을 운용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는 막막함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형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더니 혈맥을 감싼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후 눈을 떴다.
여전히 혈맥이 타들어가는 듯했으나 다른 이상은 없었다.
경천심결의 운용을 마치니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하하!”
며칠간의 고심이 끝났다.
알고 보니 별것 아니었지만, 스스로 하나의 문턱을 넘었다는 생각에 크게 웃었다.
이대로 연혈의 과정을 마치면 경천심결을 완성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경천십이식을 본격적으로 익힐 수 있을 것이다.
그날부터 무한은 밤마다 경천심결에 따라 연혈에 공을 들였다.
성취는 더디었다.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혈관이 타들어가는 고통만 있을 뿐 기운이 쌓이는 느낌이 없었다.
‘근육과 뼈는 한 자리에 있고 내 몸을 이루는 근간이다. 하지만 피는 끊임없이 순환하잖아. 어떻게 단련시킨다는 말이지?’
무명공에는 한 구절 외에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
이를 단서로 자신만의 수련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누군가 이를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주화입마 당하기 딱 좋은 무모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이 없는 무한으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저 경천십이식을 수련하며 연혈의 과정을 몸으로 익혀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
어느덧 신년이 되었다.
천무관은 휴관에 들어갔다.
무한은 아직 연혈 단계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방법을 찾았기에 이전처럼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조금씩 쌓아 가면 언젠가는 연혈을 이룰 거야. 경천무궤를 받으면 거기에 또 다른 단서가 있을 수도 있지.’
연혈의 단계가 되며 기감이 예민해졌다.
전신에 퍼져 있는 기운이기에 내공으로 얻은 기감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게다가 다른 내공과 달리 걷거나 수련을 하면서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느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운기능력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천목혈의 기감이 강해졌다. 가만 있어도 천목혈이 찌릿하곤 한다.
‘잘하면 천목투심술을 칠성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몰라.’